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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재구성

드골 하야 부른 佛 학생시위 대처 승리 안긴 英 노조파업

폭동과 혁명 사이

  • 이창무│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형사사법학 jbalanced@gmail.com

드골 하야 부른 佛 학생시위 대처 승리 안긴 英 노조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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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 하야 부른 佛 학생시위 대처 승리 안긴 英 노조파업

초기의 강경 진압이 종종 폭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폭력시위가 예상되자 리처드 데일리 시카고 시장은 법과 질서 유지 원칙을 거듭 천명하면서 밤 11시부터 통행금지를 실시했다. 그러나 군중은 반전(反戰)을 강조하는 여러 연설에 고무됐고, MC5와 같은 록밴드의 소란스러운 연주에 한껏 자극이 됐다. 반전시위대는 전당대회 기간 내내 시위를 벌였다. 초기에 비교적 평화롭게 진행되던 반전시위는 시간이 갈수록 거칠어졌다.

데일리 시장은 반전시위대의 집회와 행진을 허용하지 않는 등 강경한 방침을 재차 확인했다. 아울러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반드시 질서를 유지하겠다는 원칙을 밝혔다. 시위대의 일부만이 불법적이고 과격한 시위를 했는데도 경찰은 거칠고 과도하게 물리력을 행사했다. 경찰은 소속, 신분, 정파 등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진압에 나섰다. 시위대뿐 아니라 행인, 기자, 정치인도 피해를 보았다.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의 손자도 취재활동을 벌이다 봉변을 당했고, ‘플레이보이’ 창립자인 휴 헤프터도 경찰봉에 등을 맞았다. 심지어 휴가를 즐기던 영국 하원의원이 가스총을 맞고 경찰에 강제로 끌려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격동의 1960년대는 프랑스도 미국 못지 않았다. 1968년 5월, 프랑스는 ‘5월 학생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사소한 일이 발단이 됐다. 프랑스 낭테르대 여학생 회관은 남자 출입이 금지된 공간이다. 일부 남학생들이 시대착오라고 반발하면서 회관 진입을 시도하자 경찰이 물리력으로 저지했다. 관련 학생들도 체포했다. 정부의 초기 강경 대응이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5월 6일 학생들이 소르본 대학에 모여 항의 시위를 하려 하자 경찰은 소르본대 입구를 봉쇄했다. 2만여 명에 달하는 시위대가 접근하자 경찰은 경찰봉을 휘둘렀다. 시위대가 보도블록을 뜯어 던지자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해 시위대를 쫓아내는 한편 수백 명의 학생을 체포했다. 같은 날 고교생들도 시위 대열에 동참했다.

5월 10일 구속 학생 석방, 대학 주둔 경찰 철수, 대학 폐쇄 취소 등의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또 다시 수백 명이 체포되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경찰의 과잉 진압을 방송으로 지켜본 많은 시민이 학생들에게 동조했고 시인과 가수 등 예술인도 시위 대열에 가담했다. 5월 13일엔 100만 명이 넘는 시민이 파리 중심가에 모여들었다.

학생시위는 5월 한 달 동안 프랑스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금지하는 모든 것을 금한다’ ‘낡은 세계는 너희들의 등 뒤로 사라진다’…각종 슬로건이 권위주의적 학교 행정에 불만이 쌓인 학생들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 이후 1000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벌이면서 프랑스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고 마침내 샤를 드골 당시 대통령의 사임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학생시위는 베트남전 등 시대적 문제와 연결되면서 미국, 영국, 독일, 일본의 젊은이들을 저항과 해방의 대열에 동참하도록 이끈 기폭제 구실을 했다.



흑인에게 집중된 ‘의심법’

영국의 상황도 비슷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해가 지지 않던’ 대영제국의 영광이 사그라지면서 영국은 경제사회적으로 곤경에 빠져들었다. 사회복지를 강조한 노동당 정권이 이어지면서 노조의 영향력은 한없이 커졌다. “노조의 동의가 없으면 국정 수행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성장을 무시한 분배 위주 경제정책은 1976년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하는 위기까지 불러왔다. 이처럼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이민자에 대한 시선이 고울 수 없었고, 이민자들 역시 차별대우에 대한 불만이 누적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터져 나온 것이 1976년의 노팅힐 사건이다. 매년 런던에서 서인도 출신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열리는 ‘노팅힐 축제’는 카리브해 연안 스타일의 화려한 행진과 음악, 다양한 이벤트로 많은 볼거리를 제공했다. 영국 각지와 여러 나라에서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1976년에는 경찰의 자유로운 불심검문을 허용한 일명 ‘sus law(의심법)’로 인해 시민들, 특히 흑인 등 이민자의 불만이 고조돼 축제 시작 이전부터 긴장이 감돌았다. 경찰은 혹시 발생할지도 모르는 사태에 대비해 평소보다 10배나 많은 3000여 명의 경찰력을 대기시켰다.

그러나 축제 도중 소매치기 혐의가 있는 흑인을 체포하다 이에 항의하는 흑인 청년들의 거센 시위가 발생했고, 끝내 걷잡을 수 없는 대규모 시위로 악화했다. 주위 상점과 주택의 유리창이 깨지고, 300명 넘는 경찰이 부상했다. 경찰 차량만 35대 이상 파손됐다. 현장에서 부상당한 한 경찰관은 “사방에서 병, 벽돌, 온갖 것이 비처럼 쏟아졌다”고 증언했다. 전혀 무장돼 있지 않던 경찰은 쓰레기통 뚜껑이나 교통표지판 등으로 날아오는 돌을 막아야 했다. 당시 현장에 있던 한 방송인은 “경찰이 시위 현장에서 도망가는 것을 처음 봤다”고 상황을 전했다.

노팅힐 사건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브릭스톤 시위다. 1981년 4월 11일 런던 남부의 브릭스톤 지역에서 20세기 런던에서 가장 심각한 시위 사태가 발생했다. 브릭스톤은 사회경제적으로 문제가 많은 지역이었다. 높은 실업률과 범죄율,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상징되는 낙후지역이자 우범지역으로 꼽히는 곳이었다. 이 지역 주민은 대부분 경찰을 적대시했고, 당연히 경찰의 각종 활동에 비협조적이었다. 런던 경찰은 거리 범죄를 줄이고자 그해 4월부터 ‘스왐프 81 작전(Operation Swamp 81)’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sus law’라고 하는 불심검문 권한을 적극 활용했다. ‘sus law’란 범죄의 구체적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경찰이 의심(suspicion)한 것만으로 불심검문과 심지어 체포까지 할 수 있게 한 규정이다. 이 규정의 적용 대상은 젊은 흑인들에게 집중됐다.

사달이 난 것은 4월 10일 오후 5시 15분이었다. 경찰이 순찰 도중 상처를 입은 흑인 청년 하나를 발견하고 검문했다. 경찰관 2명이 이 청년을 순찰차로 데려가는 도중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 중 일부가 경찰의 연행에 항의하다 급기야 경찰관을 폭행하기에 이르렀다. 이 소란은 지원 요청을 받은 경찰이 도착하면서 마무리됐다. 10일 밤과 11일 아침 사이 경찰은 이 지역에 대규모 경찰력을 배치했고, 이에 대응해 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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