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신·이성래씨(오른쪽) 부부.
초은당 사랑채에서 하루를 묵는 호사를 누렸다. 초은당 사랑채는 다섯 평이 안 되는 아주 자그만 집이다. 집이라기엔 너무 작은 별채지만 이토록 호사스러운 공간을 나는 이전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 방바닥은 쪽물 들인 한산모시를 발랐고 그 위에 세 번 ‘콩댐’을 하고 다시 ‘들깻댐’을 했다는데 빛깔은 깊은 바닷속처럼 검푸르다. 손으로 만지면 모시올의 질감은 느껴지되 까칠한 게 아니라 들깨기름이 먹어 매끄럽고 온화하다. 전기 조명은 아예 없앴고, 대신 촛불을 켠다. 사기호롱을 넣은 옛날 나무초롱도 한 귀퉁이에 걸렸다.
세 평 정도의 방과 한 평이 채 안 되는 마루와 곁에 달아낸 자그만 화장실과 툇마루로 구성된 집은 이집 주인 이성래(42)씨가 손수 지었다. 남의 힘 들이지 않고 제 손으로 제 집을 짓는 인간은 굳세고 진지하다. 나는 제 손으로 집을 지은 이를 여럿 만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악수하는 손이 억세고 눈빛이 침착했다. 서투른 일반화일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눈앞에 당면한, 매우 구체적이지만 철학적인 명제다. 크기와 형태와 재료와 쓰임과 비용을 두루 고민해야 하고 그러자면 제 삶을 찬찬히 둘러볼 수밖에 없다. 화두를 들고 면벽하는 것만큼의 집중과 천하를 주유하는 것만큼의 너른 눈을 필요로 한다.
손수 다섯 채 집 짓다
산업화 이후 사람들은 대개 제 물건을 스스로 만들지 않는다. 전문가에게 맡기고 비용을 지불한다. 제가 쓰는 그릇, 제가 사용하는 연장, 제가 입는 옷, 제가 덮는 이불을 만들기도 쉽지가 않은데 하물며 집이랴. 이토록 모든 것이 분업화된 시대에, 정성스러운 준비와 노동과 지식이 필요한 집짓는 일에 비전문가가 뛰어들기는 버겁고도 비효율적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해내겠다는 생의를 낸 사람들은 여간 아닌 뚝심과 배포를 가진 이들일 것이다. 아무튼 초은당 주인 이성래씨는 2004년 보성 산골짝의 차밭 끝자락으로 들어온 이후 해마다 한 채씩 총 다섯 채의 집을 지었다.
“짐승도 새도 제 새끼 낳을 굴을 제 힘으로 짓지 않습니까. 인간만이 집을 못 지을 리가 없지요.”(이씨)
옳은 소리다. 하긴 도시인이라고 제 집을 짓지 않는 건 아니다. 집지을 돈을 버느라 뼈가 휠 뿐! 그러나 이성래씨의 집짓기는 노동이되 창조였다. 그래서 즐거웠고 벅찼다고 한다. 살림집 20평, 작업실 17평, 사랑채 5평, 쪽 발효실 겸 창고 하나, 정자 하나. 집 주변을 돌아가는 4개의 아름다운 굴뚝과 돌담을 혼자 힘으로 짓고 쌓았다.
“혼자라니 어불성설입니다. 혼자 한 게 아니지요. 처음엔 임신한 아내가 도와줬고 나중엔 걸음마를 시작한 딸이 도왔어요. 여기저기 얻어들은 말들과 이제껏 살면서 봐왔던 모든 아름다운 물건과 읽었던 책들과 지금껏 만났던 여러 스승이 함께 저를 도운 것입니다. 그 힘을 모아 지은 것이지 어찌 혼자 힘으로 집을 지을 수 있겠어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집지을 재료는 거의 우리 동네 사람과 친척들이 거저 준 거예요. 이 집 짓는 데 총 여덟 채의 집이 들어갔어요. 쓰고 남은 천을 모아 쪽 보자기를 만들 듯 헌 집에서 나온 재료들을 모아 ‘재활용’한 집이에요. 그러니 지금은 여기 없는 고향사람들이 모두 함께 초은당을 지은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