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호

이 바보들아, 문제는 콘텐츠야!

여덟 번째 르포 : 문학구장 습격사건

  • 송홍근│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10-09-30 11:2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이 바보들아, 문제는 콘텐츠야!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1982년은 각별하다. 야간 통행금지를 해제한 그해 프로야구가 시작됐다. 우범곤 순경 총기 난사 사건에 놀라고, 복서 김득구가 죽어 가슴을 쓸어 내린 것도 그해다.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우리는 학교가 파하면 해태 브라보콘을 사 먹었다. 브라보콘 포장을 뜯으면 야구선수 사진이 나왔다. 100원 동전 두 개를 주고 브라보콘을 구입할 때마다 설레었다.

    누굴까?

    박철순이다!

    나는 OB 베어스 회원이었다. 5000원을 내고 가입하면 야구점퍼, 야구모자, 사인볼 같은 걸 줬다. 야구점퍼를 걸치지 않으면 학교에서 소외받는 시절이었다.



    우리 학교엔 MBC 청룡 점퍼가 판쳤다. 파란 바탕에 청룡 그림을 새긴 촌스러운 디자인이 기억난다. “곰을 그려 넣은 OB 점퍼가 예뻤다”고 확신한다.

    불멸의 기록

    부잣집 아이들은 브라보콘을 하루에도 여러 개씩 사 먹었다. 구단별로 선수를 정리해 5개 구단 컬렉션을 꾸린 녀석도 있었다.

    왜 5개 구단이냐면?

    유치하고 졸렬하게도, 치사하고 쩨쩨하게도 롯데 자이언트 선수 사진은 없었다. 아이들은 컬렉션을 완성하고자 사진을 교환했다. 구슬 딱지 현금이 오갔다. 스타플레이어보다 무명 선수 사진이 귀해 비싸게 거래됐다.

    인호봉 금광옥 같은 선수 사진을 뽑으면 대박이었다. 삼미 슈퍼스타즈 선수 사진은 희소가치가 컸다. 선수 이름도 웃겼다. 기명(奇名) 전통은 삼미에서 오랫동안 이어졌다.

    소설가 박민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야구팀 멤버이던 이분들의 존함을 경건하고 거룩한 마음으로 읽어달라”면서 이렇게 썼다.

    이 바보들아, 문제는 콘텐츠야!
    ① 금광옥 : 어떤 광물(鑛物)의 일종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아니다. 배번은 22번, 포지션은 포수였다.

    ② 인호봉 : 인수봉 주변 산봉우리 명칭일 것 같지만, 역시 아니다. 배번은 31번, 포지션은 투수였다.

    ③ 감사용 : 새로 발견된 공룡의 학술적 명칭인가, 하겠지만 그럴 리가. 배번은 26번, 포지션은 투수였다.

    ④ 장명부 : 장부나 숙박부의 일종이라 착각하기 쉽지만, 아니다. 배번은 34번, 포지션은 투수였다.

    ⑤ 정구선 : 정구 경기장의 라인을 일컫는 말 같지만, 역시 아니다. 배번은 23번, 포지션은 2루수였다.

    ⑥ 정구왕 : 정구의 챔피언을 뜻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그럴 리 없다. 배번은 17번, 포지션은 외야수였다.

    ⑦ 김바위 : 할 말 없다. 어쨌든 배번은 25번, 포지션은 1루수였다.

    박민규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이들을 위한 헌사다. 삼미는 1할2푼5리라는 ‘불멸의 승률’을 남기고 1982년 후기리그를 마친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떠도 삼미는 졌다.

    잔디밭에 누워 별을 보다

    이 바보들아, 문제는 콘텐츠야!
    어스름이 깔린다. 귀뚜라미가 짝을 찾아 운다. 조명탑에 불이 들어온다. 소슬바람을 맞은 잔디가 일어선다.

    최정 홈런~. 최정 홈런~.

    관중이 SK 3루수를 연호한다. 타자가 1루 쪽 스탠드를 바라본다. 이윽고 인천에서 나고 자란 심선미(30)씨가 비명을 지르면서 날뛴다. 좋아 죽는다.

    최정 선수가 그라운드를 돈다. LG 선발 김광삼을 상대로 투런홈런을 때렸다. 3루를 돌아 홈 플레이트로 돌아오는 모습이 의기양양하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다.

    심선미씨는 다음달 서울 개봉동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피앙세 한규진(31)씨가 삼겹살을 상추에 싸서 약혼녀 입에 넣어준다. 같이 온 친구들이 박수를 친다. 맥주잔이 부딪친다. 축제다.

    “신나요. 야구 몰랐을 때는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술, 삼겹살, 소시지 사는 데 10만원 썼어요. 소풍 나온 것 같아요. 정말로 신나요.”

    그녀는 지난해부터 인천 문학구장을 찾았다. 온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표정으로 그녀는 말했다.

    “날마다 축제예요. SK 와이번스 만세!”

    삼겹살 굽는 냄새가 달다. 군침이 돈다. 바비큐 존엔 야구의 ‘야’자도 모르는 사람이 여럿이다. 이들은 제사보다는 잿밥에 더 신이 난다.

    외야 펜스 뒤쪽 커플석도 난리가 났다. 나무로 짠 의자, 탁자는 피크닉용으로도 손색없다. 커플이 호젓하게 앉아 입을 맞춘다. 다 마신 맥주가 벌써 여덟 캔. 독일산 맥주 뢰벤브로이를 아이스박스에 넣어왔다.

    2인용 좌석으로 꾸린 커플존은 사랑스럽다. 스마트폰으로 중계방송을 들으면서 아버지와 아들이 귀엣말을 주고받는다. 경기장 전 좌석에서 와이파이가 터진다.

    문학구장은 여성 관중이 많기로 소문났다. 커플존에도 이성커플보다 동성커플이 더 많다. 20대 여성 커플이 등짝에 ‘이만수’라고 적힌 유니폼을 입고 쌍둥이처럼 일어나 춤을 춘다. 블루진스커트 밑으로 드러난 허벅지에 눈길이 간다.

    SK 와이번스는 3만400석이던 좌석수를 2만8000석으로 줄였다. 입장료 손해를 보면서 2400석을 포기한 것이다. 그러곤 그린존, 패밀리존, 커플존, 프렌들리존을 꾸렸다.

    네 살 먹은 다은이가 잔디밭에서 뒹군다. 부모는 야구를 보면서 집에서 싸온 냉커피를 마신다. 다은이는 병마개를 따지 않은 오렌지주스를 손에 쥐고 있다. 가족은 서울에서 인천으로 야구 보러 왔다. 아빠는 해태 타이거즈 팬이다. 엄마가 SK를 좋아한다.

    “서울에선 야구장에 아기 데리고 가기 힘들어요. 남편은 야구 보고 나는 아이 보거든요. 잔디밭에서 즐기니까 신나죠.”

    동네 뒷산으로 놀러 나온 것 같다. 신분증을 맡기면 돗자리를 빌려준다. 잔디밭에 누워 별을 본다. 비가 물러간 하늘이 깨질 듯 청명하다. 풀 냄새가 상쾌하다.

    딱!

    야구공이 날아온다. 피크닉을 즐기던 행락객이 일어선다.

    안타다.

    다시 축제다.

    놀다 지친 이들이 잔디밭 너머 그늘집에서 쉰다. SK가 8대 0으로 LG에 앞서 있다. 승부는 결론 났지만, 축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스피커에선 김트리오가 부른 ‘연안부두’가 흘러나온다. 신나는 노래다.

    우승보다 두 배 관중이 좋다

    이 바보들아, 문제는 콘텐츠야!
    SK 와이번스, 현대 유니콘스가 패권을 다툰 2003년 한국시리즈 5·6·7차전은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렸다. 7차전까지 간 명승부였지만 역대 최악의 한국시리즈로 남았다. 관중 동원에 실패해서다. 챔피언을 가리는 7차전에서마저 관중석이 썰렁했다. 팬이 없기로 소문난 두 팀이 연고지도 아닌 곳에서 맞붙어서다.

    인천 야구는 주인을 잃고 방황했다. 삼미 슈퍼스타즈·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가 차례로 사라졌다. 태평양을 인수한 현대는 서울 목동구장으로 가겠다면서 수원을 중간 기착지로 삼아 인천을 떠났다. SK가 전주를 연고지로 한 쌍방울 레이더스 선수들을 주축으로 팀을 창단해 인천에 둥지를 틀었다.

    인천 사람들은 한동안 SK를 고향 구단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인천고 제물포고 동산고를 나온 선수들은 현대를 따라 수원으로 갔다. SK는 창단 첫해 평균 홈 관중 1281명이라는 21세기판 불멸의 기록을 세운다.

    한국시리즈 7차전 때 SK 관중석에 군데군데 자리 잡은 이들의 상당수가 회사에서 나눠준 표를 갖고 경기장을 찾은 SK그룹 직원이었다. 나도 SK가 뿌린 티켓으로 경기장을 찾았다. SK가 고용한 일꾼이 나를 직원으로 오해하고 경기장 입구에서 직원용 도시락까지 챙겨줬다.

    도시락은 맛났지만, 응원석은 썰렁했다. ‘인천 SK’라고 적은 현수막이 안쓰러웠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연안부두’는 응원가라고 부르기 민망할 만큼 구슬펐다. 사람들은 가사를 몰라서 따라 부르지 못했다.

    “나 같은 선수면 당근 오케이죠.”

    이 바보들아, 문제는 콘텐츠야!
    그랬거나 말거나 그해 우승은 연안부두를 떠난 현대가 차지했다.

    SK는 2003년 준우승을 했으나 성적이 오락가락했고, 관중 수도 제자리걸음이었다. 차이나타운 중국집은 붐벼도 야구장은 스산하고, 쓸쓸했다. 와이번스는 국내 최대 이동통신사 자회사. SK그룹 차원에서도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이 난국을 어이할꼬.

    불멸의 기록을 세운 SK는 판을 바꾸기로 했다. 스포츠, 엔터테인먼트를 결합했다. ‘우리는 우승보다 두 배 관중이 좋다’는 구호를 내걸었다. SK텔레콤이 부가서비스 고안하듯 아이디어를 모았다.

    관중이 돌아오니 성적이 좋아졌다. 스타가 모인 팀이 우승하는 게 아니라 우승한 팀 선수들이 스타가 되는 게 야구다.

    경기 시작 두 시간 전 SK 1루수 박정권 선수가 파우더룸으로 들어간다. 홈경기 때마다 선수 한 명씩 팬들과 미팅을 한다. 팬이 질문하고 선수가 답하는 기자회견 형식이다. 박정권도 한때는 무명이었다.

    “딸이 야구선수와 결혼하겠다고 하면 찬성할 건가요?”

    여성 팬이 침을 꿀꺽 삼키면서 물었다.

    “그게 사람 따라 다른데….”

    박 선수가 뜸을 들인다.

    “나 같은 선수면 당근 오케이죠.”

    팬들이 까르르 웃는다.

    이 바보들아, 문제는 콘텐츠야!
    미팅이 끝나자 기념 촬영을 했다. 팬들이 선수를 놓아주지 않는다. 강이슬(21)씨가 동영상카메라 앞에 섰다. 그녀는 “박정권 선수는요? 잘생긴데다…, 하하하. 파이팅”이라고 응원 메시지를 남겼다. 이 메시지는 경기 도중에 구장 전광판을 통해 관중에게 소개된다.

    “박정권 선수 팬이세요?”라고 묻자, 그녀가 웃는다.

    “아니요. 조동화 선수가 제일로 좋아요.”

    팬 미팅이 끝나자 파우더룸에 여성들이 몰려든다. 파우더룸은 화장을 고치거나 커피를 마시는 여성 전용 공간. 놀러 나온 여자가 풍기는 향기가 코를 간질인다.

    복도에선 엄정욱·고효준 선수가 테이블에 앉아 팬들에게 사인을 해준다. ‘엄정욱’(등짝에 엄정욱이라고 써 있다!)이란 여성이 엄 선수에게 등판을 내민다. 팬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미인(美人)이다. 자신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에 사인하는 엄 선수 기분은 어떨까. 아이, 어른 가릴 것 없이 휴대전화에 달린 카메라로 선수들을 찍느라 바쁘다.

    경기장 밖에선 상품이 걸린 단체 줄넘기 행사가 한창이다. SK 유니폼을 입은 초등학생 녀석들이 자동차처럼 생긴 2인승 자전거를 탄다. 전기자동차가 문학경기장역에서 1루 매표소까지 사람을 실어 나른다.

    와이번스랜드에서 아이들이 뛰논다. 작은 테마 파크다. 바운스 기구에 올라타 비명 지르는 꼬마 녀석이 귀엽다. 피칭존에선 30대 남자가 아들 앞에서 김광현 선수 와인드업을 흉내 낸다. 누구나 김광현, 엄정욱이 되는 공간이다.

    지정석 테이블이 잠실구장보다 넓어 쾌적하다. 테이블마다 ‘CAFE AMOJE’가 붙여놓은 메뉴판이 있다. 술과 안주, 식사와 음료를 판다. 전화로 주문하면 자리로 배달해준다. 메뉴가 다채롭다. 탕수육 라조기 같은 중국 음식도 낸다. 하이네켄 생맥주와 크리스피 치킨을 시켰다. 자리에 앉아 신용카드로 결제했다.

    이 바보들아, 문제는 콘텐츠야!
    이 바보들아, 문제는 콘텐츠야!

    지방자치단체마다 돔구장을 건설하겠다고 소란이다. 광주, 대구도 돔구장을 짓겠다고 설레발을 쳤으나 결과는 시원찮다. 세금으로 짓자니 돈이 없고, 민자를 유치하자니 나서는 기업이 없다. 돔구장은 짓는 데만 4000억원 넘게 들고, 유지·관리비용도 만만찮아 건설하고 나서도 돈 먹는 하마가 되기 십상이다. 야외야구장은 1000억원 안 되는 돈으로 지을 수 있다. 유지·관리비용도 돔구장보다 저렴하다.

    이 바보들아, 문제는 콘텐츠야!
    대구·광주시민은 1인당 국민소득이 아프리카 국가 수준일 때 지은 경기장에서 지금껏 야구를 본다.

    영어로 야구장이 ballpark 아닌가. 야구는 야외에서 봐도 된다. 사실 그게 더 재밌다. 공수표만 날린 전·현직 지자체장에게 한마디하고 싶다.

    이 바보들아, 문제는 콘텐츠야!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