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석씨가 만든 한인유권자센터는 미국 의원들이 무시 못하는 시민단체로 성장했다.
그렇다면 김 전 소장은 언제 어떤 계기로 미국 내에서 한국인들의 힘을 결집하는 일을 시작했을까. 김 전 소장은 그 시작을 199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발생한 흑인폭동으로 꼽는다. 1985년 미국으로 건너와 뉴욕시립대 헌터칼리지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뒤 이민사회의 정치력 신장에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미국은 1990년대 초 조지 H W 부시 대통령 재임시절 걸프전에서 승리하면서 유일 초강대국의 지위를 확고히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경기침체를 겪는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부터 강조해온 강한 미국이 완성되는 순간이었지만 서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졌고 뉴욕, LA, 시카고 등 대도시에서 사는 극빈자들에게 가장 큰 고통이 부과되고 있었다.
김 전 소장은 “사회보장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태에서 흑인들이 술렁이기 시작했고 황당하게도 흑인들의 불만은 정치력이 약한 소수민족에게 화풀이하는 식으로 분출됐다”고 말했다. 그는 “실제 폭동이 일어나기 전에 LA 인근에서는 배가 고파 거리로 몰려나온 흑인들이 한인들이 주로 운영하는 청과상이나 델리 등에서 물건을 사고는 돈을 내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생기면서 크고 작은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LA에서 백인 경찰이 흑인 용의자 로드니 킹을 하이웨이에서 구타하는 장면이 CCTV에 찍히고 이 장면이 미국 전역에 알려지면서 흑인들의 감정이 폭발했다.
김 전 소장은 “LA 폭동으로 한인들이 오랫동안 일궈온 삶의 터전이 하루아침에 망가지는 것을 보고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며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한인사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플러싱에서 뭉쳤다”고 회고했다.
유대인의 로비를 벤치마킹하다
이들은 미국에서 소수계 민족이 안정된 삶을 영위하려면 정치적인 힘이 있거나 아니면 정치적으로 강력한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의회민주주의가 발달한 미국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나오는 원천이 어디인지를 따져보니 바로 선거 때 행사하는 표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김 전 소장 등은 대도시 한인 밀집지역에서 유권자를 결집하고 스스로의 권익을 옹호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인종의 용광로라고 불리는 미국에서 다른 소수계 민족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례들을 공부했다. 당연히 유대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표적인 유대인 로비단체인 미국 이스라엘공공정책위원회(AIPAC)를 집중적으로 연구했고 10년 전부터는 정식회원 자격을 얻어 AIPAC 수련회에 매년 참석했다. 최초의 흑인대통령 후보와 최초의 여성대통령 후보가 맞붙어 ‘세기의 대결’로 불린 2008년 미국 민주당 경선과 대선전은 AIPAC의 영향력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그해 6월4일 민주당 경선 승리로 대선후보 자격을 확정지은 버락 오바마 후보는 만 하루가 지나지 않아 AIPAC 정책수련회 마지막 날 연설자로 연단에 올랐다. 그는 “내 마음을 담아, 이스라엘의 진정한 친구로서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안전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란 핵 보유를 저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할 것입니다”라고 연설해 8000여 명의 유대계 청중으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