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문제연구소가 4·9통일평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만든 역사다큐 ‘백년전쟁.’
‘백년전쟁’은 1980년대 대학가 운동권 조직인 ‘언더(under)’들이 대한민국이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를 놓고 벌인 ‘사구체론(사회구성체 논쟁)’을 연상시킨다. 우리나라 운동권은 마르크스-레닌의 순수 공산주의를 따르자는 세력과 북한식 공산주의인 주체사상(주사)을 따르자는 세력으로 양분된다. 순수 공산주의를 하자는 세력은 ‘민중민주주의(PD)’를 강조하고, 주체사상을 따르자는 일파는 남조선 해방을 뜻하는 ‘민족해방(NL)’을 앞세운다.
민중민주주의파는 ‘민민투’로 약칭되는 ‘반제(反帝)반파쇼 민족민주화투쟁위원회’를 만들었다. 주체사상 신봉파는 ‘자민투’로 약칭되는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를 구성했다. 민민투는 정치적으로 한국은 전통적인 식민지가 아닌 새로운 식민지 단계에 와 있고, 경제적으로는 국가가 독점재벌을 만들어 끌고 나가는 자본주의라며 ‘신(新)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약칭 신식국독자론)을 내놓았다. 자민투는 한국은 여전히 해방시켜야 하는 식민지이고, 반쯤 자본주의화했다며 ‘식민지반(半)자본주의론’(약칭 식반자론)을 제시했다.
인혁당 재건위와 4·9재단
양측이 자기 판단을 관철하기 위해 사상투쟁을 벌인 것이 바로 사구체 논쟁이었다. 이 논쟁에서 보다 폭넓은 지지를 끌어낸 것은 ‘식반자론’을 내세운 주사파(NL)였다. 1980년대 말부터 NL계열이 대부분 대학에서 총학생회를 장악했기에 한국 대학의 운동권은 주사파 일색이 됐다. 그러나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고 1997년 주체사상을 만든 황장엽이 망명해 김일성 식 주체사상의 허구를 증언함으로써 주사파는 몰락했고, 덩달아 대학 운동권 세력도 힘을 잃었다.
민문연은 1948년 친일파 척결을 위해 국회가 만든 반민특위의 정신을 계승해 친일파 연구를 하다 1989년 타계한 임종국 씨의 유지를 잇자며 1991년에 만든 ‘반(反)민족문제연구소’에서 유래한다. 이 연구소는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내놓아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현재 소장(3대)은 문학평론가로 불리는 임헌영 씨인데, 그는 1979년의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된 적이 있다. 임준열이 본명인 그는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박헌영과 같은 ‘헌영’을 필명으로 사용하다가 필명이 더 알려진 경우다.
4·9통일평화재단은 1974년 인혁당 재건위(2차 인혁당)사건과 맥이 닿는다. 1964년 중앙정보부에 검거돼 유죄선고를 받은 인혁당 관계자들이 출소 후 ‘경락(經絡)연구회’란 이름으로 인혁당을 재건했으며, 1974년 중앙정보부가 검거한 서울대생 중심의 운동권 조직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했다는 것이 이 사건의 골자다. 경락연구회가 과연 인혁당 재건위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다. 또 재판 과정에서 이들이 고문을 당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법원은 인혁당을 재건한 조직이 실재한 것에 주목해 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검찰은 대법원이 사형 확정판결을 한 18시간 뒤인 다음 날 바로 형을 집행해 ‘사법살인을 했다’는 비판을 들었다. 이 사건에 대한 판단이 바뀐 것은 ‘과거사법’을 만들어 과거 공안사건을 재조사한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다. 2005년 이 법을 근거로 만들어진 국가정보원 과거사위는 이 사건 수사 과정에서 고문과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발표했다.
유족들의 청구로 열린 재심(2007년)에서 법원은 고문이 있었다는 것 등을 인정하고, 과거 재판에서 검찰이 제시한 자료는 증거 능력이 없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유가족들은 정부로부터 개인별로 보상금을 받았다. 보상금의 총액은 수백억 원으로 알려져 있다. 유가족이 이 보상금의 일부를 기금으로 8명이 처형된 4월 9일을 기려 만든 것이 4·9통일평화재단이다. 민문연은 이 재단의 제작지원을 받아 ‘새로운 스타일의 역사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고 유튜브에서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