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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일본 영어교과서에 소개된 바이올린 장인(匠人) 진창현

“차별과 역경이 나를 세계 최고로 만들었다”

  • 이민호│통일일보 서울지사장 doithu@chol.com│

일본 영어교과서에 소개된 바이올린 장인(匠人) 진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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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 친구 시노자키 선생과의 인연

진창현은 이 만남을 계기로 시노자키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치던 학교 근방으로 이사를 왔다. 선생이 자신이 가르치는 어린 학생용 바이올린을 만들어줄 것을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곳이 지금까지 50여 년간 살고 있는 센가와로 여기에서 진창현은 쓸모없는 폐자재를 명기로 탈바꿈시켰다.

시노자키 선생과의 인연이 시작되고 2년쯤 지난 어느 날 선생은 뜬금없이 진창현에게 물었다. “기미 코란하 싯테루노?(君, 洪蘭坡 知ってるの. 자네 홍난파 아는가?)”

그때 진창현은 홍난파가 조국 한국과 일본에서 이름을 날린 천재 작곡가인 줄 모르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진창현에게 선생은 도쿄음악대학 동기생 홍난파에 관한 일화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함께 하숙을 했을 정도로 절친한 친구 사이로 선생은 홍난파가 지은 곡을 들고 아사쿠사(淺草)로 나가 바이올린 연주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솔직히 선생처럼 고명한 일본인이 왜 보잘것없는 나에게 잘해줄까 의아했습니다. 사연을 듣고 보니 선생은 대학시절 만난 조선학생들과의 교류로 조선인에게 친밀감과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고 애환까지도 알고 계셨던 겁니다. 제 바이올린 제작의 운명을 바꿔준 인연은 선배 재일동포들이 맺어주신 것이더군요.”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지독한 가난의 늪에서 탈출하고, 시노자키 선생과 대당 3000엔으로 시작한 바이올린 가격은 7000엔까지 올랐다. 생활이 정상궤도에 오르면서 2남1녀의 자식도 태어났다.

한국 국가인 애국가(愛國歌) 작곡가인 안익태(安益泰) 선생도 시노자키 선생과 음대 동창으로 교분을 나누고 있었다. 스페인에서 활동하던 안 선생은 일본으로 연주회 지휘를 하러 올 때면 진창현의 집을 찾았다. 그때마다 망가진 현악기들을 맡겼고 진창현은 정성을 들여 고쳤다.

“훗날 고향 어머니를 만나니 ‘넌 대체 일본에서 무슨 일을 하길래 외국에서 온 지체 높은 양반이 나에게 그렇게 큰돈을 쥐어주느냐’고 말씀하시더군요. 안 선생은 아무 내색 않고 저를 도와주셨던 겁니다. 당시엔 한일 간에 국교가 수립되기 전이라 한국으로 송금하기 힘들었거든요.”

알고 보니 안 선생은 서울에 들를 때마다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본점)로 진창현의 모친을 불러 사례를 했던 것이다. 그의 바이올린 제작 인생은 탄탄대로를 달리는 듯 보였다.

간첩 혐의로 끌려가 고문 받다

그러나 거칠 것 없을 것 같던 그에게 다시 한번 큰 시련이 찾아왔다. 사건은 한일 국교가 수립된 뒤 조국을 찾았을 때 벌어졌다. 1968년 5월 도일 25년 만에 고향인 경북 김천의 이천(梨川)마을을 찾아간 진창현을, 이복형이 북한 스파이로 밀고한 것이다.

“그땐 참 운이 없었어요. 그해 초 북한공비들이 청와대로 침투(1·21사태)하고 푸에블로호 사건이 있어 정국이 뒤숭숭했잖아요. 하지만 고문을 받으며 겪은 신비한 체험은 제 바이올린 제작의 전기가 되었습니다. 의식이 흐릿해지며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 여태껏 살아온 풍경들이 필름처럼 떠올라 지나가는 겁니다. 그리고 ‘살고 싶다’는 의욕이 솟구치는 거예요.”

진창현은 얼굴이 물속에 거듭 처박히고 온몸에 전기가 관통되는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가 끔찍한 고통의 기억을 대수롭지 않은 듯 이야기하자 곁에 있던 부인 이남이(李南伊) 여사가 손사래를 치며 그의 말문을 가로막았다.

“말도 마세요.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에요. 무혐의로 풀려나 일본행 비행기를 타고 있을 때에도 무서워서 안절부절못했습니다. 둘이서 손을 꼭 붙잡고서 ‘제발 빨리 이륙해라’고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다시 붙들려 갈까 봐서….”

‘차라리 일본으로 국적을 바꿨더라면 이런 수난은 겪지 않았을 텐데….’ 일본에서 온갖 서러움과 조롱을 당하며 한국 국적을 지켜온 그에게 조국은 잊지 못할 상처를 안겨줬다. 일본으로 돌아온 진창현은 매일 밤 악몽과 환청에 시달렸다. 정신병원을 다녀야 할 정도로 심신이 쇠약해졌다. 그때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던 바이올린 작업도 중단했다. 그렇게 삶의 정체기를 1년 가깝게 보냈다.

진창현이 재기의 발판으로 삼은 건 고문 경험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었다. 그는 조국에서 당한 고문이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줬다고 마인드컨트롤을 했다. 이상하게도 생사가 갈리는 듯한 극한 체험을 한 다음, 어린아이처럼 왕성한 호기심이 발동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더 좋은 소리, 더 아름다운 모양을 가진 바이올린을 만들겠다는 의욕을 갖고 온갖 실험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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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호│통일일보 서울지사장 doithu@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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