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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파리 사이 101장면 <마지막 회>

느림을 견디는 파리 조급증에 빠진 서울

고현학(考現學)으로 풀어본 두 도시

  • 정수복│사회학자·작가

느림을 견디는 파리 조급증에 빠진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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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카데로 광장에 있는 해양 박물관에는 거대한 배의 모형과 군함들이 정박해 있는 항구의 모습을 그린 풍경화들이 걸려 있다. 그것은 프랑스가 육군만이 아니라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한 제국주의 국가였음을 의미한다. 오래된 루브르 박물관의 소장품들과 새로 지은 케브랑리 박물관의 전시물들은 그런 제국주의의 문화적 전리품들이다. 루브르 박물관 앞마당에는 말을 탄 루이 14세 동상이 서 있고 앵발리드의 안 마당 정면 건물에는 나폴레옹 동상이 서 있으며 샹젤리제 거리에는 행진하는 모습의 드골 동상이 서 있다. 그들은 프랑스 제국의 영웅들이다.

파리의 동쪽 허파라고 하는 뱅센 숲 입구에는 이민사 박물관이 있다. 이 건물은 원래 1931년 당시 프랑스 제국이 통치하는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 남태평양의 식민지 지역 풍물을 전시한 ‘식민지 박람회’를 위해 지어진 문화궁전이었다. 이런 흔적들 때문에 파리 사람들은 제국의 영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아직도 파리가 세상의 문화적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산다. 프랑스의 영광은 이미 기울기 시작했어도 그들은 아직 그렇게 생각한다.

풍경 #93 일상의 제국주의

유학 시절 파리 14구에 있는 국제학생기숙사에 살 때 길 건너에 있는 몽수리 공원을 자주 산책하곤 했다. 지난해 9월 파리에 한 달 동안 머무를 때도 그 공원을 찾아갔다. 비가 오고 있어서 조용한 공원 어린이 놀이터 옆에 오래된 기념비가 눈에 들어왔다. 과거에 이 공원을 거닐 때는 무심코 지나갔지만 갑자기 어린아이의 호기심이 발동해서 그 조형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안내판을 보니 기념비는 프랑스 식민주의의 유물이었다. 프랑스의 지리학자와 군인들로 구성된 사하라 사막 조사단원들이 사막의 원주민 투아렉족의 공격을 받아 사망한 사건을 기억하고 그들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비였다. 사하라 사막에 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현지 조사에 나섰던 프랑스 식민주의의 첨병들에게 프랑스 공화국이 바친 헌사였다. 1870년대 프랑스 제국주의가 팽창하던 시기에 세워진 이 기념비는 당시 프랑스인들에게 식민지 개척의 열정을 불어넣는 구실을 했을 것이다.

또 어느 날 생제르맹데프레 대로를 걸어가는데 번듯한 건물 벽에 ‘프랑스 지리학회’라는 오래된 현판이 걸려 있었다. 19세기 후반 식민지 개척을 위한 기초 연구를 하던 학회의 본부 앞에서 나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떠올렸다. 사이드는 프랑스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양 학자와 작가들의 근동지역 연구 속에는 서구 제국의 우월감과 비서구 지역에 대한 편견이 들어 있음을 낱낱이 밝히지 않았던가! 프랑스 지리학회는 바로 그 오리엔탈리즘의 온상이었다.



오늘날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식인 한 사람과 어느 날 개인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그는 프랑스 특유의 반미감정을 담아 “미국 사람들은 지식인들도 아프리카 지리를 거의 모른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이 아프리카 지리를 잘 아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아프리카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있었으며 학교에서도 아프리카 지리를 많이 가르쳤고, 가족이나 친척 가운데 아프리카 식민지에 관료나 교육자, 모험가, 군인, 상인, 선교사 등으로 가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와 관련해 하나만 더 이야기하자면 내가 살던 파리 16구에 폴두메르 대로(Avenue Paul Doumer)가 있다. 매일 걸어 다니는 그 길의 이름이 된 폴두메르는 알고 보니까 베트남 초대 총독을 지낸 정치인이었고 나중에 그 공적을 바탕으로 프랑스 대통령이 된 사람이었다.

풍경 #94 날림 공사와 사후 관리

강남의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앞 버스 정거장 뒤에는 ‘가톨릭대학교’라는 흰색 네온 글자가 붙은 기둥이 서 있다. 그런데 벌써 오래전부터 ‘가’자와 ‘릭’자에 불이 들어오지 않아 ‘X톨X대학교’라고 읽혔다. 왜 자기 학교의 얼굴인 간판을 저런 상태로 방치하는지 답답했다. 그러다 어느 날 불이 들어오지 않는 글자를 교체하는 공사 장면을 보게 됐다. 기사 두 사람이 작은 트럭에 연장통을 싣고 와서 이동 사다리 위에 올라가 불이 들어오지 않는 네온 글자를 새것으로 교체하고 있었다. 공사가 끝나자 ‘가톨릭대학교’라는 다섯 글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나는 그 광경 앞에서 일단 급하게 공사를 마치고 나서 문제가 생기면 보수 공사를 하는 한국식 일처리 방식을 생각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새로 교체한 ‘가’자와 ‘릭’자가 다른 글자들에 비해서 훨씬 환한 흰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바쁘게 지나가는 행인들은 그런 차이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내 눈에는 ‘가톨릭대학교’라는 다섯 글자들 사이의 밝기 차이가 어색하게만 보인다. 공사를 날림으로 하고 사후 관리에 뛰어난 나라, 대한민국의 모습이 그 흔적 속에 들어 있다.

풍경 #95 낯선 존댓말

한 도시의 특징은 건물, 기념비, 간판에서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서울의 거리와 공공장소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소리와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관찰해봐야 서울의 고유한 특성을 알 수 있다. 서울에 돌아와 모국어로 말하며 살아가니까 외국어를 할 때 느끼는 긴장감이 없어서 좋다. 그런데 대화를 할 때마다 존댓말에 신경을 써야 한다. 프랑스어에는 말하는 사람 사이에 높낮이에 따라 달라지는 존비법이 거의 없다. 편안하게 부르는 호칭 ‘튀(tu)’와 모르는 사람 사이나 윗사람과의 관계에서 사용하는 ‘부(vous)’라는 2인칭 대명사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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