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느다란 신음이 들려온 것은 실험시작 7일째 되는 날 오후 2시쯤이었다. 마스크를 쓴 연구진의 눈빛으로 복잡한 신호가 오갔지만, 이내 피곤한 나머지 들리는 환청일 것이라고 애써 딴청을 피웠다. 그러나 다음 순간 들려온 소리는 분명 “배고파요… 밥, 밥, 밥 먹고…”였다. 단순한 신음이 아닌 사람의 말이었다.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가 만들어낸 그 한마디에 순간 하늘이 무너져내렸고, 그는 연구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마침 들어오던 선배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생체실험을 진행하며 어느새 기계처럼 말라버린 감성이 갑자기 터져 나왔다. 그날 그는 두 번 다시 메스를 잡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다짐은 지켜지지 못했다.
‘노벨상 받을 만한 위업’
1992년 북한을 탈출해 서울에 온 여의사 김소연씨.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6·25전쟁의 와중에 어머니 등에 업혀 북한으로 간 그는 혁명가 유가족에게 입양된 뒤 10대의 어린 나이에 평양의학대학에 입학했다. 제1외과학부에 배치된 그는 그 무렵 평생 지울 수 없는 만남을 갖는다. ‘봉한학설’로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북한의 의학자 김봉한 당시 평양의대 생물학교실 교수와의 만남이었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김봉한은 한때 북한에서 신화적인 존재였다. 1961년부터 5년여 동안 다섯 편의 논문을 발표하며 “동양의학의 핵심개념인 경락의 해부학적 실체를 확인했다”고 밝힌 그의 연구는 당시 북한 언론의 대대적인 조명을 받았고, 평양 당국은 이를 발전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내각이 직접 결정문을 발표해 전자현미경이나 방사선 추적장치 등 첨단 연구장비를 투입하고 직속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락연구원’을 창설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북한은 그의 논문을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등으로 번역해 각국에 배포하는 등 노벨상 수상을 위한 준비작업에 나섰을 정도였다. ‘사회주의 조국’의 영광을 세계적으로 떨치고 싶었던 1960년대 북한의 대표적인 국가주도형 과학연구였다.
동양의학의 대표적인 치료기법인 침과 뜸은, 분명히 효과가 있음에도 그 명확한 메커니즘이 서구의학적 관점에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침과 뜸을 놓는 자리를 경혈(經穴), 그 자극을 온몸의 장기에 전달하는 통로를 경락(經絡)이라고 부르지만, 과연 경락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혹은 단순한 신경계의 작용인지는 분명한 결론이 없어 한의학과 서구의학 사이에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 김봉한은 사람 몸속의 경락을 해부학적으로 찾아냈으며 이는 혈관계와 내분비계 외에 이제까지 미처 발견되지 못했던 제3의 순환계가 사람의 몸속에 그물처럼 퍼져 있다고 주장했다. ‘봉한관’으로 명명한 이 순환계가 다름 아닌 경락의 실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