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호

과학입국의 꿈을 펼친 지도자, 박정희

  • 고승철│저널리스트 koyou33@empas.com│

    입력2010-10-05 13:2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과학입국의 꿈을 펼친 지도자, 박정희

    ‘과학대통령 박정희와 리더십’<br>김영섭 외 15인 공저, MSD미디어, 552쪽, 1만5000원

    20세기 역사에서 한국의 경제 기적은 매우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여력이 있다면 이를 연구하고 싶다.”

    20세기가 낳은 석학 피터 드러커 선생은 90세 무렵부터 이렇게 자주 말했다. 그는 96세로 영면함으로써 이 연구과제를 수행하지 못했다. 드러커뿐만 아니라 여러 석학이 한국의 발전이 갖는 세계사적 의미에 관심을 나타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벗어난 140여 국가 가운데 한국이 유일하게 선진권에 들어선 나라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발전 비결은 무엇인가. 이 화두를 놓고 1998년 몇몇 경제전문가가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을 초청해 여러 차례 세미나를 열었을 때 필자도 참관한 적이 있다. 저녁식사로 김밥을 먹으며 밤늦게까지 진지한 토론을 벌이는 자리였다. 오원철 전 수석은 박정희 정부 시대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관여한 인물이다. 세미나가 진행될수록 오 전 수석의 과학기술 지식에 놀랐다. 흑판에 쓰는 글씨와 그림은 대부분이 기술 관련 내용이었다. 경성공전(서울대 공대 전신) 화공과 졸업생인 그는 한국 산업이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범위를 넓혀야 한 이유를 설명했다. 산업 고도화를 이뤄야 수천만 한국인이 배를 곯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신념과 열정이 돋보이는 인물이었으며 기술의 중요성을 피를 토하듯 역설했다. ‘한국형 경제건설’이라는 두툼한 책 6권을 집필하기도 한 그는 토론이 활성화될수록 박정희 대통령의 역할을 강조했다.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박 대통령만큼 뼛속깊이 절실히 여긴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자를 우대하고 과학입국 기술입국을 외치는 대통령의 통치철학은 거의 신앙 수준이었단다.

    작고한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증언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선진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과학 두뇌들을 모셔와 키스트를 만들고 카이스트, 기술학교를 세우는 등 과학기술 인력을 키운 업적은 박 대통령의 통찰력 덕분”이라면서 “대통령은 나에게 장관 임명장을 주면서 과학기술처 예산을 따려고 경제기획원을 들락거리지 말 것이며 어떠한 인사 청탁도 받지 말라면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고 밝혔다.



    서평으로 다룰 책을 고르려고 서점의 인문서적 신간 코너를 살필 때 ‘과학대통령 박정희와 리더십’이 눈에 띄었다. 박정희와 관련된 책은 워낙 많이 출판된 터여서 처음엔 별 관심이 없었다. 더욱이 박정희의 공과(功過)에 대해서는 논쟁적인 요소가 많으므로 박정희 관련 서적은 서평 대상으로 부적절할 것이라는 선입관을 가졌다.

    박정희 시대에 큰 빚 진 오늘

    그러나 책을 펼쳐 이기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의 축사를 읽고서 마음이 달라졌다. 부국의 핵심 요소로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간파한 박정희의 치적을 평가한 그 글에서 진정성이 보였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과학기술이 물질적 토대와 정신적 문화를 양립시키며 발전해 간다고 할 때 오늘날과 같은 발전의 토대는 ‘박정희 시대’에 큰 빚을 지며 성장해 온 것이 사실이지만 과학기술에 대한 철학과 의지는 ‘그의 시대’에 비해 오히려 빛이 바래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됩니다.

    그런 이유에서 ‘박정희’와 ‘과학기술’을 공통분모로 놓고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과학기술에 대한 대통령의 철학과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되새겨본다는 점에서 곧, 이 나라 과학기술 발전의 방향과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공저자 대부분은 과학기술 분야 인사들이다. 이들은 저마다 박정희와의 인연을 회고하며 척박한 상황을 이겨낸 성과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자세로 글을 썼다. 전상근 전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장의 증언을 살펴보자. 미국 퍼듀대에서 화공학을 전공하고 귀국한 그는 충주비료공장, 문경시멘트공장 등에서 일하다 공무원으로 발탁됐다. 그는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울 때 함께 마련한 ‘기술진흥 5개년계획’을 입안한 실무책임자였다.

    기술진흥 계획의 핵심은 기술인력을 어떻게 확보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과학두뇌 여럿을 초치해 연구소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는 판단이 섰다. 그 장소로 홍릉과 대덕단지가 정해졌다. 홍릉 임업시험장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입지로 선정할 때의 일화다. 산림청이 반대하는 등 실무자 차원에서는 난제가 수두룩했다. 보고를 받은 대통령은 농림부장관, 산림청장, 서울시장 등을 즉시 불러 함께 홍릉으로 갔다. 산림을 되도록 훼손하지 않는 언덕을 골라 입지로 결정했다. 서울시장에게는 홍릉으로 가는 길을 넓히라고 지시했다.

    금동화 전 KIST 원장은 박정희를 ‘KIST의 아버지’라 불렀다. 1965년 박정희는 미국을 방문해 존슨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열었을 때 한국이 과학기술연구소를 설립할 수 있도록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존슨 대통령도 청년 시절에 교사로 활동한 경력이 있어 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적이 있는 박정희와 의기투합했다. 미국은 KIST 설립에 자금, 인력, 노하우를 제공했다.

    박정희는 KIST를 과학기술을 연구하는 ‘집현전’으로 여겼다. 세종대왕이 한글 창제에 몰두하는 집현전 학사들을 격려하려 자주 들른 것처럼 박정희도 수시로 KIST를 방문했다. 설립 후 3년여 동안 한 달에 한두 번꼴이었다. 연구소 박사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애로를 듣곤 즉석에서 해결해주었다. 재미 한국인 과학자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조국 근대화에 동참해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안 돼”라는 말 한 번 없었다

    1965년 5월 중순, 미국 뉴욕의 아스토리아 호텔.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재미교포와 만나는 자리였다. 대통령은 참석자와 일일이 악수하며 인사했다. 전자공학을 전공한 김기형 박사도 거기서 대통령을 만나 “전자부품을 개발하는 연구를 하는데 장차 한국에서도 이 부품이 필요할 것”이라 말했다. 1년 후 김 박사는 박 대통령이 보낸 전문(電文)을 받고 귀국을 결심했다. 그는 귀국 후 장관급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으로 임명돼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각국을 돌며 과학기술 행정 시스템을 조사했다. 박 대통령은 김 박사를 불러 5시간 동안이나 독대하며 선진 과학기술 행정에 대해 보고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1967년 4월 과학기술처가 창설됐다. 초대 장관으로는 김 박사가 임명됐다. 그는 박 대통령이 원자력발전, 포항제철 설립 등에서 선견지명을 보였다고 역설하면서 “나는 박 대통령을 모시는 동안 단 한 번도 ‘안 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그만큼 과학기술을 우선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강했다는 뜻이다.

    KIST에 이어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에 이르기까지 과학기술처 설치, 과학재단 창립, 대덕연구단지 조성,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국방과학연구소 설립 등이 이어졌다.

    박정희가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하던 1961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였다.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다. 한국은 박정희 정부의 경제성장 드라이브 정책에 힘입어 만년 빈곤에서 벗어났고 오늘날에는 세계 10~12위권의 강국으로 탈바꿈했다.

    미국 뉴욕공대 교수이던 정근모 박사는 1970년 3월 일시 귀국했다. 과학기술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하려면 이공계 특수대학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쓴 인연으로 한국 정부가 초청했기 때문이다. 그 논문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보완자료를 마련했다. 이 자료는 4월8일 열린 경제동향보고회에서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브리핑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자 정 박사는 박 대통령 옆에 앉도록 자리를 배정받았다. 국수를 먹으며 KAIST 설립 방안이 논의됐다. 문교부 대신에 과학기술처가 주관 부처로 결정됐다.

    이휘소 박사, ‘10월 유신’ 반대

    정 박사는 KAIST 설립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해외의 한국인 두뇌를 애국심에 호소해 끌어들이는 게 주업무였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소설의 주인공인 이휘소 박사도 정 박사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동참 의사를 나타냈다. 이 박사가 귀국 절차를 밟던 1972년 10월에 박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노린 ‘10월 유신’이 단행됐다. 이 박사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며 귀국을 포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박사는 교통사고로 불귀(不歸)의 객(客)이 됐으니 사람의 운명은 짐작기 어려운 모양이다.

    KAIST는 1973년 9월17일에 강의를 시작했다. 정근모 박사는 “한국과학원의 설립은 참으로 우리나라의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가치이고 진행형 진보”라면서 “아래에서부터 올라온 의견과 최고통수권자의 의지가 정확하게 일치해 이루어진 축복”이라 평가했다.

    서정만 초대 대덕단지관리소장은 대덕연구단지와 박정희의 리더십과 관련, “박 대통령은 집권 기간 내내 민족과 국가의 선진화를 지향하는 한결같은 의지와 집념으로 과학기술 진흥을 앞장서 이끌었고, 그러한 진정성과 순수성이 곧 과학자와 기술자에 대한 사랑과 배려로 이어진 점은 여느 대통령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었다면서 “그만이 갖고 있는 ‘과학대통령’이란 호칭은 우연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KIST 출신의 과학기술인들은 박정희과학기술기념관을 KIST 내 부지에 100억원을 들여 건립하기로 했다. 이들은 과학대통령 박정희를 21세기의 모델로 내세워 한국을 굳건한 선진국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다졌다.

    박원훈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총괄부원장은 “기념관 건립 사업은 단지 박 대통령에 대한 향수 때문에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이공계를 기피하는 현 세태에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에 대한 한 국가지도자의 정확한 인식이 국가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제대로 알기 위한 살아 있는 교육 현장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과학대통령 박정희와 리더십’은 무거운 주제와는 달리 여러 에피소드를 많이 담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