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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 교수의 ‘재미학’ 강의 ‘마지막회’

행복하려면, 쉬는것과 노는것을 구별하라!

  • 김정운│명지대 교수·문화심리학 entebrust@naver.com

행복하려면, 쉬는것과 노는것을 구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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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려면, 쉬는것과 노는것을 구별하라!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나를 구원해준 슈베르트 가곡

그때, 베를린의 밤거리는 화천 북방의 야간행군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아무리 걸어도 가슴 따뜻한 여인을 떠올릴 수 없었다. 독일 여인들의 그 엄청난 가슴들은 따뜻하기보단 무서웠다. 도무지 이 끝없는 외로움에서 나를 구해낼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내 두려움의 실체는 좀 더 근원적인 데 있었다. 내 존재에 대한 질문이었다. 낯선 이 이국땅에서 나는 난생 처음 내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 상황에 부딪힌 것이다. 이 모든 고통의 근원은 도무지 내가 누군지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국에서 내 존재는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아들이고, 내 친구의 친구고, 내 형제의 형제였고,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였다. 내가 누군지에 대해 아무도 물어보지도 않았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나는 당연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 당연한 것들이 이곳 베를린에서는 전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외국인을 불법체류자로 의심하는 고약한 표정의 이민국 직원 앞에서 나는 내가 누군지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증명해야 했다. 내 모든 사회적 관계는 서류로 증명돼야 했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내 외로움은 바로 이 확인되지 않는 내 존재에 대한 고통스러운 외피였을 따름이었다.

베를린의 동쪽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그루네발트 숲이 있다. 숲이 꽤 깊어 밤에는 멧돼지 떼가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 깊은 숲 어귀의 작은 교회에서 음악회를 한다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였다. 당시 내가 알고 있었던 유일한 독일 가곡 ‘보리수’가 포함되어 있는 슈베르트의 연가곡이다. 들어가 앉았다. 할머니 몇 명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탈리아 성악가에 비해 확실히 성량이 달리는 젊은 독일 바리톤이 노래를 시작했다. 그러나 독일 리트, 특히 슈베르트와 슈만의 가곡은 성량이 달리는 바리톤이 불러야 그 슬픔이 제대로 전달된다. 이탈리아 가곡을 부르듯 곰 같은 소리로 질러대서는 그 슬픔을 전달할 수 없다. ‘겨울나그네’는 슬프고 가난하게 노래해야 한다. 그래야 가사 마디마디마다 숨어 있는 이 나그네의 하염없이 여린 가슴에 함께 울 수 있다. 그때, 이름도 알 수 없는 그 젊은 바리톤은 할머니 몇 명 앉혀놓고 ‘겨울나그네’의 슬픔을 그렇게 절절하게 노래했다.

슈베르트의 가곡이 그토록 아름다운 줄은 그때 처음 알았다. 처절한 ‘겨울나그네’의 슬픔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겐 큰 위안이 되었다. 그 후로 내 기숙사방에 들어가기 두려운 저녁이면 음악회를 찾아 나섰다. 슈베르트 가곡을 들을 수 있는 곳은 빠지지 않고 찾아갔다. 그런 종류의 음악회는 베를린의 구석구석에서 밤마다 열렸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바흐도 좋아졌다. 심리적으로 많이 건강해졌다는 뜻이다. 바흐의 음악은 슈베르트에 비해 아주 건강하다. 그렇게 슈베르트와 바흐를 들으며 나는 유학 초기의 그 처절한 외로움과 존재의 불확실함을 극복할 수 있었다. 지금도 슈베르트의 가곡을 듣는 일은 내가 가장 즐겨 하는 일이다. 슈베르트의 가곡을 듣고, 따라 부르는 일은 내 존재를 확인하는 방식이다.



똥오줌 구별 못한다

내 연구실 한구석에는 항상 슈베르트의 가곡집이 꽂혀 있다. 내 카 오디오에도 슈베르트 가곡집은 필수다. 봄이면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를 들어야 한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겨울나그네’를 들어야 한다. 가끔 혼자 운전하며 슈베르트의 가곡을 따라 부르다 보면 내 노래에 내가 감동한다. 눈물까지 흘린다. 차를 세우고 그 벅찬 가슴에 어쩔 줄 몰라 한다. 이렇게 정서적 충격에 한번 노출될 때마다 내 의식구조에 엄청난 변화가 온다. 그래서 나는 교만하다.

내 사회적 역할이나 사람들과의 관계로 힘들어지면 나는 방구석에 앉아 슈베르트를 듣는다. 아내의 관심과 애정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껴질 때도 슈베르트를 듣는다. 그러면 20년 전 베를린에서 맞딱뜨린 그 처절한 외로움과 아내의 무관심이 비교되며 더는 서글퍼지지 않는다. 슈베르트는 내게 면역시스템이다.

존재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마치 하나의 세포가 유지되기 위해 세포의 안과 밖을 구별하고, 막으로 둘러싸인 안쪽의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처럼, 인간도 자신의 안과 밖을 구분해야 한다. 세포가 자신의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면역시스템이다. ‘내가 아닌 것’의 침입을 막아내고, 내 안의 항상성을 유지해주는 세포의 면역시스템처럼 슈베르트의 가곡은 내 안의 항상성을 유지시켜준다. 난생 처음 내가 누군지를 처절하게 고민했던 그 베를린의 밤거리를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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