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에 못 미치는 ‘작위성’
전면 시행을 2개월여 앞두고 안전행정부가 실시한 조사 결과를 보면 자기 집의 도로명주소를 아는 사람은 전체의 32.4%, 우편물 주소에 도로명주소를 표기한 경우는 16%에 불과하다. 공공기관을 제외하면 새 주소 사용 경험은 더욱 적을 것이다. 사실상 국민이 새 주소를 사용할 준비가 안 돼 있는 셈이다.
안전행정부의 성과목표를 보면 도로명주소 전면 시행 이후에도 사용률은 전 국민의 45%에 불과하다. 길게는 20년, 짧게는 10년을 준비해 시행함에도 전 국민의 절반도 새 주소를 쓰지 않는다면 이는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정책이다. 새 주소가 국민에게 잘 수용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보다 지번주소가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오랜 공간 문화와 관련된 것이다.
1662년 도로명주소를 처음으로 도입한 영국에선 평지의 도로에 연해 집이 들어서고 도로 단위로 행정을 처리하는 가운데 도로 중심으로 한 지리적 공동체가 형성됐다. 영국에선 도로명이 우리의 동명과 같다. 이에 비해 지형지세가 다양한 우리나라에선 동네와 같은 면(面)과 그 표지물(느티나무, 바위 등)로 장소의 위치를 인식하면서 지리적 공동체가 형성돼 있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길보다 단지 같은 터의 위치 중심으로 ‘누가 어디 사는지’를 가늠한다. 지번은 우리 공간 문화와 잘 들어맞는다. 지번주소 폐기를, 동(洞)으로 표현되고 인식되는 우리의 오랜 장소 문화와 그 역사를 지우는 것으로 우려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도로명주소는 도로의 위계(位階), 방향, 건축물 순서 등을 규칙화하면서 만든 위치 정보다. 오랜 연구 검토 끝에 나온 것이지만 보통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기엔 너무 ‘작위적’이다. 대로, 로, 길의 구분, 서에서 동과 남에서 북으로의 방향 확인, 좌우 구분, 20m의 확인 등 위치 확인에 필요한 개별 정보가 너무 많다. 또한 그 공간 스케일이 일상적 공간인식 범위를 훨씬 벗어나 있다. 따라서 사용자 처지에선 도로명주소의 과학성은 단점이자 장애물로 작용한다. 전문가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으로 관리자 눈높이에 맞을지는 모르지만 일상인에겐 맞지 않다.
‘제도의 순화’ 과정 거쳐야
영국의 도로명은 쉽게 인식할 수 있는 짧은 구간, 장소 특성을 살린 개성적 이름으로 돼 있어 누구나 쉽게 이용하고, 사용자의 공간의식과 일체화가 쉽게 이뤄진다. 반면 우리의 도로명주소는 ‘기하학적 공간의식’을 의도적으로 작동시켜야 확인 가능하다.
그래서 인식자의 처지에서 볼 때 도로명주소는 지번주소 못지않게 복잡하고 어렵다. 편리성과 용이성이 떨어지면 결국 스마트폰이나 내비게이션 같은 기기의 도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도로명주소가 아무리 체계적이고 과학적이라 하더라도 사용을 외면하고 기기를 사용해 위치를 찾는 게 일반화하면, ‘도로명주소 따로’, ‘도로명주소 찾기 따로’가 될 가능성이 너무도 크다. 이렇게 되면 도로명주소는 주민등록번호와 같이 뜻도 모르는 ‘코드(비밀번호)’일 뿐이다.
4000억 원의 예산이 이미 투입됐고 주소 전환을 위한 법적 고시가 끝났다는 것은 새 주소 제도를 무조건 시행해야 하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국민의 수용성과 시행상 혼란, 장차 발생할 사회경제적 비용 등을 헤아려보면 새 주소는 ‘제도의 순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우선 전면 시행을 보류하고 사용자 수용성을 훨씬 높여야 한다. 굳이 전면 시행을 한다면 최소 한 세대에 걸친 ‘안정화’ 기간이 필요하다. 그 기간에 도로 위계, 도로 구간, 도로명, 번호체계 등을 사용자의 공간 행태나 장소 상황에 맞게 재조정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말하자면 일정 기간 지번주소와 함께 사용토록 하면서 적극적인 홍보와 함께 지역별주소검토위원회를 구성해 자체적으로 검토하고 보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한다. 그렇게 5년 혹은 10년마다 재정비해 보편적인 제도로 정착시켜야 한다. 경우에 따라 도로가 잘 발달한 곳에만 도로명주소를 쓰고, 골목길이 발달했거나 장소적 응집성이 강한 곳엔 기존 지번주소를 사용하도록 허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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