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호

一人之下 萬人之上 리커창 국무원 부총리

최연소 승진 거듭한 ‘리틀 후’ 주석 안 부러운 ‘파워 총리’ 굳히기

  • 하종대│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전 베이징 특파원 orionha@donga.com│

    입력2010-09-01 09: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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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머리 내민 새가 먼저 총 맞는다.’중국 속담이다. 리커창 부총리가 그런 경우다.
    • 후진타오 주석의 전폭적인 후원 아래 일약 ‘내일의 태양’으로 떠올랐지만, 너무 빨랐다.
    • 성실하고 유능하고 청렴하지만, 반대파의 표적이 될 조건도 고루 갖췄다.
    • 그러나 사람의 일은 모른다. 더욱이 제5세대 지도부가 결정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다.
    • 분명한 것은 비록 리커창의 ‘상한선’이 총리일지라도 그 자리가 옛 총리들의 위상과는 차원이 다르리라는 점이다.
    一人之下 萬人之上 리커창 국무원 부총리

    2007년 10월22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제17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에서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된 리커창이 기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내일의 태양은 안후이(安徽)에서 뜬다.” 2004년말 미국 투자은행의 한 경제분석가는 이렇게 예언했다. 좀 이르긴 했지만, 이는 곧 리커창(李克强·55) 당시 랴오닝(遼寧)성 서기가 2012년 가을 구성될 제5세대 지도부 인사에서 후진타오(胡錦濤·68) 당 총서기의 자리를 물려받는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제5세대 지도부 선두주자 중 안후이성 출신은 바로 그다. 2006년 12월 ‘뉴스위크’ 아시아판도 ‘내일의 스타’ 특집에서 리커창을 중국의 미래 지도자로 소개했다. 시진핑(習近平·57) 당시 저장(浙江)성 서기는 안중에도 없었다.

    중화권 언론도 일찌감치 리커창을 주목하고 조명했다. 심지어 일부 매체는 그가 허난(河南)성과 랴오닝성의 당 서기로 재직할 때 공공연하게 ‘내일의 태양’이라고 일컫기도 했다.

    주변국 지도부의 시각도 비슷했다. 그가 랴오닝성 당 서기이던 2007년 4월 랴오닝성을 방문한 롄잔(連戰·74) 대만 국민당 명예주석은 조상에 차례를 지낸 뒤 리커창에게 ‘올라라, 올라라, 또 올라라(登高, 登高, 再登高)’라고 쓰인 유리 공예품을 건넸다. 대만의 총리와 국민당 주석까지 지낸 그가 이런 선물을 건넨 것은 당시 6개월 남짓 남은 중국 공산당의 제17차 당 대회에서 제5세대 지도자로는 가장 앞에 섰다가 2012년 제18차 당 대회에서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으로 최고의 지위에 오르라는 은밀한 축원 메시지였다. 오카다 가쓰야 전 일본 민주당 대표도 이에 앞서 2005년 랴오닝성을 방문한 뒤 “리 서기가 장차 중국의 미래 지도자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내놓고 말했다.

    이처럼 2007년 10월 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리기 2, 3개월 전까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구성에서 리커창이 시진핑의 뒤에 서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과 후진타오 현 주석, 쩡칭훙(曾慶紅) 당시 국가부주석 등 최고 권력의 향방을 결정하는 극히 제한된 범위의 권부 인사를 제외하고는. 그래서인지 리커창을 소개하는 책은 지금도 시진핑 국가부주석 못지않게 많다.

    ‘내일의 태양’에서 2인자로



    리커창은 2007년 10월22일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제17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에서 시진핑과 함께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됐다. 하지만 그의 권력서열은 7위로 6위인 시진핑에 한 끗발 밀렸다. ‘내일의 태양’에서 2인자, 즉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으로 바뀐 것이다. 이에 따라 이듬해 3월 열린 제11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국인대) 제5차 전체회의에서 그는 국무원 부총리로 선출됐다. 시진핑은 국가부주석에 뽑혔다. 국가부주석은 중국의 차기 지도부에서 정치권력 1인자인 국가주석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자리다. 부총리는 다음에 총리를 맡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 6월 훙칭(洪淸)이 펴낸 리커창 전기의 제목은 아예 ‘미래의 중국 총리 리커창(他將是中國大管家-李克强傳)’으로 돼 있다. 이변이 없는 한 리커창은 2인자란 얘기다.

    하지만 리커창은 과거 어느 총리보다 실질적인 파워를 지닌 총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2002년 가을 등장한 제4세대 지도부는 후진타오 주석-원자바오(溫家寶) 총리-쩡칭훙 부주석 등 3인의 ‘트로이카 체제’로 불렸다. 하지만 2012년 가을 구성될 제5세대 지도부는 ‘시-리(習-李) 양두체제’가 될 것으로 분석가들은 예상한다. 시진핑은 태자당의 현직 영수로서, 리커창은 ‘퇀파이(團派·중국공산주의청년단 출신)’의 현직 좌장으로서 엇비슷한 권력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상하이방(上海幇), 태자당, 퇀파이가 각각 3명씩 황금분할을 이룬 제17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와 달리 18기에는 퇀파이가 더 많이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리커창을 위시한 퇀파이의 목소리가 제5세대 지도부에서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게다가 총리가 관할하는 중국 경제는 일취월장하고 있다. 올해는 일본을 제치고 명실상부한 2위로 올라설 조짐이다. 2019년엔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를 추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되면 중국 총리의 힘이 국제무대에선 물론 내부에서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내각에 해당하는 국무원의 수장인 총리는 4명의 부총리와 5명의 국무위원(부총리급) 외에도 27개의 부서를 거느린다. 또 31개 지방 성장과 수십여 개의 국무원 직속기구, 국무원 판사(辦事)기구, 직속 사업단위의 최고책임자도 대부분이 부장(장관)급이다.

    一人之下 萬人之上 리커창 국무원 부총리

    2009년 9월28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중국 전현직 최고 권력자들이 건국 60주년 기념 초대형 뮤지컬 ‘부흥의 길’을 관람한 뒤 기립박수를 치고 있다. 왼쪽부터 허궈창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권력서열 8위), 시진핑 국가부주석(6위), 자칭린 전국정협 주석(4위), 우방궈 전인대 상무위원장(2위), 후진타오 국가주석(1위), 장쩌민 전 국가주석, 원자바오 총리(3위), 리창춘 상무위원(5위), 리커창 부총리(7위), 저우융캉 상무위원(9위).

    성실, 청빈하고 친화력 뛰어나

    리 부총리의 평소 신조는 신초(愼初·시작할 때처럼 신중하고), 신미(愼微·작은 일에도 신중하며), 신독(愼獨·혼자 있을 때도 삼가고 경계하며), 신욕(愼欲·물욕을 내지 않는다)이다. 주변 인사들은 그를 ‘능력이 출중해 일을 잘하면서도 성과를 자랑하지 않고 청빈한 삶을 즐기는 관리’라고 평한다.

    2006년 가을 제16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 개막 직전 그를 2시간 동안 인터뷰한 홍콩 ‘다궁(大公)보’ 기자는 “그는 인문지식의 기초가 탄탄했다.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말했다. 또 “인터뷰 기사가 나가기 전에 좀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충실히 기록했으면 됐지 내가 볼 필요는 없다”며 정중히 거절했다고 전했다.

    그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대인관계가 뛰어나며 학구파로 불린다. 논문 장학금이나 원고료를 받으면 동료들과 식사를 하거나 선물을 보내는 것으로 인간관계를 두텁게 했다고 홍콩에서 발간된 ‘중공(中共) 제5세대(第五代)’는 전했다.

    성실하게 일하는 자세에서 중국 지도부 인사 가운데 그를 따라올 자가 거의 없다. 그렇다고 부하를 혹사하면서 일을 시키는 스타일도 아니다. 그를 옆에서 지켜본 랴오닝성의 고위 간부는 “리 서기는 일벌레 스타일이지만, 그렇다고 주말에 간부를 불러 모아 회의를 열지 않았다”고 했다.

    일을 할 때는 조리가 있고 질서정연했다. 아랫사람을 질책할 때는 절대 큰소리를 내지 않았다. 걸핏하면 밤늦게, 혹은 주말에도 아랫사람을 호출해 호통을 치거나 가욋일을 시키는 것으로 소문난 보시라이(薄熙來·61) 충칭(重慶)시 서기와 정반대다. 그래서인지 주변 인사 가운데 그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2004년 3월 랴오닝성장을 마치고 상무부장으로 영전하는 보시라이의 이임식엔 랴오닝 성 간부들이 대거 불참했다. 같은 해 12월 리커창이 허난성 당 서기를 마치고 떠날 때는 관리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오랫동안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 그가 여러 차례 일어나 그만하라고 손짓을 하고 나서야 박수가 그칠 정도였다. 그는 대중을 상대로 연설할 때는 주로 원고 없이 즉석에서 했다. 하지만 몇 십 분의 연설에서도 정확한 숫자가 수없이 튀어나와 청중을 놀라게 했다.

    리커창은 청빈한 삶을 즐겼다. 공무와 관련된 연회가 아니면 정중히 거절했다. 별 일이 없으면 대부분 비서와 함께 간단한 식사를 했다. 2006년 부친상을 당했을 때는 현지 관리들이 보낸 선물을 완곡하게 거절해 돌려보냈다. 부친의 장례는 보통사람과 다를 바 없이 간소했다.

    그는 대학시절 자유파 지식인들과 잘 어울렸다. 그와 함께 베이징대 법학과에서 공부한 유명 법학자 장밍안(姜明安) 베이징대 교수는 “리커창은 민주법치 관념이 매우 강했다”며 “주위 동료와의 관계가 좋고 사상 역시 매우 자유분방했다”고 전했다.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후 중국을 떠나 반체제 인사가 된 그의 대학 동기 왕쥔타오(王軍濤)도 “리커창은 예리한 말재주와 재능, 지혜를 갖춘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면서 “리커창이 ‘벼슬에 대한 욕망(官·#54510;)’이 강하며 정계로 진출한 이후 달라졌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그가 대학을 졸업한 뒤 공청단의 중앙서기처 서기 겸 전국청년(靑聯)의 부주석으로 있을 때는 크게 달라진 행태를 보였다. 톈안먼 사태 한 달 전인 1989년 5월 그는 여러 차례 학생 지도부에 “학교로 돌아가라”고 권고했다. 그러면서 학생 지도부와 대화하려는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를 비판했다. 대신 이를 무력으로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한 덩샤오핑(鄧小平), 양상쿤(楊尙昆), 리펑(李鵬)의 입장을 시종일관 지지했다.

    一人之下 萬人之上 리커창 국무원 부총리

    2009년 4월13일 중국을 방문한 오세훈 서울시장과 환담하는 리커창 부총리.

    왕쥔타오는 “리커창이 관직에 진출한 뒤 비록 세상사에 물들었지만, 사상은 여전히 과거와 같이 날카로웠고 도량은 넓었으며 개방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고 평했다. 그러나 왕쥔타오는 중국의 자유주의자이자 톈안먼 사태의 주역이다. 따라서 중국의 현 정치체제에서 ‘사상이 여전히 날카롭고 개방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는 그의 찬사는 리커창에게 가점보다는 감점 요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왕쥔타오의 이런 평가와는 달리 올해 리커창의 전기를 펴낸 훙칭은 “리커창은 상급기관이나 상급자의 지시에 매우 잘 복종하는 사람”이라고 촌평했다.

    본가·처가 모두 관료, 정치인

    리커창은 1955년 7월 안후이성의 성도 허페이(合肥)에서 출생했다. 조적(祖籍·원적)은 출생지 허페이에서 북쪽으로 100㎞ 가까이 떨어진 딩위안(定遠)이다. 조적과 출생지가 모두 안후이성으로 안후이방(安徽幇)에 속한다. 딩위안은 안후이성의 동부지역으로 안후이성에서 인구가 가장 많고 면적도 가장 넓은 현이다.

    중국 공산당 중앙지도부에서 안후이방은 막강하기 그지없다. 우선 권력서열 1인자인 후 주석이 안후이성 지시(績溪)현 출신이다. 후 주석은 상하이에서 태어나 장쑤(江蘇)성 타이저우(泰州)에서 자랐지만, 그는 자신을 소개할 때면 늘 ‘안후이성 지시현’을 강조했다. 안후이성과 장쑤성은 청나라 초기만 해도 같은 성이었는데, 인구가 너무 많아 강희(康熙)제 6년인 1667년 두 성으로 분리됐다. 우방궈(吳邦國·69)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역시 안후이성 페이둥(肥東) 출신이다. 제5세대 지도부로는 2012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진입이 유력한 왕양(汪洋·55) 광둥(廣東)성 서기 겸 중앙정치국 위원이 쑤저우(宿州) 출신이다. 또 중앙정치국 입성이 예상되는 왕민(王珉·60) 랴오닝성 서기도 화이난(淮南) 출신이다.

    리커창의 부친 리펑싼(李奉三)은 문재(文才)가 뛰어나고 문무를 겸비한 지방 정부의 중급 간부였다. 항일 무장투쟁 시절 공산혁명에 뛰어들어 전투에 참가한 적도 있다. 사회주의 중국이 세워지자 1951년 8월 고향 딩위안의 북쪽에 인접한 펑양(鳳陽)현 현장에 임명됐다. 이어 안후이성의 원롄(文聯·중국문학예술계연합회의 약칭) 근무를 거쳐 안후이성 방부(蚌埠) 시의 중급법원장을 지냈다. 1975년 안후이성 당 위원회 문사(文史)판공실 주임을 거쳐 1980년대 초 안후이성 지방지(地方志)판공실 주임을 끝으로 퇴직했다. 그는 매우 청렴한 관리이자 엄격한 아버지였다.

    모친 차오리쥔(曺麗俊)은 안후이성 펑양현 출신. 리펑싼은 펑양현 현장으로 있을 때 그녀를 알게 돼 결혼했다. 이들 사이에서 누나 리샤오칭(李曉晴)과 리커창, 남동생 리커밍(李克明) 2남1녀가 태어났다. 그런데 리펑싼에게는 전처가 있었다. 전처와 사이에 낳은 아들이 리커창과 15살 가까이 나이차가 나는 리커핑(李克平)이다. 리커핑은 안후이성 계획생육위원회 부주임을 지냈다. 리펑싼이 왜 첫째 부인과 헤어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리커창의 장인 청진루이(程金瑞)는 공청단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퇀파이 인물이다. 당초 산둥(山東)의 해방구에서 일하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초기 허난성으로 옮겨왔다. 1953년 허난성의 성도 정저우(鄭州)시의 공청단 서기로 선출됐다. 이후 1957년 5월에 열린 중국신민주주의청년단(당시엔 중국공산주의청년단을 이렇게 불렀다)의 제3차 대표대회에서 63명의 후보위원 중 33위를 차지했다. 당시 공청단의 제1서기는 후야오방(胡耀邦)이었다. 1963년 10월 허난성 공청단 부서기까지 올랐던 그는 이후 더 이상 오르지 못하고 퇴직했다. 하지만 지금도 국무원 푸핀반(扶貧辦·빈곤층 돕기 판공실) 고문을 맡고 있다.

    장모 류이칭(劉益淸)은 신화사 허난 분사 기자였다. 1980년 5월 중국 공산당 중앙선전부가 신화사에 위탁해 창간한 잡지 ‘반웨탄(半月談)’의 총편집실 부주임까지 지냈다. 이 잡지는 1985년부터 무려 360만 부씩 팔려 ‘중화 제1의 잡지’란 명성을 얻었다. 그는 퇴직 이후에도 1993년 6월 국무원의 지도 아래 설립한 전국적 사단조직인 중국푸핀(扶貧·빈곤층 돕기)개발협회 상무이사를 맡고 있다.

    누나 리샤오칭은 국무원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약칭 國資委)의 안후이성 정보중심의 주임이며, 남동생 리커밍은 국가연초전매국 부국장이다. 리커창의 형제·누이를 포함한 본가, 처가 모두 행정관료이자 정치인인 셈이다.

    一人之下 萬人之上 리커창 국무원 부총리
    학생대표로 혁명원로들과 교분

    리커창은 어릴 때부터 수재였다. 그가 들어간 난먼(南門)소학교는 허페이에서 가장 좋은 학교였다. 1968년 가을 입학한 허페이바중(八中) 역시 4년제 대학 입학률이 80%를 넘는 명문학교다. 하지만 그가 중고교(중국은 중고교 과정을 한 학교에서 배운다)에 입학했을 때 중국은 이미 문화대혁명(1966~76)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든 상태였다. 대학 입학시험은 폐지됐고, 그가 입학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중고교의 수업도 사실상 중단됐다. 그의 부친은 문혁기간 조반파(造反派) 홍위병들에게 구타를 당한 끝에 평생 불구자로 살았다.

    학교 수업은 중단됐지만 리커창의 배움은 도리어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부친의 소개로 유명한 한학자인 리청(李誠·1906~77)의 문하생이 되어 ‘사기’ ‘한서’ ‘후한서’ ‘자치통감’ 등 고대 명저를 익힐 수 있었다. 고교를 마치고 7개월 뒤인 1974년 3월 농촌으로 하방(下放)됐지만 여전히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이는 부친이 현장을 지낸 데다, 모친의 고향인 안후이성 펑양현의 다먀오(大廟)공사 둥링(東陵)대대로 배치됐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지식청년으로서 농장에 하방된 초기에 그는 농촌 일에 잘 적응하지 못해 몸이 망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곧 풍부한 지식으로 과학영농을 실천하고 성실한 자세로 임해 다먀오공사 당위의 인정을 받으면서 2년 만인 1976년 둥링대대의 당 지부 서기가 됐다. 1976년 5월 입당한 뒤 얻은 첫 관료직이었다.

    1977년 8월 대입시험을 부활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4개월 뒤인 그해 12월10일 치러진 첫 부활 고사엔 무려 670만명이 응시했다. 이 중 대학에 들어간 사람은 27만3000명에 불과했다. 리커창은 당시 베이징대의 경쟁률이 29대 1에 이르자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제1지망을 안후이사범학원으로, 제2지망을 베이징대 법학과로 써 넣었다. 하지만 그는 당당히 베이징대에 합격했다. 리커창은 나중에 “안후이사범학원을 제1지망으로 한 것은 학비를 받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베이징대에선 학생회 활동을 활발하게 벌이며 주석에 당선됐다. 그는 베이징대 학생 대표로 있으면서 천윈(陳雲), 리셴녠(李先念), 덩잉차오(鄧潁超), 펑전(彭眞) 등 혁명원로들을 대학강연회에 초청했다. 이 기획을 통해 리커창은 원로들과 자주 접촉해 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고르바초프 전 러시아 대통령이 온천 휴양지의 지역 책임자로 있으면서 당 고위간부의 눈에 들어 출세한 것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중국의 반체제 인사인 왕쥔타오는 2005년 8월 발표한 ‘베이징대의 오랜 풍운아 친구에 대한 논평’이라는 긴 글에서 당시 활발했던 학생운동 활동가로 후핑(胡平)과 장웨이(張·#54285;), 리커창을 꼽았다. 그는 “당시 자유민주주의의 대표는 후핑이었고, 또 다른 일파의 대표는 장웨이였다”며 “만약 학생회 주석이던 장웨이가 베이징대에 남아 공청단 서기가 됐더라면, 그리고 톈안먼 사태의 무력진압에 항의해 공직을 사퇴하고 나오지 않았다면 리커창은 오늘날처럼 차세대 선두주자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후진타오 만난 뒤 승승장구

    베이징대를 졸업할 때 리커창은 법학과의 성적 우수생 4명 중 1명이었다. 1982년 학교를 졸업한 뒤 그에겐 미국으로 유학을 갈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학교에 남아 베이징대의 공청단 서기가 되는 길을 택했다. 이후 허난성 당 부서기를 맡을 때까지 16년간 공청단에서 근무했다. 누구 못지않은 퇀파이 경력이다.

    베이징대 공청단 서기이던 그를 공청단 중앙으로 추천한 사람은 1983년 중국 공산당 중앙조직부 부부장이던 왕자오화(王照華). 당시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이던 왕자오궈(王兆國)는 리커창을 높이 평가했고, 1983년 7월 공청단 중앙학교의 부부장 겸 전국학련(學聯) 비서장으로 발탁했다. 평생 잊지 못할 ‘후진타오-리커창’의 스승-제자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당시 후진타오는 공청단의 중앙서기처 서기를 맡고 있었다. 같은 해 12월 리커창은 공청단 중앙서기처 후보서기로 승진했다. 한 달 뒤인 1984년 1월엔 중앙서기처 제1서기로 승진했다.

    후진타오와 함께 일하면서 그는 승승장구했다. 1993년 5월 최연소(38세)로 부장(장관)급인 공청단 제1서기에 임명됐다. 후 주석이 42세의 나이에 공청단 제1서기에 임명된 것보다 4년 더 빨랐다. 리커창이 같은 공청단 사무실에서 후진타오와 함께 일한 것은 1983년 7월~1985년 11월의 2년5개월에 불과하다. 하지만 실제로 후진타오를 직속상관으로 모신 것은 1993~98년의 5년을 포함해 7년이 넘는다. 리커창이 공청단 제1서기이던 시절 후진타오가 리 제1서기로부터 직접 보고를 받는 공산당 중앙서기처 서기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리커창의 근무 자세는 물론 성격까지 후진타오와 흡사하다. 중국의 정치분석가들은 온건하고 노련하며 진보적이고 너그럽고 실사구시하는 자세가 모두 닮았다고들 한다. 성실함과 함께 몸가짐에 흐트러짐이 없는 것은 물론 윗사람에게 고분고분하고 지시에 잘 따르는 것도 후진타오를 빼닮았다. 리커창이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올라와 후진타오 주석과 같은 반열에 오르기 전까지 ‘리틀 후’로 불린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윗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총애했는지는 1992년 가을 중국 공산당 제1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당 지도부는 리커창을 쑹더푸(宋德福) 공청단 제1서기의 후임으로 임명하기 위해 후보위원으로 추천했다. 하지만 리커창은 전국 대표들의 지지가 낮아 낙선했다. 그러자 당 중앙지도부는 리커창을 위해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를 따로 열었다. 회의에서는 “낙선은 리커창의 잘못이 아니라 당 대회 준비공작조가 당 대표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리커창은 1993년 5월 공청단 제1서기로 임명됐다.

    베일 속의 아내 청훙

    언론노출 피해 연구실 떠나지 않는 영어 교수


    一人之下 萬人之上 리커창 국무원 부총리

    리 부총리 부인 청훙의 젊은 시절 사진.

    리커창 부총리의 부인만큼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도 드물다. 중국의 종합검색 사이트인 바이두(百度)에 그의 이름을 쳐 넣으면 엉뚱한 사람만 줄줄이 나온다. 중국의 ‘황태자’ 시진핑의 아내 펑리위안(彭麗媛·48)을 모르는 중국인은 거의 없을 정도다. 하지만 리 부총리의 아내 청훙(程紅·53)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중화권 언론에서 가장 많은 오보가 나온 사람도 청훙이다.

    청훙은 수도경제무역대 외국어과 영어 교수. 그는 남편이 2007년 10월 중국 최고지도부인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자 더 이상 강의를 하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미국에서 운영하는 중문(中文) 인터넷 매체 둬웨이(多維)가 최근 보도했다.

    오랫동안 공청단에서 근무한 그의 부친 청진루이는 후야오방 당시 당 총서기나 후치리(胡啓立) 당 중앙서기처 서기, 왕자오화 당 중앙조직부 부부장, 마스장(馬石江) 베이징대 당위 부서기 등과 교분이 깊어 리커창이 공청단에서 승승장구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청훙의 원적은 산둥이지만 1957년 허난성의 성도인 정저우에서 태어났다. 문화대혁명 기간엔 허난성 자(탲)현의 한 인민공사로 하방됐다. 1977년 대학입시가 부활되자 인민해방군 총참정보부의 뤄양(洛陽)외국어학원 영어과에 입학했다. 이 대학은 당초 정보를 다루는 군 간부와 해외주재 무관, 정보감청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됐다.

    대학 졸업 후엔 칭화(淸華)대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했다. 1983년 친구의 소개로 당시 베이징대 공청단 서기이던 리커창과 만나 1년간 열애 끝에 결혼했다. 결혼 후 얼마 안 돼 베이징경제학원(수도경제무역대학의 전신)에서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어 중국과학원에서 미국 문단의 신주류인 자연문학을 연구해 2000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44세가 되던 이듬해 정교수로 승진했다.

    청훙은 서로 어울려 다니며 교제하는 데 열심인 중국의 여느 고위지도자 아내들과는 달리 학교 안에서 조용히 연구하는 것을 즐겼다. 남편과 함께 정부 공식 행사장에 나타나 언론에 얼굴이 공개된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 학교 측은 여러 차례 그에게 과주임 등 교내 직책을 주려 했으나 그는 번번이 고사했다. 그가 ‘치핑푸구이(妻憑夫貴·남편의 출세에 의지해 아내의 신분이 높아지는 것)’를 가장 혐오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도경제무역대 인터넷 자료에 따르면 그는 교내에서 2번이나 ‘내 마음속 10대 걸출 교수’로 뽑혔다. 또 대학 내에서 우수강의 교수로, 베이징 시내 대학에서 교학(敎學)성과 2등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리 부총리와 청훙의 외동딸은 미국 유학 중이다. 홍콩의 ‘다궁보’에 따르면 이들 세 가족은 집에서 중국어 대신 영어로 대화를 자주 나누며, 청훙은 남편의 발음이 틀리면 바로바로 교정해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임명됐지만 공청단에 근무하는 동안 그는 적잖은 업적을 남겼다. 우선 빈곤지역 학생들이 돈이 없어 배움의 기회를 잃지 않도록 돕는 희망공정(希望工程) 사업을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 희망공정의 개념도 그가 창안한 것이다. 공청단 중앙이 운영하는 중국청년여행사를 발전시켜 궤도에 올려놓은 것도 리커창이다. 하지만 이런 공적은 후 주석의 지시와 지지 아래 이뤄진 것이다. 리커창의 정책엔 자신만의 특색이 없다고 지적되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차세대를 이끌 제5세대 지도부에서 중추적인 정치세력으로 부상한 퇀파이에 대해 ‘3다3소(三多三少)’라는 평가가 있다. 즉, 재경(財經) 이외의 부문 전문가는 많은데 재경 부문 전문가는 적고, 지방정부 지도자 출신은 많은데 중앙 요직 경험자는 적고, 학력이 높은 사람은 많은데 현장 실무 경력이 많은 이는 적다는 것이다.

    하지만 리커창은 예외다. 그는 1985년 중국 경제학계의 태두이자 개혁개방의 선구학자인 리이닝(?以寧·70)을 지도교수로 ‘중국 경제의 3원 구조를 논한다’라는 논문을 썼다. 이는 1991년 중국사회과학원이 격월간으로 발행하는 권위 있는 학술지 ‘중국사회과학’ 제3기에 실렸다. 이 논문은 학자와 중국 지도부의 높은 평가를 받으며 중국 경제학계의 최고상인 ‘쑨예팡(孫冶方) 경제과학상 논문상’을 받았다. 고위 정치지도자들이 더러 받는 ‘장식용 상’과는 차원이 다른 상이다. 이어 1988년엔 중국에서 처음으로 쑨예팡 경제과학상을 받은 샤오줘지(蕭灼基) 교수의 지도 아래 ‘농촌공업화 : 구조전환 과정에서의 선택’이라는 제석사논문을 썼다. 법학을 전공한 관료지만 총리감으로서 손색없는 경제학 소양을 갖춘 셈이다.

    하지만 1995년에 그가 취득한 박사 논문의 제목은 그를 소개한 책자와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봐도 찾을 길이 없다.

    ‘농업대성’ ‘공업대성’ 首長

    공청단에서 가속 페달을 밟은 리커창은 1999년 최연소로 ‘농업대성(農業大省)’인 허난성 성장에 임명됐다. 그의 정치적 후견인인 후 주석이 최고권력자 자리에 오른 지 몇 개월 뒤인 2002년 12월30일에는 허난성의 당 서기 겸 성장으로 승진했다. 이어 2004년 12월엔 ‘공업대성(工業大省)’인 랴오닝성 당 서기까지 맡으면서 중국에서 종사자가 가장 많은 농업과 경제 비중이 가장 높은 공업을 모두 맡아본 이례적인 지도자가 됐다.

    그는 1999~2004년 5년간 허난성 성장과 당 서기로 재직하며 성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1990년대 초 31개 성 중 28위에서 중위권인 18위로 올려놨다. 1998년 4308억위안이던 허난성의 지역 총생산은 6년 만에 8554억위안으로 무려 2배 가까이 늘었다.

    중앙정부의 ‘중부 굴기’ 원류인 ‘중원 굴기(中原·#54366;起)’를 처음 제창한 이도 리커창이다. 그는 2003년 7월 중국 공산당 허난성 당 위원회 제7기 5차 전체회의에서 처음으로 ‘중부 굴기를 실현하기 위한 결의’를 통과시켰다.

    랴오닝성 당 서기로 부임한 뒤에는 ‘모든 사람은 잠잘 집이 있어야 한다(人人有房住)’라는 구호 아래 푸순(撫順)시의 판잣집 100만호의 주택개량사업을 벌여 인민의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2년에 걸친 대대적인 주택개량사업 끝에 184만5000호의 집을 개량하고 50만호의 주택 문제를 해결했다. 또한 동북진흥계획의 세부항목으로 다롄(大連), 잉커우(營口), 단둥(丹東) 등 연해공업지구 개발을 위한 ‘5점1선(五點一線)’ 계획을 수립해 의욕적으로 추진함으로써 3년 만에 랴오닝성이 ‘조화사회’의 선두로 올라서게 했다.

    하지만 정치적 위기에 몰린 적도 있다. 허난성 성장과 당 서기로 재직할 때 허난성에 에이즈가 창궐했다. 또 성장으로 재직하던 2000년 12월25일엔 뤄양(洛陽)에서 대화재가 발생해 311명이 사망했다. 일각에서는 그의 인책을 예상했지만 후 주석의 구명 덕분에 2년 뒤 성장에서 당 서기로 도리어 승진했다.

    2005년 2월 랴오닝성 푸신(阜新)에서 발생한 쑨자완(孫家灣)탄광의 가스폭발 사고 때도 200여 명이 사망했다. 원자바오 총리는 그해 5월 중순 “이 사고를 엄중 처리하겠다”고 공언했지만, 모든 책임은 당시 부성장이던 류궈창(劉國强·57)에게 돌아갔다. 2001년 5월 랴오닝성 부성장에 임명된 그는 10년이 넘은 지금도 부성장에 머물고 있다. 잘나가는 리커창의 희생양이 된 셈이다. 이것 또한 후 주석의 후원에 힘입은 바 크다.

    ‘1인자 역전’ 기회 올까?

    리커창은 공청단 제1서기를 시작으로 4세대 지도부의 후진타오나 리창춘(李長春)처럼 ‘최연소 임명’ 행진을 거듭했다. 1997년에는 15기 중앙위원에 당선돼 ‘당 중앙’의 성원이 됐다. 이에 따라 같은 세대 인물들 가운데 확실한 우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2007년 10월의 제17차 당 대회에서 권력서열 7위로 시진핑(6위)에 한발 밀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입성했다. 중국 속담엔 ‘머리 내민 새가 먼저 총 맞는다(槍打出頭鳥)’는 말이 있다. 리커창이 이를 입증했다. 너무 빨리 많은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면서 후진타오의 후계자라는 점이 부각됐다.

    그러나 시진핑이 당장 한발 앞서긴 했어도 리커창을 완전히 따돌린 것은 아니다. 똑같이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진입했을 뿐 아니라 향후 후계자 자리를 놓고 벌어질 싸움에서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물론 이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정치적 변고가 발생했을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이미 리커창은 원자바오 총리를 보좌하는 제1부총리로서 총리 수업을 받고 있다. 그의 학력이나 경력 역시 총리감에 딱 들어맞는다.

    게다가 지금까지는 같은 퇀파이 후 주석의 후원이 큰 도움이 됐지만, 이제는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고 있다. 리커창 부총리에게선 ‘리틀 후’와 ‘퇀파이’의 냄새가 너무 짙게 풍긴다는 것이다. 상하이방과 태자당이 공격하기엔 호재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중국 공산당이 집권한 이후 같은 파벌에서 잇달아 최고지도자가 나온 적은 없다. 각 계파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시진핑 국가부주석이 리커창 부총리를 따돌리고 차세대 후계자로 급부상한 것도 이 때문이다.

    리커창 부총리의 한국 인맥

    이해찬 전 총리와 공적·개인적 교류 지속


    리커창 부총리는 랴오닝성 당 서기로 재직하면서 한국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리 부총리와 가장 친분이 두터운 인사는 이해찬 전 총리로 알려졌다. 이 전 총리는 총리로 재직하던 2005년 9월 외교통상부의 중국 고위인사 초청 프로그램으로 방한한 리 당시 서기를 만났다. 이 전 총리는 딸이 베이징대에서 유학해 개인적으로도 중국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중국을 자주 방문했으며, 총리직을 떠난 뒤에도 개인 자격으로 랴오닝성을 방문해 리 서기를 만나기도 했다.

    방한 당시 리 서기는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현 유엔 사무총장)과 김덕규 국회부의장 등을 만나 안면을 익히고, 손학규 경기지사(현 민주당 상임고문)와도 인연을 맺었다. 리 서기는 그 무렵 이미 차세대 지도자로 거론되고 있었으나, 청와대는 당시 직급상의 문제를 들어 예방을 거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손 지사는 이듬해 4월 경기도 대표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을 때 선양(瀋陽)에 들러 리 서기와 만났다. 손 지사는 리 서기가 두뇌가 명석하고 패기가 있으면서도 조심스러운 성격이어서 중국의 차세대 지도자감으로 손색이 없다는 인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와 오세훈 서울시장도 리 부총리와 친분이 있다. 지난해 4월 중국을 방문해 인민대회당에서 리 부총리를 만난 오 시장은 “잘 검증된 차세대 지도자라는 느낌을 받았다”며 “매우 명민하고 논리적이며 성격이 온화했다”고 말했다.

    리 부총리는 첫 방한 이듬해인 2006년 5월 선양에서 열린 한국주간 행사 개막식에 직접 참석해 축사를 했다. 재계에서는 STX조선의 강덕수 회장과 친분이 깊다. 강 회장은 2006년 랴오닝성 다롄(大連)항에 8400만달러를 들여 중국에 처음으로 조선소를 지으면서 리 부총리를 알게 됐다.

    리 부총리의 한국인 지인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그가 2007년 가을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기 전까지는 해외를 오가며 쌓은 인연이 별로 없고, 주변국이나 서방국과의 공식적인 외교무대에도 거의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무위원으로 선출된 뒤에는 해외 행보가 잦아졌다. 2008년 12월 인도네시아, 쿠웨이트, 이집트 등 3국을 방문한 데 이어 지난해 6월엔 투르크메니스탄, 핀란드, 우즈베키스탄, 호주, 뉴질랜드를 방문했다. 지난해 10월 말엔 뉴질랜드를 다시 방문했다.

    일본과는 오래전부터 친분이 두텁다. 1985년 3월 중일 우호교류의 일환으로 구성된 중국 청년대표단의 간사로 일본을 방문한 이후 일본 정계지도자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가져왔다. 일본 정계는 리 부총리가 일본 기업이 많이 진출한 랴오닝성의 당 서기를 지낸 데다 일본과 친분관계가 깊은 점 때문에 그의 부상(浮上)을 환영하고 있다. 랴오닝성에 진출한 일본 기업은 6000여 개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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