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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일본 최고의 노인요양병원’ 세운 재일한국인 강인수

“어머니 치마저고리 떠올리며 한국인 긍지 잊지 않아”

  • 이민호│통일일보 서울지사장 doithu@chol.com │

‘일본 최고의 노인요양병원’ 세운 재일한국인 강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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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고의 노인요양병원’ 세운 재일한국인 강인수
탄광 노동자 아들로 태어난 조센진

병원 설립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92년 5월 마침내 히로시마현 아키다카다시(安藝高田)시에 그가 그토록 간절히 염원해온 노인복지병원 야치요가 세워졌다. 강인수는 병원의 캐치프레이즈로 ‘정성을 다해 손님을 대접하는 마음(持て成しの心·모테나시노 코코로)’을 내걸었다. 이 문구 속에 몸은 물론이거니와 마음까지 세심하게 보살피는 병원을 만들겠다는 자신과의 다짐, 그리고 서명으로 그를 지지해준 히로시마 주민들과의 약속을 담았던 것이다.

강인수는 1944년 양친이 강제징용을 당해 끌려온 야마구치(山口)현 우베(宇部)의 탄광 막사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일본에서도 경관이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히는 우베이지만 일제 때 그곳은 한국인에게 ‘공포의 땅’이었다. 수많은 동포의 목숨을 앗아간 생지옥이었다. 일본인들은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정도의 좁은 갱도로 한국인들을 밀어 넣고 탄을 캐라고 강요했다. 당장 갱도가 무너져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우베 외곽의 해저탄광 조세이(長生)에서는 갱 속으로 바닷물이 밀려 들어와 200여 명의 한국인 청년이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던 한국인 징용자들의 비참한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다.

“아버지는 광복이 1년만 늦었더라도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자주 말씀하셨어요.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개처럼 부려먹고선 급료는커녕 말 한마디 좋게 한 적이 없다고 원통해 하셨죠.”

어린 시절의 강인수에게는 아버지의 분노가 그저 푸념으로만 느껴졌다. 한국사람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워 학교에서는 일본인인 양 살았다. 그는 지금까지 초등학교 3학년 가을운동회 날을 잊을 수 없다. 치마저고리를 입고 교정에 나타난 어머니를 보자 그 자리에서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어머니가 친구와 선생님들 앞에서 ‘내 아들 강인수는 한국인’이라고 만천하에 광고한 꼴이었다. 머릿속은 친구들이 ‘조센진(朝鮮人)’이라 놀리는 모습으로 가득 찼다.



그는 학창시절 내내 ‘일본 속의 이방인’이란 관념을 떨쳐내지 못했다. 마침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1959년 12월 재일동포 북송선이 떴다. 그 이듬해 시집간 큰누이도 금의환향(錦衣還鄕)의 부푼 꿈을 안고 북송선을 탔다. ‘차별 없는 공평한 세상’으로 갈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긴 그도 하굣길에 구청에 들러 귀국신청서를 썼다.

그로부터 1주일쯤 지났을까. 집에 오니 초저녁부터 아버지가 거나하게 술에 취해 있었다. 아버지는 강인수를 보자마자 뛰쳐나와 그의 양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들을 향해 아버지는 “하나 있는 아들놈까지 떠나면 우리는 무슨 낙으로 살란 말이냐? 아무리 힘들어도 가족은 떨어져선 안 되는 법”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렇게 심하게 성을 내는 아버지의 모습은 난생처음이었다. 알고 보니 그날 구청 직원이 아버지에게 미성년자 강인수의 보호자로서 ‘승낙 사인’을 받으러 다녀간 참이었다. 아버지의 강경한 반대로 귀국의 뜻을 이루지 못했던 그는 훗날 두고두고 아버지의 애정에 감사하면서 살았다.

북송선 탄 누나와 눈물의 해후

1959년부터 북송된 재일동포의 수는 9만3000여 명. 동포들은 그저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으로 배에 올랐다. 당시 재일동포들 사이에서는 북한이 남한보다 잘산다는 사실이 익히 알려져 있어 일본에서 차별받느니 돌아가서 잘살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일본의 여론도 남한보다 북한에 우호적이던 시절이었다. 서점에서는 공산주의 관련 책들이 인기를 끌고 매스컴은 김일성 정권이 주장하는 ‘지상낙원’ 선전물을 있는 그대로 보도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재일동포 북송은 일·북 적십자사 간 ‘인도적 조치’라는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일본이 북한과 야합해 자국 내 한국인들을 내쫓으려는 공작이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이념에 따라 북한으로 간 동포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강인수는 북송된 누이와 만난 적이 있다. 야치요병원을 건립하던 1992년 5월 히로시마일본상공회의소 방북단의 일원으로 북한에 갔다. 다른 이들은 해산물이나 농산물 수입과 같은 비즈니스가 목적이었지만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누이와 만나는 일 뿐. 돌아오기 이틀 전 드디어 상봉의 기회가 찾아왔다. 평양 옥류관에서 냉면을 먹던 중 장내 방송으로 “히로시마에서 온 강인수씨 누님을 만나는 시간이 왔습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헤어진 지 32년 만에 만난 누이와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는 평양 고려호텔 근방의 일식집에서 누이와 함께 한 식사를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때 누이는 스시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물만 들이켰다. “많이 들라”는 그에게 “일본을 떠나온 이래 스시를 맛보는 건 처음이구나. 먹으려니 목이 메일 것 같아 삼킬 수가 없구나”라고 귀엣말을 하는 것이다.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는 누이를 보며 어찌나 가슴이 저리던지…. 그 뒤 누이와 몇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만남은 그게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강인수의 민족성은 집안에서 길러졌다. 그의 집은 전형적인 재일동포 가정이었다. 온 가족이 새벽부터 저녁까지 고물을 주우러 다니고, 밤이면 ‘야미주(밀주)’를 빚어 팔았다. 재일동포들은 마땅한 직업을 가질 수 없으니 생계를 꾸리려면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도 부모님의 고집으로 집에서만큼은 경상도 사투리를 전용어로 썼다. 그의 아버지는 경남 진주, 어머니는 경남 통영이 고향이다.

어머니는 고등학교를 마친 강인수가 취업을 하자 조용히 그를 불러냈다.

“인수야 운동회 일로 어미 원망 많이 했지? 네가 한국인이란 사실을 잊고 사는 것 같아 그날 일부러 치마저고리를 입고 학교에 갔단다.”

어머니의 고백을 듣자 10년 전과는 또 다른 부끄러움에 쥐구멍을 찾고 싶었다. 그토록 지독하게 차별받고 궁핍했던 시절이었지만 아들의 민족성만은 지키고 싶었던 어머니는 스스로 굴욕을 달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어머니의 양손을 붙들고 굵은 눈물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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