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호

‘공화주의적 애국’에서 해답 찾아라

박근혜 정부의 국민통합 방법론

  • 강규형 |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 gkahng@chol.com

    입력2013-02-21 10: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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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은 놀라울 정도로 빨리 헝그리(hungry) 사회를 벗어났으나 너무 쉽게 앵그리(angry) 사회가 돼버렸다. 세대갈등, 지역갈등, 계층갈등, 가치관갈등을 해결하지 못해 폭발 일보 직전의 사회가 됐다. 이런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면 통일 시대를 대비할 수 없다. 대한민국은 우리가 잘 만들어온 사회라는 것을 인정하고, 대한민국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가치를 찾아야 한다.
    ‘공화주의적 애국’에서 해답 찾아라

    18대 대통령선거 전날인 지난해 12월 18일 박근혜 후보의 서울 광화문 유세.

    18대 대선을 거치면서 국민통합이 시대정신으로 떠올랐다. 한국 경제가 재도약하려면 사회자본(social capital)의 축적이 필요하다. 압축성장의 부산물인 사회갈등은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키고 바람직한 정책의 입안과 실행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통합을 위한 노력은 다른 나라들도 한다. 우리 역대 정부도 나름대로 노력했다. 광복 전후의 좌우익 대립, 전쟁의 폐허를 딛고 산업화를 이룰 때부터 골이 깊어진 계층 간 갈등, 지역감정, 남북통일 등 통합의 어젠다는 다각도로 제시됐고 해결 방안은 더 다양했다.

    국민 대통합과 대탕평을 키워드로 한 박근혜 대통령당선인의 통합정책은 설계부터 잘돼야 한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 100% 국민통합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회갈등을 어느 정도 해소해야만 국가가 기능을 할 수 있다. 국민통합 정책들이 잘못되면 새로운 갈등과 분열을 조장할 수 있다. 갈등과 분열을 줄이며 진정한 통합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3세대 동거 사회

    한국 사회의 심각한 갈등 양상으로는 세대갈등, 지역갈등, 계층갈등, 가치관갈등 등을 꼽을 수 있다. 다른 나라에서와 같은 인종갈등과 종교갈등은 아직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다문화가정의 증가로 인종갈등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미약하기에 이 글에서는 제외한다.



    한국은 세계사에 유례없는 압축성장을 했기에 후유증이 컸다. 1970년대 이후 우리 사회는 격변을 겪었다. 서구는 수백 년에 걸쳐 전통사회, 산업화사회, 탈산업화사회로 변화했다. 영국은 18세기 산업혁명을 겪으며 산업화사회로 들어갔다가 1970년대 말~1980년대에 탈산업화사회로 진입했다. 영국이 200년에 걸쳐 경험한 것을 우리는 20~30년 사이 한꺼번에 겪은 것이다.

    필자는 전통사회에 태어나 개발독재시대라고 하는 산업화사회에서 자랐다. 엄청난 경제발전을 하던 시기에 학교를 다녔다.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갔을 때는 탈산업화를 겪던 시기였다. 이렇다보니 한 집안에 다른 가치관을 갖고 다른 사회를 산 3개 세대(전통사회, 산업화사회, 탈산업화사회 세대)가 함께 살게 됐다. 이것이 오늘날 세대갈등의 큰 원인이다.

    1950년대 말~1960년대 초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80달러 정도였다. 이런 나라가 박정희 시대인 1970년대에 무서운 속도의 산업화로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인구의 90% 이상이 전통산업인 농업과 수산업에 종사하던 사회에서 절반이 넘는 인구가 공업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세계 최고의 도시화율을 기록한 나라가 됐다.

    굶어 죽지 않는 나라가 됐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성과다. 굶어 죽는 나라보다는 잘사는 나라에 사는 게 훨씬 낫지만, 무서운 속도의 사회변화에는 대가가 따른다. 비약적인 발전은 승자와 패자가 확연히 갈리는 사회를 만들었다. 사회계층이 한순간에 분화됐기에 상대적 박탈감이 만연해 분노가 축적됐다.

    격변적 성공의 대가는 사회적 긴장과 왜곡이었다. 너무 잘사는 사람들, 좀 잘 사는 사람들…이런 식의 계층이 생겨났다. 너와 내가 똑같았는데 어느새 큰 차이가 생기자 분노와 증오가 일어났다. 나도 저렇게 됐어야 하는데 못 됐다고 하는 상대적 박탈감이 한국 사회에 켜켜이 쌓이게 된 것이다.

    성장동력 ↓, 기대수준 ↑

    한국의 왜곡된 교육구조는 박탈감을 극한으로 이끈다. 과거엔 ‘대학 못 간 한(恨)’이 있었다. 이것을 풀어주기 위해, 그리고 대학은 ‘장사’가 됐기에, 무분별한 대학·대학원 신설과 정원 늘리기가 성행했다. 계층상승 욕구가 워낙 컸기에 논 팔고, 밭 팔고, 소 팔아 자식들을 교육시켰다. 이런 교육열이 사회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한국은 세계 최고의,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학 진학률을 자랑하는 나라가 됐다.

    대학에 가야 출세한다는 고정관념 속에서 기대 수준이 치솟았다. 그러나 급히 만들어진 대학의 교육은 부실했다. 대학 평가와 교수 평가를 강화한 덕분에 상위 대학들의 교육·연구 여건은 과거보다 좋아졌다. 그러나 하위에 처진 지방의 일부 사립대들은 정원도 못 채우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학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일반 대학원이건 특수대학원이건 명문대 대학원은 학벌 세탁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하지만 하위 대학원들은 정원 채우기에 급급하다. 석사와 박사가 남발됐다. 그 결과 한국 대학의 학위 가치가 하락했다.

    ‘대학 물’을 먹은 이들은 내실과는 상관없이 기대 수준이 높아져 산업현장을 기피했다.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키는 방법은 중단 없는 고도성장뿐이다. 그러나 성장동력은 꺼져갔다. 지속적인 고도 경제성장은 불가능했다. 기대 수준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일이 시급해졌다.

    기대 수준이 지나치게 높은 사회는 불안정하고 불행하다. 상당한 경제력을 갖춘 나라 한국의 국민이 행복도 조사에서 매우 낮게 나타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갤럽이 지난 5년여 동안 155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행복도 설문조사 결과를 보도했다. 한국은 56위로 경제위기를 겪는 그리스(50위)나 내전을 겪은 코소보(54위)보다 낮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백약이 무효다. 2004년 교과부는 “2009년까지 358개 대학 중 87곳을 없애겠다”고 발표했으나 제대로 실행하지 않았다. 시혜성 복지혜택을 늘리기는 쉬워도 감축하긴 어려운 것처럼, 대학·대학원 정원 늘리기는 쉬워도 줄이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래도 해야 한다. 이 시한폭탄의 뇌관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학부 정원은 지금보다 30% 이상, 석사과정은 40% 이상, 박사과정은 50% 이상 줄이는 게 적정하다.

    고도성장 시대에는 치솟는 기대 수준을 어느 정도 충족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고도성장이 끝난 오늘날에는 무한상승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여기서 오는 허탈감과 박탈감이 세대갈등과 계층갈등의 주원인이 된다.

    청년실업으로 인한 분노엔 기성세대가 책임져야 할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면에는 청년층의 기대 수준 폭발이 도사리고 있다. 세계 최고 부국(富國)의 하나인 독일의 대학 진학률은 39%다. 한국은 무려 80%가 넘는다. 그러니 어떤 정권과 체제도 이런 사회를 만족시킬 수 없다. 이제는 사회 전체가 저성장시대에 맞게 사고(思考)를 전환해야 한다.

    ‘헝그리 사회’ → ‘앵그리 사회’

    대책 없이 대학 진학률을 높여놓은 과거 교육정책의 처절한 실패는 기성세대가 책임져야 한다. 기성세대는 열심히 일하고 돈 벌기에 바빴기에 자녀교육을 소홀히 했다. 버릇없이 자란 아이들은 사회에 나와서도 버릇없이 행동한다. 격변의 사회가 가져온 후유증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정보통신기술(IT) 환경의 발달이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 과도한 인터넷 사용은 인지(認知)를 담당하고 충동을 절제하는 뇌의 전두엽 및 전(前)전두엽 기능을 약화시킨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 능력을 떨어뜨려 괴담과 선동에 취약하게 만든다. 오늘날의 인터넷 공간을 보라. 그곳은 언제나 분노와 증오로 넘쳐난다. 다른 나라에서도 유사한 경향을 보이지만 유독 한국이 심하다.

    정신의학자들에 따르면 분노는 어린 시절에 겪은 심리적 상처와 좌절에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자기 정체성에 문제가 생기면 분노가 분출하고 흑백논리적으로 사고하기 쉽다.

    한국 사회는 치열한 경쟁 사회다. 경쟁은 발전의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승자와 패자를 확연히 갈라놓는다는 문제가 있다. 많은 사람이 청춘을 바쳐 덤빈 공부에서 극소수만 ‘승자’가 될 수 있었다.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한국인의 생활여건은 크게 향상됐지만, 상대적 박탈감과 패배의식도 극심해졌다. 전상인 서울대 교수는 한국 사회가 ‘헝그리 사회’에서 유례없는 ‘앵그리(angry) 사회’로 변환됐다고 설명한다.

    한국 사회는 정신적, 시간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러다가 정보화 시대를 맞았다. 가상공간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공간이 창출되자, 그곳에 증오의 에너지를 분출시켰다.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해방공간’을 마음껏 누린 것이다.

    오프라인에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성숙한 행동을 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판치는 불신과 증오는 역대 정부가 국민을 호도한 업보이기도 하다. 여기에 다른 요소들이 가세하면서 한국은 정신적 무정부 상태를 맞게 됐다. 가상공간에서 배태된 이런 분위기가 실제 사회인 오프라인으로 전이(轉移)되는 것을 우리는 이미 경험했다. 사회통합 없이 한국 사회가 다음 단계로 도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 가상공간에는 대한민국 국민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온라인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대처해야 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천방지축으로 행동하는 일부 청년들은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한다. 저명한 IT 미래학자 니콜라스 카가 얘기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출현한 것 같다. 중우(衆愚)정치의 전형적 현상이다. 정치권은 이러한 청년들을 옳은 방향으로 인도하긴커녕 오히려 비위를 맞추는 데 급급하다.

    어느 나라에나 지역감정이 존재한다. 하지만 한국의 지역감정은 도를 넘은 형태로 분출되고 있다. 지역감정이 표면화한 것은 박정희 정권 때부터다. 1963년 5대 대선에서 박정희는 호남의 지지에 힘입어 15만 표 차이로 윤보선 후보를 힘겹게 따돌렸으면서도 이후 노골적인 영남 우대 정책을 펴나갔다. 집권세력 강화와 경제개발을 위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고 해도 지나쳤다.

    지역감정 해소에 총력을

    특히 군부 인사에서 영남 편중이 심했다. 1975년 장성 진급자 22명 중 영남 출신은 17명이었다. 호남 출신은 전남과 전북 출신을 한 해 걸러 한 명씩 진급시키는 구조였다. 박정희 정부는 강력한 군부를 통제하기 위해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 수뇌부를 구성했다.

    박 정권은 군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이북세력을 숙청하고 그 자리를 영남 군맥으로 채웠다. 군 최고위층 통제를 위해 영남 출신의 2~3류 인사들로 채우는 용인술을 구사했다. 그 결과는 심각했다. 비대해진 영남 군벌은 갈등을 제어할 줄 몰랐다. 그 결과 박정희 정권은 10·26이라는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지역 편중에 따른 불만이 축적되면서 1980년 5·18 민주화운동으로 폭발했다. 하지만 전두환-노태우 정부에서도 지역 편중은 여전했다. 전두환 정부는 호남 출신을 총리에 임명하는 등 호남을 배려하고 호남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는 등 융화정책을 펴는 듯했지만 그 효과는 미미했다. 호남인의 마음은 열리지 않았다.

    이후 지역감정을 이용하려는 여러 정치세력의 준동으로 지역갈등은 더욱 첨예한 형태를 띠면서 악화됐다. 지금은 지역통합이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다.

    박근혜 당선인은 지난해 대선 때 호남지역에서 10%를 가까스로 넘는 득표를 했다. 광주지역에서박 당선인에 대한 20대의 지지율은 4.3%에 불과했다.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고 했다. 변화를 하려면 양쪽 모두 노력해야 한다. 호남인은 하루빨리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정치인들의 선동에 걸려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전향적으로 풀어가야 할 주체는 역시 집권자와 정부다. 지역갈등 해소는 박근혜 정부가 총력을 기울여야 할 주제다.

    공통의 가치를 찾아라

    대한민국은 좌우를 초월한 공통 가치를 갖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 국가 정체성 실종이 통합을 저해하는 근본 원인이다. 역사의 아픔에 기댄 포퓰리즘, 대중영합적인 포퓰리즘, 증오와 분노에 기댄 편 가르기가 성행하고 있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라 다양한 생각과 다원적인 가치를 포용하고 있다.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그 사회가 공유해야 할 가치가 실종됐다. 박근혜 정부는 공통의 가치를 찾는 데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갈등을 해소하고 하나로 묶기 위해서는 공통의 가치관을 찾아내야 한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노력을 할 것을 당부한다.

    첫째, 1948년에 세워진 대한민국의 정통성만큼은 인정하자. 시대착오적 오판으로 북한 공산사상인 주사(主思)를 동경했던 486세대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자. 건국 직후의 대한민국은 불완전했고 상처투성이였다. 그러한 대한민국을 미화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고 자유롭고 부강한 나라를 이룩했다는 것에는 진정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시작할 때의 대한민국은 완전에 가까운 존재가 아니었다. 지금은 불완전한 부분을 많이 털어내고 완성된 국민국가를 향해 발전 중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 중 대한민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유일한 국가다. 이는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은 세계에서 제일 못사는 나라에서 잘사는 나라 반열에 올라섰다. 권위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 국가로도 변신했다.

    광복 후 대한민국은 미국과 유엔의 도움을 받아 정부를 만들었다. 그리고 제헌 헌법을 기초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립시켜가는 현대사를 만들었다. 제헌 헌법은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사회민주주의 요소를 포용한 매우 선진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대한민국 건국과 이 헌법의 의미를 새롭게 평가해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이 의회 민주주의와 다당제에 기초를 둔 자유민주주의, 입헌주의(법치주의), 공화주의,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건강한 시민사회와 근대 국민국가를 이루는 제도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문명사적 의의를 되새겨야 한다.

    문제는 한국의 역사교육이 이와 정반대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역사교육은 건전한 국가정체성 확립에 해가 된다. 한국 사회는 잘못된 역사교육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둘째, 건전한 시장경제라는 틀은 반드시 유지해야 한다. 세계 어디에도 순수 시장경제체제만으로 운영되는 나라는 없다. 대부분 혼합 경제체제를 택하고 있다. 그러나 근본은 건전한 시장경제로 삼고 있다. 공산주의 경제나 명령형 경제는 이미 실패했다는 평가가 내려졌다.

    이제 合을 지향하자

    셋째,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금과옥조로 여겨야 한다. 자유민주주의는 무한정한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 과잉에서 해매고 있다. ‘애국’은 촌스러운 단어로 인식돼 사라져가고 있다. 막무가내식 불복종, 방종과 반항을 민주주의로 착각하고 있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자유민주주의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기에 오른쪽의 시장중심주의에서 왼쪽의 사회민주주의까지 다 포용할 수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공산주의에서 분리된 좌파사상이다. 그러한 사회민주주의조차 자유민주주의와 건전한 시장경제를 인정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공산주의는 노동자혁명으로 노동자 천국을 만들자는 꿈을 꿨다.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자들이 사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니 그들의 표를 얻어 의회민주주의 체제에서 집권해 나라를 다스리자는 사상이다. 그러니 자유민주주의의 스펙트럼 안에 포함된다.

    넷째, 우리가 공유해야 할 가치는 국제협력과 대외개방 노선이다. 우리는 전(前)근대 시절 극도로 폐쇄된 사회가 지닌 치명적 단점을 극복하고, 세계와 호흡하는 수출 주도형 산업을 일으켜 오늘의 번영을 이뤘다. 개방체제를 택한 덕분에 발전한 것이다. 한때 유행했던 민중경제론, 민족경제론에 매몰돼 폐쇄 경제체제를 선택했다면 한국은 지금의 북한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개방을 택했기에 번영할 수 있었다.

    격변적 성공의 대가는 사회적 긴장과 왜곡이었다. 한국 사회에는 한이 축적돼 있어 정치에서도 살풀이 과정이 필요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살풀이 시대 구실을 했다고 본다. 김영삼 정부는 문민화와 민주주의 진작, 김대중 정부는 지역갈등과 지역모순을 완화하려는 노력을 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계층갈등을 줄이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살풀이 과정이 너무 길어서는 안 된다. 극단적이고 비이성적인 방법으로 나아가도 안 된다. 매일 푸닥거리를 하는 집안이 잘될 턱이 없다. 이제 한국은 정반합(正反合)의 발전과정에서 합(合)을 지향해야 한다. 거칠던 과거의 권위주의적 국가주의와 현재의 파괴적 반(反)국가주의를 변증법적으로 넘어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합리적인 애정을 키워야 한다.

    사회 안에는 사회민주주의부터 시장 지상주의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고 건전한 비판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국체(國體)를 부정하는 것에는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심각한 안보 위협에는 단결해서 대응해야 한다.

    공화주의적 애국

    이제는 종족적 민족주의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탈피해야 한다. 종족적 민족주의란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라는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다. 지금 우리는 하나인 것 같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여러 종족이 통합돼 이루어졌다. 단일민족이라는 종족적 민족주의를 고집하면 다원화한 개방 사회를 열어갈 수가 없다. 공동체를 만들 수 없는 것이다.

    다문화가정이 늘어나는 만큼 실제적 공동체를 숙성시키기 위해 공화주의에 주목해야 한다. 공화주의는 자유, 평등, 공공선, 법치를 핵심 가치로 한다. 모리치오 비롤리가 “자신의 역사와 문화를 가진 특정 공화국의 법과 정치체계, 생활방식에 충성해야 한다”고 한 공화주의적 애국의 길을 찾아가야 한다. 닫힌 민족주의, 폐쇄적 국수주의가 아닌 열린 민족주의, 공화주의적 애국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공공선을 목적으로 하는 법치를 이루려면 사람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참여가 필요하다. 시민들은 정치 공동체의 공공이익에 복무하겠다는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져야 한다. 자유롭고 평등한 가운데 사회와 국가를 위한 공공선을 추구하는 시민이 두꺼운 층을 이룰 때 그 사회는 공화주의에 기초한 진정한 시민사회가 된다.

    과잉 민주주의를 피해가며 시민사회를 더 알차게 성숙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식하고, 대한민국의 발전 과정을 객관적이고 긍정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러한 인식을 가져야 국가정체성을 확립해 다가오는 통일시대를 대비할 수 있다.

    새로 출범하는 박근혜 정부는 능력 위주의 탕평(蕩平) 정책을 펴야 한다. 지역감정의 뿌리가 박정희 정부였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자신을 반대했던 인사들까지 포용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공화주의적 애국’에서 해답 찾아라
    강규형

    1964년 서울 출생

    연세대 사학과 졸업, 미국 인디애나대 석사·오하이오대 박사

    연세대 통일연구원 연구교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운영 자문위원

    저서 : ‘21세기 첫 10년의 기록’ ‘한국 외교사와 국제정치’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 초기의 인재등용 실패를 거울삼아 측근과 패거리 위주의 인재등용을 지양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나아가 건전 좌파와의 협력과 상생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과의 연대를 고려해선 안 된다. 그것은 사회통합의 취지와 거리가 멀다.

    또한 소외계층의 경제적 어려움과 심리적 박탈감, 기회 불평등, 그리고 지역적 소외감을 잘 헤아려 그들을 위한 정책을 펴야 한다. 성장과 나눔으로 상생(相生)하는 정치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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