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호

‘돌아온 탕아’ 월가 황제 등극하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CEO

  • 하정민│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dew@donga.com

    입력2013-02-20 15:4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야기한 세계 금융위기의 여진이 가시기도 전에 유럽 재정위기가 닥쳐오면서 세계경제의 앞날이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시계 제로’의 상태로 빠져들었다. 인류가 역사상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빠른 인구구조 변화, 국경 없는 초경쟁의 강도도 날로 세지고 있다. 혼돈에 빠진 2013년 세계경제를 이끄는 인물은 누구인가. 그들을 탐구하는 새 연재를 시작한다. 첫 주인공은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CEO다.
    ‘돌아온 탕아’ 월가 황제 등극하다
    “제이미 다이먼의 아침밥은 은행이다.”

    미국 일간지 ‘뉴욕데일리뉴스’가 내놓은 제이미 다이먼(Jamie Dimon·57) JP모건체이스(이하 JP모건) CEO 겸 이사회 의장에 대한 평가다. 2000년 부실로 휘청대던 시카고의 작은 은행 뱅크원에서 처음으로 은행 최고경영자가 된 그는 뱅크원과 JP모건의 합병을 진두지휘하고 베어스턴스, 워싱턴뮤추얼 등을 추가 합병하며 JP모건을 미국 최고 은행으로 만들었다. 인수합병(M·A)을 기반으로 덩치 불리기를 통해 월가의 ‘은행 포식자(Bank Eater)’로 불리며 약 10년 만에 월가 금융황제가 됐다.

    다이먼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리먼브러더스, 베어스턴스, 메릴린치 등 월가의 대형 금융회사가 잇따라 무너질 때도 적자 없이 위기를 극복하며 능력을 발휘했다. 또 대통령, 재무장관,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 의장, 정치인 등 월가를 압박하는 사람들에게 쓴소리를 서슴지 않으며 ‘월가의 대변자’ 입지를 탄탄히 굳혔다. 로이터통신은 다이먼이 1907년 금융위기 당시 ‘월가의 구원투수’로 불렸던 JP모건의 창립자 존 피어몬트 모건이 살아 돌아온 인물이나 다름없다고 치켜세웠다.

    2012년 ‘런던 고래’ 사건으로 불리는 62억 달러 규모의 대형 파생상품 손실사태로 연봉이 절반으로 깎이고 ‘무결점 경영자’의 이미지에 적잖이 흠집이 났지만 다이먼에 대한 월가의 신뢰는 여전하다. 다이먼의 인생 역정 자체가 ‘성공→ 추락→ 부활’이라는 전형적인 롤러코스터 형태를 띠고 있는데다 그를 대신할 만한 인물도 현재로선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듯 2013년 초 오바마 2기 정권 출범 직전 세계적인 부호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은 “다이먼이야말로 월가를 대변할 수 있는 인물이자 차기 재무장관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 후 오바마 대통령은 백악관 비서실장 출신의 제이컵 루를 재무장관으로 지명했지만 워런 버핏의 말은 다이먼이 얼마나 광범위한 지지와 신뢰를 받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이먼은 1956년 1월 뉴욕의 그리스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시어슨이라는 중소 금융회사에서 주식 중개인으로 일했다. 일반적인 그리스 이민자 후손보다는 형편이 넉넉한 편이었지만 미국 주류 사회에 완전히 편입됐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다이먼은 미국 보스턴에 소재한 터프츠대에 진학해 심리학과 경제학을 전공했고 1980년 하버드대 경영학석사(MBA) 과정에 입학한다. 그의 하버드대 동기들의 면면은 쟁쟁하다. 제프리 이멜트 제너럴일렉트릭(GE) 최고경영자, 미디어 대기업 NBC 유니버설의 스티브 버크 CEO, 투자회사 바우포스트의 세스 칼먼 CEO 등이 그의 동기다.

    비주류 그리스 이민자 후손

    ‘돌아온 탕아’ 월가 황제 등극하다

    2009년 1월 29일 세계경제포럼에 참여한 제이미 다이먼 JP 모건체이스 CEO.

    터프츠대 재학 당시 다이먼은 여름방학 동안 시어슨의 인턴으로 일했다. 그때 시어슨의 경영 현황과 M·A 사례를 분석한 보고서를 쓴 적이 있다. 다이먼의 아버지는 이 보고서를 자신의 상사이자 시어슨의 CEO였던 샌포드 웨일에게 보여줬다. 시어슨의 CEO 자리에 결코 만족하지 못했던 야심가 웨일은 신출내기 대학생이 쓴 보고서를 보고 깜짝 놀랐고 다이먼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1982년 하버드대 MBA 졸업장을 거머쥔 다이먼은 월가에서 직장을 알아보고 조언을 청하러 당시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사장이던 웨일을 찾았다. 다이먼은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등 월가의 쟁쟁한 금융회사로부터 채용 제의를 받았지만 다 포기했다. 웨일이 그 자리에서 바로 다이먼을 개인비서로 채용했기 때문이다. 이후 1998년까지 16년간 피로 맺어진 부자관계보다 더 끈끈한 사회적 부자관계를 유지했던 웨일과 다이먼의 성공신화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인수→구조조정→매각·합병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씨티그룹 CEO를 지낸 샌포드 웨일은 1990년대 월가의 금융황제로 현대 미국의 금융역사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1933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폴란드 유대인 출신 이민자 후손으로 태어난 웨일은 코넬대를 졸업한 후 1960년 시어슨을 차렸다. 지금이야 제이컵 루, 티모시 가이트너, 헨리 폴슨 등 유대인 출신 미국 재무장관이 3명 연속 배출되고 월가 주요 금융회사 CEO의 상당수가 유대계지만 당시만 해도 유대인은 월가의 소수자였다.

    저돌적이고 불같은 성격의 웨일은 20년 만에 시어슨을 월가의 알짜 회사로 키웠다. 1981년 대형 카드회사 아메리칸익스프레스(아멕스)에 9억3000만 달러를 받고 시어슨을 매각한 후 자신이 합병회사 사장이 됐다. 웨일은 아멕스의 사장으로 월가 황제가 될 채비를 차근차근 하고 있었고, 다이먼은 그의 M·A 기술을 어깨너머로 배우면서 제2의 웨일을 꿈꿨다. 하지만 1985년 웨일은 아멕스 내부 파워게임에서 패해 회사를 나왔다. 다이먼도 사회적 아버지를 따라 미련 없이 아멕스를 떠났다. 웨일이 아멕스에서 나올 때 그를 따라 나온 사람은 다이먼이 유일했다.

    웨일은 퇴사 1년 만인 1986년 소형 대부회사 커머셜크레디트를 인수한다. 아멕스에 비해서는 볼품없는 회사였지만 웨일과 다이먼은 무자비한 구조조정으로 커머셜크레디트를 완전히 다른 회사로 바꿔놨다. 이후 웨일과 다이먼은 걸프인슈어런스, 프라이메리카, 살로먼브러더스, 드렉셀번햄램버트, 트래블러스, 아테나 라이프·캐주얼티 등 중소형 보험회사, 채권회사, 증권회사를 줄줄이 인수했다. ‘남이 눈여겨보지 않는 조그만 회사를 사들여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한 후 비싼 값에 되팔거나 더 큰 회사와 합병해서 자신이 합병회사의 CEO가 된다’는 웨일의 고유한 성공방식도 정립됐다.

    당시 월가의 주류였던 기업금융이 아니라 소매금융 전문회사를 사냥감으로 삼는 웨일의 방식은 훗날 다이먼과 JP모건이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무난히 헤쳐나갈 수 있도록 하는 데 큰 힘이 됐다. 기업공개(IPO), 증권 발행, 인수합병 등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금융은 성공하면 소매금융보다 훨씬 큰돈을 벌 수 있지만 그만큼 위험도 크다. 소매금융은 ‘폼 나는’ 사업은 아니지만 안정적인 운용이 가능했다. 웨일과 다이먼에게 금융이란 ‘소매금융과 구조조정’의 동의어나 다름없었다.

    ‘돌아온 탕아’ 월가 황제 등극하다
    ‘사회적 아버지’에게 버림받다

    1998년 4월 샌포드 웨일은 꿈에 그리던 월가 금융황제가 될 기회를 잡는다. 당시 보험, 증권, 자산운용사 등으로 구성된 트래블러스의 CEO였던 웨일은 미국 최대의 지점망을 자랑하는 씨티코프의 존 리드와 손잡고 합병회사를 출범시켰다. 세계 100여 개 국가에 27만 명 직원, 2억 명의 고객을 둔 초대형 금융종합회사 씨티코프의 탄생은 그 자체로 미국 경제와 월가의 위용을 상징했다.

    트래블러스와 씨티코프는 합병회사의 이름을 씨티그룹으로 정했고 웨일과 리드는 공동 CEO가 됐다. 각각 보험과 은행을 기반으로 한 두 회사의 짝짓기는 ‘가장 이상적인 결합’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월가에 엄청난 회오리를 몰고 왔다. 실제 씨티코프를 찾는 고객에게 트래블러스의 보험 및 자산운용 상품을 팔고, 트래블러스의 보험 고객에게 씨티코프의 은행 및 카드 상품을 판매하는 일은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냈다.

    씨티그룹은 1998년 출범 후 2008년 금융위기 전까지 약 10년간 독보적인 세계 1위 금융회사의 지위를 유지했다. 그 주춧돌을 놓은 사람이 웨일과 다이먼이라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다이먼은 앞으로 ‘원 톱’이 되어 씨티그룹과 월가를 호령할 웨일을 잘 보좌하기만 하면 언젠가 그 자리가 자신에게 돌아오리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그의 꿈은 7개월 만에 무참하게 깨졌다. 사회적 아버지였던 웨일이 그를 차갑게 내쳤기 때문이다. 어이없게도 이는 사회적 자식인 다이먼과 웨일의 친자식 간 균열에서 비롯됐다.

    웨일에게는 결혼해서 비블리오위츠라는 성을 쓰는 제시카라는 딸이 있었다. 젊은 시절 비서와 눈이 맞아 가족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있는 웨일은 자식을 끔찍이 아꼈고 배신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했다. 그가 다이먼을 높이 산 이유도 아멕스에서 쫓겨날 때 자신을 배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합병 당시 제시카는 씨티그룹 소속의 살로먼스미스바니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룹 경영자인 만큼 그녀는 합병 직후 인사에서 당연히 승진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불과 42세의 나이로 살로먼의 CEO을 맡고 있던 다이먼은 제시카를 승진 대상에서 제외했다. 다이먼은 아무리 실적이 좋다 해도 웨일의 딸을 바로 승진시키면 옛 씨티코프 세력들의 반발을 사 순조로운 합병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웨일은 불같이 화를 냈고 제시카는 회사를 떠났다.

    ‘돌아온 탕아’ 월가 황제 등극하다
    얼마 뒤 또 다른 사건이 불거졌다. 다이먼과 함께 살로먼스미스바니의 CEO를 맡고 있던 데릭 모건은 씨티의 또 다른 경영자인 존 리드 회장으로부터 잠재적 후계자로 지목받고 있었다. 웨일의 후계자 다이먼은 리드의 후계자 모건과도 충돌했다. 다이먼의 친구였던 살로먼의 스티브 블랙은 중역회의 파티에서 데릭 모건의 아내에게 춤을 청했다. 모건은 이를 거절했고 블랙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두 사람의 언쟁을 지켜보던 다이먼은 블랙의 편을 들다가 모건의 멱살을 잡았다. 이후 존 리드도 다이먼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이 와중에 다이먼이 이끌던 살로먼스미스바니가 4억 달러에 가까운 엄청난 적자를 기록했다. 친딸 제시카 문제로 다이먼에게 앙금이 생긴 웨일은 존 리드가 다이먼을 집중 공격해도 방어해주지 않았다. 리드는 다이먼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고 1998년 11월 마침내 다이먼은 스스로 사임을 발표했다.

    자신의 아들이나 다름없는 다이먼이 쫓겨났지만 웨일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이먼이 씨티그룹의 우수 인재를 데려갈까 두려워 3년간 그들을 스카우트하지 않겠다는 서약서까지 요구했다. 웨일은 리드를 쫓아내고 단독 CEO가 되겠다는 생각에만 골몰했다. 그 무렵 웨일이 했다는 말이 걸작이다. “내가 아멕스에서 쫓겨날 때 다 받을 수 없을 만큼 일자리 제의 전화가 많이 왔어. 제이미는 나보다 전화를 더 받을 거야. 걱정 안 해도 돼.”

    시카고에서 칼을 갈다

    버림받은 다이먼은 1년 반 동안 실업자 신세로 지냈다. 2000년 3월, 장고 끝에 그가 택한 곳은 미국 중서부의 핵심도시 시카고였다. 뉴욕에서도 일자리 제의를 받았지만 그는 한 번도 생활해본 적 없는 ‘바람의 도시’ 시카고를 택해 당시 미국 5위 은행 뱅크원의 CEO가 됐다. 세계 양대 선물거래소가 자리 잡고 있긴 해도 금융업계에서 시카고는 그야말로 촌구석이었다. 게다가 다이먼은 타고난 뉴요커였지만 찬밥, 더운밥 따질 때가 아니었다.

    다이먼은 이를 악물었다. 월가를 떠나본 적 없는 그는 시카고에 도착하자마자 ‘징징대지 말 것(No Whining)’이라는 표어를 자신의 사무실에 대문짝만하게 써 붙였다. 권투도 배웠다. 코치의 강펀치를 맞을 때마다 월가의 화려한 코너 오피스(고층빌딩의 한쪽 면을 다 차지해 사방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앉아 자신을 헌신짝처럼 버린 사회적 아버지를 생각하며 와신상담했다. 웨일은 다이먼을 쫓아낸 후 2000년 존 리드마저 제거하고 씨티그룹의 단독 CEO가 되어 무지막지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다이먼은 뱅크원 임원들에 대한 신문구독 및 휴대전화 비용 지원부터 끊었다. 부실채권을 정리하고 대규모 감원을 포함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스승 웨일로부터 배운 대로였다. 다이먼은 “나무 몇 그루를 솎아내려고 여기 온 게 아니다. 대형 톱을 써서 숲을 아예 밀어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적자에 시달리던 뱅크원은 4년간 7000명을 감원하는 냉혹한 구조조정 끝에 흑자로 돌아섰다. 하지만 뱅크원의 덩치로는 도저히 씨티그룹과 같은 반열에 들 수 없었다. 결국 스승에게서 배운 M·A 공식을 꺼내 들었다.

    당시 미국 은행 랭킹 1위는 씨티은행이었고 JP모건과 뱅크오브아메리카(BOA)가 2위를 다퉜다. JP모건과 BOA 모두 합병을 통해 씨티와 맞서기를 원했지만 적당한 합병 상대를 물색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던 중 BOA가 보스턴의 플리트보스턴을 인수하기로 했다. 허를 찔린 JP모건은 반격에 나섰고 월가로 돌아갈 기회만 노리던 다이먼과 의기투합했다. JP모건에게 먼저 합병 의사를 전한 다이먼의 조건은 단 하나였다. “다른 회사보다 낮은 가격에 뱅크원을 넘겨주겠다. 하지만 합병은행의 유일한 CEO는 나다.”

    1년간의 지루한 인수협상 논의 끝에 2004년 7월 JP모건과 뱅크원이 합병했다. 합병은행은 씨티그룹에 이어 미국 2위 은행이 됐다. 다이먼은 시카고행 4년 만에 월가로 복귀했다. 배신과 반전을 밥 먹듯 하는 월가는 그 사이에 많이 변해 있었다. 웨일도 제자리에 없었다. 웨일은 2003년 10월 씨티그룹 CEO 자리를 내놨다. 2002년 주식시장 폭락 여파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데다 임직원들의 비리가 연이어 터지면서 주주와 이사회가 그의 사퇴를 종용했기 때문이다. 2006년까지 이사회 의장직을 유지하고 자신의 심복 찰스 프린스를 후임 CEO로 내세우긴 했지만 월가 황제의 위용은 퇴색했다.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없는 월가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존 피어몬트 모건의 재림’

    웨일은 합병이 발표된 날 다이먼에게 전화를 걸어 “너는 이제 내 라이벌이다”라고 했다. 월가는 다이먼을 ‘돌아온 탕아(the Prodigal Son)’라고 불렀다. 당시 48세였던 다이먼은 2년 후인 2006년 합병은행 CEO인 윌리엄 해리슨의 은퇴와 함께 CEO 자리를 물려받기로 했다.

    다이먼은 스승에게서 배운 성공 공식을 착실히 답습했다. 합병, 비용절감, 또 합병, 또 비용절감…. 이런 안정적 경영을 최우선으로 JP모건의 내실을 다져나갔다. 그러던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터졌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비율이 높았던 리먼브러더스, 메릴린치 등이 줄줄이 나가떨어졌다. 금융위기 이전에 리처드 풀드 전 리먼브러더스 CEO, 존 테인 전 메릴린치 CEO 등은 다이먼 못지않은 월가의 스타 경영자였고 연봉도 다이먼보다 훨씬 많았다.

    그러나 금융위기는 월가를 주름잡던 거대 금융인들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풀드와 테인 등이 퇴락한 데 비해 다이먼은 금융위기로 헐값이 된 베어스턴스, 워싱턴뮤추얼을 잇따라 인수하며 덩치를 불렸다. 그는 베어스턴스와 워싱턴뮤추얼을 인수하자마자 특유의 대대적 구조조정으로 군살을 도려냈다. 다이먼은 ‘금융위기가 낳은 승자’ ‘위기관리의 귀재’ ‘존 피어몬트 모건의 재림’이라는 칭송을 얻었다.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9년 7월 JP모건의 이사회에는 워싱턴에서 온 외부 인사가 처음으로 참석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복심(腹心)이자 측근 중의 측근인 램 이매뉴얼 당시 백악관 비서실장이었다. 다이먼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적도 승승장구였다. JP모건은 2011년 190억 달러(약 21조 원)에 달하는 사상 최대 순이익을 냈다. 자산 규모에서도 씨티그룹 추락 후 미국 1위 은행이던 BOA를 밀어내고 최대 은행이 됐다. 덩치와 실속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다이먼은 2011년 2300만 달러의 연봉을 받아 월가 최고 연봉 경영자가 됐다.

    다이먼은 월가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려는 오바마 행정부에 대해 분명한 반대 의사를 밝혀 월가를 대표하는 금융황제 이미지를 굳혔다. 다이먼은 골수 민주당 지지자였지만 오바마 1기 정권이 도입한 ‘볼커 룰(금융회사가 자기자본을 이용해 주식, 채권, 파생상품 등에 투자하는 거래를 제한하는 법안)’에 대해 “지나친 규제”라고 항변하며 백악관과 대립각을 세웠다.

    승승장구하던 다이먼에게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바로 ‘런던 고래’ 사건이다. JP모건 런던지점에서 파생상품을 거래하며 ‘런던 고래’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트레이더 브루노 익실은 2012년 7월 채권 파생상품 투자 실패로 62억 달러(약 7조 원)의 천문학적 손실을 냈다. 파생상품으로 인한 금융위기 때 누구보다 안정적인 경영으로 정상에 오른 JP모건이었기에 다이먼 CEO가 회사를 어떻게 운용하고 있느냐는 이사회와 주주의 비판이 쏟아졌다.

    두 번째 와신상담

    외부의 압박도 심했다. 다이먼이 금융 규제에 대해 사사건건 반기를 드는 것이 내심 고까웠던 백악관, 금융당국, 의회 등은 “규제가 느슨했기 때문에 이런 사건이 터진 것”이라며 그를 몰아세웠다. 엘리자베스 워런 매사추세츠 주 상원의원 후보(민주당)는 “다이먼이 뉴욕 연방준비은행 이사로 재직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그의 뉴욕 연준 이사직 사퇴를 촉구했다.

    그 무렵 다이먼이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었던 제스 스테일리 JP모건 투자은행부문 최고경영자가 헤지펀드로 이직했다. 더욱이 ‘런던 고래’와 정반대 포지션의 파생상품을 거래해 1억 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리고 JP모건에 큰 손실을 안긴 블루마운틴이 스테일리가 옮겨간 헤지펀드로 밝혀지면서 다이먼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다이먼은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경영자답게 실적으로 난관을 돌파했다. JP모건은 2012년 한 해 동안 213억 달러의 순이익을 올려 사상 최고 기록을 다시 경신했다. 투자손실에 대한 책임은 이나 드루 JP모건 최고투자책임자(CIO)의 사퇴로 마무리됐고, 다이먼은 CEO와 이사회 의장직을 지켰다. 대신 연봉을 절반으로 깎았다. ‘런던 고래’ 사건은 앞으로도 다이먼을 괴롭힐 듯하다. 감독당국이 JP모건의 파생상품 감독관리 시스템 강화를 요구하며 규제 강도를 높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다이먼이 호락호락 굴복할 사람은 아니지만.

    스승의 차디찬 내침, 전대미문의 세계 금융위기에도 살아남은 다이먼 스토리는 천문학적인 정부 부채와 중국의 부상(浮上) 등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가 왜 세계 최고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지, 미래의 리더들이 어떻게 성공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비즈니스의 세계에는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다. 지금 실패했고 뒤처졌다고 해서 재기할 기회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비용절감과 위험관리에 주력해야 한다는 점이 그가 2013년 세계경제에 던지는 화두다.

    ※참고문헌 : ‘ 월가의 법칙’(정명수 저, 용오름, 2005년)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