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인셉션’의 한 장면. 상대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찾아내기 위해 들어간 꿈속의 꿈이다.
꿈과 현실, 가상현실과 현실의 경계를 지우는 영화가 할리우드에서 유행이 된 지는 이미 오래지만, ‘인셉션’을 본 관객 일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연상하기도 했다. 지금 ‘1Q84’를 통해 일본과 한국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1985년에 발표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주인공이 현실과 자신의 무의식이라는 두 개의 세계에 공존하며 병렬적으로 진행되는 기묘한 스토리를 가진 소설이다. 꿈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 가장 아래에 있는 기이한 세계로 내려가는 ‘인셉션’의 주인공 코브의 여정은 분명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도 흡사하다는 느낌을 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미국에 꽤 많이 번역되긴 했어도, 크리스토퍼 놀란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직접 읽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만약 소설을 읽었고 그 영향을 받았다 해도 굳이 감출 이유는 없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인셉션’에 영향을 끼친 영화로 ‘블레이드 러너’ ‘매트릭스’ ‘다크 시티’ ‘13층’ 같은 영화를 직접 언급했으니, 소설을 하나 둘 끼워 넣어도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인셉션’과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유사성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두 작품의 직접적인 연관성보다는, 1980년대 이후 일본 대중문화와 미국 할리우드의 상호교류, 혹은 상호교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일본의 대중문화가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하는 미국 대중문화에 스며든 일련의 흐름이 그것이다.
‘오타쿠’와 ‘아니메 팬’
1999년 개봉한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는 단순한 흥행성공을 벗어나 전세계에 문화적인 충격을 안겨주었다. 세계 곳곳의 신화와 종교적 상징을 무차별적으로 차용하고, 일본과 홍콩 등 동양 대중문화를 직접적으로 인용하며, 테크놀로지에 대해 도발적인 주장을 펼치는 등 ‘매트릭스’에는 세기말에 어울리는 모든 것이 잡탕으로 섞여 들어가 있었다. 이후 ‘매트릭스’는 3부작으로 만들어지면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철학적인 상징과 은유가 가득한 스토리와 인물들을 분석한 철학책도 나왔다. 동시에 ‘매트릭스’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과 함께 일본 애니메이션과 홍콩 액션영화를 가장 직접적으로 활용한 영화로서도 각광받았다. 거칠게 ‘매트릭스’를 설명한다면 동서양 대중문화는 물론 철학과 종교까지 망라한 잡학사전 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매트릭스’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워쇼스키 형제는 수많은 인터뷰를 통해 자신들의 영화적 원류를 드러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오타쿠’였다. 워쇼스키 형제는 자신들이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열광적인 팬, 즉 오타쿠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오시이 마모루의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를 인상 깊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매트릭스’를 보면서 기시감을 느꼈을 것이다. 워쇼스키 형제가 말하듯, ‘매트릭스’는 ‘공각기동대’에 대한 오마주로 가득하다. 가죽 옷을 입은 트리니티의 모습을 보면서 ‘공각기동대’의 주인공인 쿠사나기 소령을 떠올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트리니티가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은 분명 ‘공각기동대’에서 본 것과 같았다. 워쇼스키 형제는 ‘매트릭스’의 세계관과 내용을 공유하고 더욱 많은 것을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애니매트릭스’에서는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들을 직접 초빙해 연출을 맡겼다. ‘무사 쥬베이’의 가와지리 요시야키, ‘카우보이 비밥’의 와타나베 신이치로, ‘청의 6호’의 마에다 마히로가 바로 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