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1928년에 발표한 ‘옷과 밥과 자유’는 9행의 짧은 시이지만 그 깊이를 재기란 간단하지 않다. 이 작품은 각각 3행씩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세 부분은 각각 옷, 밥, 자유에 대응된다. 1~3행까지는 하늘을 나는 새를 통해 옷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4~6행까지는 논밭의 잘 익은 곡식을 통해 밥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을 담고 있다.
마지막 부분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여기에서는 먼 길을 떠나는 화자의 여정과 감상이 나귀에 투영돼 있다. 짐을 싣고 고개를 넘는 나귀에게 던지는 질문에서 화자의 여정이 자의가 아니라 강압이나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흔히 이 작품을 일제 강점기의 고단한 삶을 노래한 작품으로 해석한다. 의식주 중 어느 것 하나 풍요롭지 못했던 식민지 시절의 신산한 삶이 압축적으로 표현된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일면 타당하면서도 이 작품의 제목이 ‘옷과 밥과 자유’인 까닭까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의식주의 곤궁한 형편을 이야기하고자 했다면 ‘옷과 밥과 집’이 더 자연스러운 제목이다. 물론 제목과 내용의 관계가 긴밀하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분명히 소월은 ‘의식주’라는 말을 염두에 두면서 이 작품을 썼을 것이다. 제목과 구성에서 그러한 의도를 어렵지 않게 짐작해낼 수 있다.
그런데 소월은 인간 생활의 기본 요소가 의식주라는 상식에 기대는 대신, ‘집’의 자리에 슬쩍 ‘자유’를 끼워 넣음으로써 이 작품에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깊이를 부여한다. 집이 자유로 대체됨으로써 이 작품은 식민지의 어두운 현실을 반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이라면 응당 품게 되는 근본적 질문들을 내포한 작품으로 솟구친다. 마지막 행의 “너 왜 넘니?”라는 질문은 소월 자신에게 던지는 것인 동시에 당대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요즘의 우리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왜 살아야 하는가
집이 자유로 대체됨으로써 생겨나는 의미는 여러 각도에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집이 곧 자유를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동양적 전통에서 국가가 집으로 흔하게 비유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집은 곧 나라이고, 집이 없다는 것은 나라를 빼앗겼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나라를 잃은 자에게 자유가 주어질 리 없다. 이러한 해석은 소월이 의식주 중에서 왜 하필 집을 자유로 대체했는지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자가 갖지 못한 것은 집만이 아니다. 그에게는 새가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게 해주는 깃털이 없다. 그의 등에는 깃털 대신 나귀처럼 짐이 얹혀 있을 뿐이다.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었지만, 소월의 개인적 삶은 자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 또한 여느 남정네들처럼 생계를 꾸려야 하는 막중한 짐을 등에 얹고 있었고, 죽을 때까지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소월은 서른셋의 이른 나이에 숨졌는데, 그의 돌연사 원인에 대해 학계에서는 다량의 아편을 먹고 자살한 것으로 추정한다. 자살인지 사고사인지는 여전히 불투명하지만, 그가 아편에 중독돼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나귀처럼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있던 그에게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견디는 방법은 아편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집뿐만 아니라 새의 깃털인 옷이기도 하다.
그가 소유하지 못한 것은 집과 옷 이외에도 더 있다. 논밭의 곡식 또한 그에게는 소유가 아니라 감상의 대상일 뿐이다. 밥을 소유할 수 없는 자, 맘껏 밥을 먹을 수 없는 자 또한 자유로울 리 없다. 전 세계에 자유·평등·박애의 이념을 전파함으로써 현대 민주주의의 근간이 된 프랑스 혁명은 1789년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시작됐는데, 당시 시민들은 “우리에게 빵을 달라!”고 외쳤다 한다. 1930년대의 시인이자 비평가였던 김기림 또한 당대의 문단이 위축된 원인이 ‘빵’의 분배를 둘러싼 역사와 현실에 대한 자각이 없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자유가 반드시 밥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자유를 위한 투쟁은 항상 밥의 문제에서 촉발됐다.
결국 이 작품에서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옷과 밥과 집 모두다. 소월은 자유의 가치를 인간 생존의 기본 요소인 의식주에 빗대고 있다. 이를 통해 어떤 말보다 더 간결하게 자유의 의미와 가치를 전달한다. 자유가 얼마나 소중하고 그 무게는 과연 얼마나 되는지 장광설을 늘어놓을 수 있겠지만, 소월은 시인답게 의식주의 무게만큼이라고 간명하게 말한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의식주는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위해 생존하려 하는가. 소월은 그에 대해 자유를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짐 실은 저 나귀는 너 왜 넘니?”라는 질문이 겨냥하는 것은 일제 치하의 고단한 삶에 대한 성찰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지, 즉 무엇 때문에 의식주를 갖추려 애쓰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묵직한 질문이다.
세상 모두가 그 여인의 냄새
소월을 언급할 때마다 늘 따라붙는 말들이 있다. 한(恨), 민요조, 여성성, 민족주의 등이 그것이다. 그러한 개념들이 오랫동안 누적된 성과이며 소월 시를 이해하는 데 이정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옷과 밥과 자유’처럼 소월에 관한 상투적 인식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 있다. 그중 하나가 ‘여자의 냄새’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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