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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수의‘그 영화’ ⑤

숏컷으로 만든 멜로 “관객들을 쉼 없이 몰아쳐라”

은행나무 침대

숏컷으로 만든 멜로 “관객들을 쉼 없이 몰아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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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기술력이 총동원된 ‘은행나무 침대’의 성공은 감독과 스태프들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있어 가능했다. 하지만 당시의 기술력은 스태프들의 열정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특히 아날로그 편집 시스템은 강제규 감독의 작품 성향을 충족시키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감독은 짧은 숏 컷의 조합을 액션 장면 만드는 것으로 한정하지 않고, 일반적인 멜로 상황으로 확장하고자 했다. 숏 컷의 조합이 멜로 정서를 단절시키지 않고 오히려 상승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감독의 이러한 주장은 ‘은행나무 침대’에 고스란히 적용됐고 사용된 숏컷의 수는 기존의 한국 영화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아졌다. 아날로그 방식이던 당시의 편집 시스템은 많은 수의 숏컷을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다. 편집기사는 촬영된 필름에서 ‘OK 컷’을 선택한 후 잘라낸다. 이렇게 선택된 ‘OK 컷’들은 이야기 순서대로 붙여진다. 이후 감독은 편집기사와 구체적인 편집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영화의 첫 컷부터 디테일하게 다듬기 시작한다.

돋보기로 찾아야 하는 작은 컷

편집에는 편집점이라는 것이 있는데 다음 컷과 붙일 가장 적절한 프레임(frame)을 찾는 것이다. 그 편집점이 바로 잘라질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편집점’을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반복해서 볼 때마다 편집점이 달라진다. 편집점이 달라지면 편집기사는 이미 커팅되어 다음 컷에 붙여진 컷을 다시 떼어내고 잘려나간 수백, 또는 수십, 경우에 따라서는 몇 개의 프레임 조각을 찾아 이어 붙인다.

기존 영화는 몇 백 개의 컷으로 이어지지만, 숏컷(짧은 컷)을 많이 사용하는 강제규 감독의 경우 워낙 반복적으로 수정하다보니 편집용 필름은 어느새 ‘걸레’가 된다. 당시 연출부였던 나는 편집실 골방에 앉아 감독이 원하는 필름 프레임 조각을 찾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붙였다, 떼었다를 반복하고, 길게 했다 짧게 했다를 반복하면서 컷은 엄청난 양의 조각 필름을 양산해냈다. 나는 그것들을 찾기 쉽게 분류해 감독이 원할 때 재빨리 해당 컷을 찾아줬다. 심지어 돋보기로 손톱 크기만한 프레임 조각을 찾아야 할 때도 있었다.



감독은 호주로 녹음 작업을 떠나며 나에게 극장용 예고편 편집을 맡겼다. 단, 숏컷을 많이 사용해 관객을 숨 쉴 틈 없이 몰아붙이라고 했다. 나는 또다시 편집실에 틀어박혔다. 자르고 붙이고 떼어내기를 반복, 기존 한국 영화 예고편의 두세 배에 달하는 컷 수로 예고편이 완성됐다.

제작사 대표는 예고편을 보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일반 관객들이 보기에 너무 빠르다는 우려였다. 하지만 나는 ‘감독의 지시’라고 우겼다. 그게 통용되는 시대였다. 남산의 한양녹음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필름을 영사기에 걸었다. 숏컷으로 걸레가 된 필름 상태는 영사기를 놀라게 했고 기계는 섰다 가다를 반복했다. 우여곡절 끝에 예고편 녹음이 끝났다. 며칠 후 호주에서 돌아온 감독은 이미 극장에 걸린 예고편을 봤다.

멀티플렉스가 없던 1996년 2월 어느 날, 영화 ‘은행나무 침대’는 서울 명보극장에서 개봉됐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기 위해 줄을 섰다. 통합전산망이 없던 시대라 감독과 우리는 매표소가 내려다보이는 커피숍에 앉아 길게 이어진 줄을 눈대중으로 확인했다.

숏컷으로 만든 멜로 “관객들을 쉼 없이 몰아쳐라”
田允秀

1971년 서울생

중앙대 영화학과 졸, 동 대학 첨단영상대학원 영상예술학과 석사

2001년 영화 ‘베사메무쵸’ 각본·감독으로 데뷔

영화 ‘파랑주의보’(2005), ‘식객’(2007),‘미인도’(2008) 각본·감독


15년이 지났다. 필름이 사라진 자리에 디지털 카메라가 들어왔고, 편집실에 군림했던 덩치 큰 아날로그 편집 장비는 날씬한 컴퓨터에 자리를 내줬다. 손으로 필름을 만지는 수고 없이 마우스 조작만으로 다양한 편집적 시도를 할 수 있고, 극장에 나가지 않아도 예매율과 평점으로 관객 반응을 확인할 수 있다.

제작 환경이 변하며 영화의 흐름은 빨라졌고 관객은 빠른 영화에 빠르게 익숙해졌다. 하지만 모든 게 변해도 변하지 않는 한 가지. 그것은 극장 속 어둠을 지배하는 관객의 눈빛이다. 기술은 발전하고 정서는 풍부해져야 한다. 하지만 가끔은 15년 전 편집실의 필름 냄새가 그립다.

신동아 201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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