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릇 교양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런 말들을 입에 담지 않는다. 인간은 먹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그러므로 저 말들에서 ‘먹다’라는 것은 성행위를 뜻하는 저속한 표현이며, 성행위와 같은 은밀한 영역에 대해서는 되도록 입을 다물거나 에둘러 말하는 것이 교양인의 상식이다. 그래서 성행위를 ‘먹다’와 같은 말로 표현하는 것은 남성 우월주의자들의 천박함을 드러내는 증거나 한국식 조폭 영화에 등장하는 상투적 표현쯤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토마토, 꿀단지, 꼬막…
그런데 의외로 성행위를 ‘먹다’라는 식사 행위로 표현하는 것은 세계 여러 문화에서 공통된 현상이다. 유럽의 남성들은 예부터 여성을 ‘뜨거운 토마토’ ‘양고기 조각’ ‘꿀단지’ 등으로 불렀다. 당연히 그와 같은 표현은 문학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탈리아 작가 안톤 프란체스코 도니의 단편 ‘귀부인의 소식’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불과 몇 달 전에 결혼식을 올린 순진하고 자그마한 여자, 아직 어린애 같은 여자 하나가 마음에…왔다네. 장담하건대 그 여자는 자네 입 속에서 살살 녹을 거야. ‘질긴 고기는 남자를 정력적으로 만든다’라는 속담이 있지 않던가? 그런데 이 여자한테는 들어맞지 않는 속담이라니까. 딱 알맞게 익힌 살이라 배가 터지도록 먹고 싶은 그런 여자야. 그러니 군침이 돌 수밖에. 그런 여자라면 양념이나 생베르나르 소스를 전혀 치지 않고도 얼마든지 배불리 먹어주겠네.”
프랑스 작가 발자크는 여자를 유혹하는 남자의 마음을 레스토랑의 메뉴판에 비유하기도 했다. 굳이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은 사람이라면 염상구가 외서댁을 겁탈하고 내뱉는 말을 쉽게 잊지 못한다.
“외서댁을 딱 보자말자 가심이 찌르르 하드란 말이여. 고 생각이 영축 들어맞아 뿌럿는디, 쫄깃쫄깃한 것이 꼭 겨울꼬막 맛이시….”
이렇듯 여러 문화에서 성행위가 음식을 먹는 행위에 곧잘 비유되는 것은 두 행위 사이에 유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모두 신체의 경계를 통과하고 서로 별개인 것들을 섞는 행위이며 생명과 성장에 기여한다. 그래서 음식 선물은 성행위 제공을 나타내고, 성행위는 음식 이미지를 통해 묘사될 수 있다.

1920년 상해에 머물던 이광수가 허영숙에게 보낸 편지. 허영숙에 따르면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 춘원에게서 1000여 장의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이처럼 음식을 먹는 것과 성행위를 연관시키는 것이 보편적이다보니 사랑이 맛과 연결되는 것도 자연스럽다. 음식을 먹을 때에는 미각만이 아니라 모든 감각이 동원된다. 식감, 냄새, 온도, 색깔, 자극성 등을 씹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다. 그 모두는 동시에 느껴지는 것이라 음식에 대한 경험을 하나의 감각만으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맛은 모든 감각을 동원해야만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반역하는 ‘돈키호테’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음식을 먹을 때 오감이 총동원되는 것처럼 사랑할 때도 온몸의 감각들이 상대를 탐지하는 데 집중된다. 그제야 비로소 상대의 맛, 사랑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우리 근대문학에서도 음식의 맛을 사랑의 맛으로 변모시킨 작품이 있다. 춘원 이광수의 단편 ‘어린 벗에게’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17년 잡지 ‘청춘’에 연재됐다. 이 작품에 몇 달 앞서 발표된 것이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로 인정받고 있는 ‘무정’이다. ‘무정’을 쓰기 이전에도 이미 춘원은 육당 최남선과 더불어 계몽주의자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1910년대 초부터 계몽주의적 논설과 단편을 발표함으로써 당대 청년들의 우상으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 그의 논설은 기존 제도와 관습에 대한 비판, 특히 혼인제도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뤘다. 그는 부모의 뜻에 따라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결혼은 천리를 거스르는 것이며, 정신과 신체가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뤄진 조혼(早婚)은 야만의 극치라고 날을 세웠다. 날카롭고 명쾌한 그의 논리는 봉건적 관습에 억눌려 있던 청년층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김동인은 1988년 발간한 ‘김동인 전집’을 통해 당시 춘원의 영향력을 이렇게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