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호

“권력자도 法 아래 있다고 고백하는 것” “사법부가 중재 맡아 ‘떼법’ 해결해야”

10 법치주의

  • 패널 | 김형찬 김기섭 이국운 정리 | 송홍근

    입력2014-02-20 09: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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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 김형찬 미래전략연구원 원장·고려대 교수(철학)

    ■ 패널 | 김기섭 내외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 이국운 한동대 교수(법학)

    ■ 정리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후퇴하지 않는 민주주의’로의 길

    국가권력의 자의적 행사에 의해 큰 고통을 경험했던 한국 사회에서 그러한 권력의 영향력을 배제한 법치의 구현은 민주화 과정의 주요한 과제였다. 하지만 전제왕정이나 독재정권의 시대를 넘어 형식적 의미에서 법치주의를 상당한 수준으로 이뤄낸 현 단계에서도 여전히 법치의 실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넘쳐나는 것을 보면 이제 법치주의에 관해 이전과는 다른 차원에서의 논의가 필요한 듯하다.



    우리의 전통에서 법치란 가장 이상적인 국가·사회의 운영 방식은 아니었다. 법치 위에는 언제나 덕치(德治), 혹은 인정(仁政)의 이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법치의 필요성이 인정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덕치 또는 인정으로 설정된 통치의 방향 아래서 그것을 보조하는 방편으로 간주됐다. 덕치가 전제왕정 시대에 성인(聖人)의 면모를 갖춘 군왕의 능력에 의존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면 인정이란 그러한 덕치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인(仁)이라는 보편적 원칙·기준에 의한 것이어야 함을 보여준다.

    물론 이것은 법에 의한 지배 위에 전제적 군왕의 통치권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 시대에는 적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법치가 가진 한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고 구체적인 인간들의 삶을 모두 포괄하기에 ‘법’은 턱없이 거친 형식이다. 법조문이 아무리 늘어난다 해도 일상사의 미묘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판단 기준을 모두 담아낼 수는 없다. 그러한 법을 만들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결국은 사람에게 맡겨지는 것을 보면 여전히 법 위에는 덕치 또는 인정과 같은 사람의 개입 영역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덕치나 인정이 아니라 법치의 방식이 요구되는 것은, 다양한 인간 삶을 최대한 반영해 끊임없이 법을 제정·수정하고 적용의 판례를 남김으로써 권력이 오용될 여지를 축소하고, 국가·사회의 운영에서 보편타당한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독재정권 시대의 악법을 제거하고 민주주의의 형식적 절차를 보장받을 수 있는 법을 제정하는 것이 1987년 이후 민주화의 주요 과제였다면 이제는 주권을 가진 개개인이 타자와 함께 이해관계와 의견을 조정하고 협상하는 일상의 과정을 공명정대한 삶의 질서로 만들어가는 것이 법치주의적 의미에서의 민주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법치의 구현이 법의 발의와 제정에서부터 법의 해석과 적용에까지 전 과정을 통해 이뤄지는 것임을 고려한다면 그 과정에서 법의 공정성을 저해하는 여러 요인에 대한 견제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입법 과정에서 민의를 온전히 대변하지 못하는 대의제의 문제에서부터 법의 해석과 적용에 개입되는 이념적 편향과 기득권자의 영향력, 법의 집행에서 가해지는 권력의 오남용 등을 고려한다면 법치주의는 그 전 과정에 개입되는 요소들의 정당성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결국에는 최선의 공정성을 확보해가려는 사람들의 노력을 통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법 없이 사는 사람들의 세상’을 꿈꿔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세상은 정치·경제를 포함한 사회 모든 영역에서 크고 작은 권력의 부당한 개입을 배제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은 오랜 역사에서 얻은 교훈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러한 국가·사회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구성원들의 절실한 염원과 그것을 구현해야 한다는 강렬한 책임감이 작용할 때 가능하다는 점에서 법치주의는 결국 그러한 사람들을 통해서 이뤄진다. 이처럼 법치는 그 법과 연관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그 사람들의 이념적 입장과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법치주의의 기반 위에서 행해질 때 이 사회가 유무형의 부당한 권력에 의한 자의성을 배제하고 공공성의 영역을 확대해나가며 쉽사리 후퇴하지 않는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이뤄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김형찬 | 미래전략연구원 원장

    김형찬 10개월 동안 ‘한국 사회의 이념과 통일 한반도의 철학’을 주제로 논의해왔다. 민주주의 공화주의 사회주의 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 생태주의 등 아홉 가지 이념을 다뤘다. 마지막회 주제는 법치주의다. 법률가로 활동하면서 법치주의에 관한 글을 써온 김기섭 변호사와 학자로서 법치주의를 연구해온 이국운 교수를 모셨다. 법치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 이 교수께서 먼저 말씀해달라.

    이국운 법률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법치주의는 화두 같은 것이다. 법치가 무엇인가? 법률가들은 자신들이 법치주의를 잘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저는 공부하면 할수록 이게 참 어려운 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법치주의를 영어로 ‘rule of law’(법의 지배)라고 표현한다. 어떻게 보면 rule of law는 말이 잘 안 되는 얘기다. 지배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뤄지는 것이지, 법이 뭐기에 지배를 한다는 말인가? 최근 정치학자들을 중심으로 rule by law(법에 의한 지배)를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지배자나 지배그룹이 지배받는 사람을 자의적으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법으로 통치한다는 뜻으로 법치주의라는 낱말을 사용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rule by law로는 rule of law의 실천적 깊이를 담아낼 수 없는 것 같다.

    법치주의의 근본은 법을 해석하거나 적용하는 권력자조차 법 아래 있다고 고백하는 정신이 아닌가 싶다. 당연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법을 운용하는 이들은 법체계 바깥에 있기를 원한다. 예컨대 검찰은 자신들이 적용하는 형법이나 형사소송법 바깥에서 그 법을 운용하는 자리에 있기를 원하지 자신들 또한 그 법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검찰뿐 아니라 한국의 권력자 일반이 그런 경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법이 王인 게 법치주의

    법치주의는 ‘법이 왕’이라는 것이다. ‘우리 중 누구도 왕이 아니고 오직 우리 모두를 지배하는 법이 왕’이라는 생각이 역사적 계기를 만나 명예혁명, 프랑스대혁명 등을 이뤄냈다고 볼 수 있다. 권력을 가진 자가 권력을 내려놓고 똑같이 법의 적용을 받겠다고 나서는 것은 일종의 용기이기도 하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서양에서 법치와 관련한 문제를 풀어온 과정은 ‘양심’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양심을 전제하고 이를 통해 모든 사람을 지배할 수 있는 법을 발견하려 한 것이 법치의 발전 과정 아닌가 싶다. 따라서 법치의 문제는 양심의 문제라고 하겠다.

    김형찬 양심이라는 낱말을 들으니 제 전공인 철학이 떠오른다. 법학자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말씀을 할 줄 알았는데, 철학과 똑같이 어려운 얘기를 했다.

    이국운 어려운 얘기가 맞다. 현재 한국 사회에 수많은 법적 쟁점이 제기돼 있다. 통합진보당 해산 문제 등 다양한 사안이 결국은 그 사건을 맡은 법률가의 양심에 의해 해결되게끔 돼 있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것이 헌법 103조의 요청이다. 우리의 체제 자체가 법률가의 양심에 기초를 둔 것이다. 그럼에도 양심의 중요성과 양심을 통해 발견되는 Common law, 다시 말해 보통법의 중요성에 대한 논의가 많지 않은 것 같다.

    김형찬 김기섭 변호사께서 생각하는 ‘법치’는 어떤 것인가.

    “권력자도 法 아래 있다고 고백하는 것” “사법부가 중재 맡아 ‘떼법’ 해결해야”

    1월 29일 ‘신동아’ 회의실에서 열린 이념 vs 이념 10차 토론회.



    법치의 반대말은 人治

    “권력자도 法 아래 있다고 고백하는 것” “사법부가 중재 맡아 ‘떼법’ 해결해야”

    김기섭

    김기섭 우선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다. Common law를 ‘보통법’으로 번역하는 것은 일본식 표현으로서 잘못이다. 사람의 양심과 Common law를 연결지으면 용어상 혼란이 일어난다. Common law는 영국의 민사소송 원칙에서 손해배상과 관련한 법률을 가리킨다.

    법치의 개념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따르다. 자본주의 국가, 공산주의 국가의 법치 해석도 다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보호받아야 할 사람은 모든 국민인 반면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인민, 즉 프롤레타리아다. 이렇듯 법치라는 낱말은 세계 공통의 어떤 규범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법치의 대칭적 의미를 가진 단어로는 뭐가 있을까? 인치(人治)가 그것이다. 쉽게 말해 사람이 다스리면 인치, 법이 다스리면 법치다. 또한 법은 ‘잘못을 저지르면 처벌을 받는다’는 예측 가능성을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법적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제공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 법치라고 말할 수 있겠다.

    김형찬 법치의 개념 정리는 이 정도로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현실 얘기로 넘어가보자. 최근 법치주의가 강조되는 분위기다. 그 까닭이 뭘까?

    이국운 김 변호사께서 용어와 관련해 지적한 것에 대해 얘기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실정 법규범 체계 용어로서의 Common law가 아니라 하나의 이념으로서 어디에나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Common law를 말한 것이다. 오해 없었으면 좋겠다.

    오늘날 법치주의가 강조되는 까닭은, 법치주의 말고는 우리 사회와 지구촌 문제를 풀어갈 정당한 다른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이기 때문인 것 같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뜻으로 법치주의를 얘기하고 있지만 흥미로운 점은 그 사람들이 모두 ‘법치주의’라는 하나의 기호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사람들 사이에서 자유가 마땅히 누려야 할 것으로 받아들여지면 법치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은 자유의 존재이며, 그렇기에 평등하게 대접받아야 정의로운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법치를 요구하는데, 법을 집행하는 이들이 그러한 요구를 수용해낼 만큼의 실력을 갖췄는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우리는 국민국가 단위에서 법치를 해낼 능력을 갖고 있는가? 세계적 차원에서 그런 실력이 있는가? 자유로운 다중의 법치에 대한 요구가 거센 상황에서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법치에 대한 요구가 곳곳에서 등장하는 것은 위기의 전조일 수도 있다.

    김형찬 법치에 대한 요구가 커지는 것은 법치가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인가.

    이국운 그렇다.

    김형찬 김 변호사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다.

    김기섭 법치가 강조되지 않는 사회가 있나? 법률이 존재하지 않으면 야만의 사회로 되돌아간다. 한국에서 최근 법치가 과거보다 더 강조되는 것은 ‘떼법’이 많아서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떼법이 법치보다 위력을 발휘하는 까닭은 뭔가?

    법률로 다룰 수 없는 사회 현상이 늘고 있다. 일례로 어떤 동네에 화장터를 새로 짓는다는 발표가 나왔다고 가정해보자. 그 동네 주민은 거의 모두 화장터 건설을 반대할 것이다. 서울시가 조례 등에 따라 화장터를 짓겠다고 고시한 것은 법치라고 할 수 있다. 주민들이 ‘떼법’을 쓰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밀양 송전탑 문제도 비슷한 사안이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때 ‘due process of law’라는 표현을 쓴다. 일본 사람들이 적법절차라고 번역했는데, 제가 볼 때는 due process of law는 청문회 절차, 또는 공개토론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법치가 제대로 기능을 하려면 이익을 보는 계층과 손해를 보는 계층이 토론의 장으로 나와야 한다. 또한 제3의 중립적 기구가 중재에 나서야 한다. 이러한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행정행위가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

    밀양 송전탑을 예로 들어보자. 송전탑을 지으려는 곳은 한국전력공사다. 한전을 이득 보는 계층으로 간주할 수 있다. 피해를 보는 계층은 송전탑이 지나가는 곳에 사는 주민이다. 이득을 보는 계층, 손해를 보는 계층이 제3의 중재자와 모여 토론을 해야 한다. 한전이나 정부는 어떤 노력을 할 것이며, 경제적 보상은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하면서 주민을 설득해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쳤는데도 주민투표를 한 결과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송전탑을 세워서는 안 된다. 지하로 통과하게 하는 방법밖에는 없을 것이다.

    법치주의가 모든 국민을 만족시키려면 이 같은 due process of law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이와 관련한 입법도 필요하다고 본다. 국회에서 이 같은 절차를 제도적으로 거치게끔 법을 만들어줘야 한다. due process of law를 사법부가 맡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판사가 중재하면 중립성이 보장될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엔 청문 절차가 난장판이 되는 일이 잦을 것이다.

    법치와 ‘떼법’

    김형찬 김 변호사께서 예로 든 사안은 이 교수께서 법치의 요구는 법치의 위기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인 것 같다.

    이국운 그런 것 같다. 김 변호사께서 말씀한 due process of law가 세련되고, 지혜롭게 운영돼야 할 것 같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떼법’도 법의 이름으로 요구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다. 강정마을, 밀양 두 군데 모두 김 교수가 말씀한 절차를 형식적으로는 거쳤다. 그런데 설득이 안 됐다. 서로가 다른 법을 내세우며 대치한다.

    앞서 강조했듯 법치는 모든 사람이 자유의 존재로서 서로를 받아들이고 평등하다는 것을 전제로 해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이어서 모두가 만족하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북한의 젊은 지도자가 말도 안 되는 일을 버젓이 자행했다. 세계 각지에서 북한을 연상케 하는 유사 종교운동이 일어나는 이유는 또 뭔가. 스스로에게 강한 정체성을 부여하려는 권력의 시도가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법치주의의 관점에서 그러한 움직임은 법치에 대한 근본적 위협이다.

    “법대로만 하라는 것은 오류”

    김형찬 말씀을 들어보니 밀양 송전탑 같은 문제는 ‘법대로 처리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차원을 넘어서는 복잡한 문제인 것 같다. 형식적 법치주의로 해결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뭔가가 요구되는 것 같다.

    이국운 그렇게 볼 수도 있다. 다수결에 따라 자신들이 원하는 법을 제정하는 데 실패한 쪽은 헌법이나 헌법보다 더 근본적인 자연법에 기대어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가 옳다고 해서 투쟁하게 된다. 각자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옳은 법이라고 믿으면 사회는 분열되게 마련이다. 이러한 경향을 완화해 하나의 공동체를 구현하는 것은 그 사회의 역량, 특히 그 사회를 이끄는 지도층의 역량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역량을 시험받고 있는 것이다.

    김기섭 앞으로 비슷한 일이 더 많이 일어날 것이다. 이해관계가 다원화, 다층화하기 때문이다. 소득이 늘어나고 민주주의 의식이 발달하면 이해관계 대립이 더욱 예민해진다. 그렇다고 겁내면 안 된다. 우리가 능히 극복해내리라고 생각한다.

    김형찬 법치주의가 새로운 단계에 와 있는 것 같다.

    이국운 새로운 단계라고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법치의 프로젝트가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김 변호사께서는 능히 해낼 수 있다고 말씀했는데, 우리가 그럴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 의문이다.

    김기섭 한국은 지금까지 여러 문제를 잘 해결해왔다. 앞으로도 잘 해결해나갈 것이다.

    “권력자도 法 아래 있다고 고백하는 것” “사법부가 중재 맡아 ‘떼법’ 해결해야”

    이국운

    김형찬 감당하기 어려운 법치 요구를 해결해가는 방식은 정치의 과정이 아닌지 싶다. 법치가 아닌 정치에 맡겨야 하는 사안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든다.

    김기섭 법치와 관련해 반드시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통일과 관련한 사안이 그것이다. 제주 4·3사건에 대해 법원이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국군이나 정치 권력자가 인권을 유린하거나 부당하게 사람을 살해한 경우 국가의 배상책임을 법원이 인정한 것이다. 6·25전쟁 이전과 전쟁 시기의 비극적 사건은 공산당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4·3사건과는 반대로 인민군 혹은 빨치산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당한 남북의 피해자들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통일 한국이 인정할 것이냐, 인정하지 않을 것이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전쟁을 겪지 않은 동서독이 통일할 때는 존재하지 않던 사안이다. 조선노동당의 전쟁 책임을 통일 한국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는 난제일 수밖에 없다. 또한 피해자가 존재하기에 반드시 불거질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이국운 아직까지 한국 사회가 한 번도 정면으로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다.

    통일과 헌법

    김기섭 ‘신동아’를 통해 이러한 논의가 알려진다면 그것은 공론장에서 이 사안이 처음으로 제기되는 것이다. 김일성, 김책 등의 전쟁 책임과 조선노동당과 인민군에 의해 피해를 본 사람들에 대한 손해배상을 어떻게 해야 하나? 국민대의 러시아인 교수 안드레이 란코프는 한국 정부가 통일 이전에 전쟁 등과 관련한 북측의 가해자들을 용서하겠다고 선언하면 북한의 변화를 더 쉽게 이끌어낼 수 있다고 말하더라.

    김형찬 통일 이후에 소송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문제인 듯싶다. 피해자들이 손해배상 소송을 내지 않겠는가.

    이국운 당연히 그렇다.

    김기섭 손해배상은 물론이고 빼앗긴 토지를 돌려달라는 소송도 줄지어 제기될 것이다. 독일에서는 동독 땅의 소유권을 원주민에게 돌려줬다. 민사소송이 400만 건 넘게 있었던 것으로 안다. 독일처럼 하는 것이 옳은지, 예산을 동원해 보상만 하는 것이 옳은지 토론이 이뤄져야 한다.

    이국운 법치주의가 통일 한반도를 이끌어갈 하나의 이념이라고 보면 김 변호사께서 말씀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가 어렵다. 예컨대 통일 한반도의 국회에서 인민군 등이 저지른 일에 대해선 국가가 배상할 필요가 없다는 법률을 제정했다고 가정해보자. 어떻게 되겠나? 피해자들은 그 법이 위헌법률이라면서 헌법소원을 제기할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합헌이라고 판단하면 피해자들은 유엔이든 어디든 정의롭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고 호소하면서 끝까지 항의할 것이다.

    법치주의는 옳은지, 옳지 않은지, 정의로운지, 정의롭지 못한지에 대해 답하지 않는 이념이 아니다. 답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그때부터는 법치주의가 아니다. 법치주의는 김 변호사께서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하는 것이 옳고, 정의로운지 답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미리 준비해서 이렇게저렇게 하자고 합의해놓더라도 그대로 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도 아니다. 법치주의가 시험대에 서는 사안이 아닌가 싶다.

    김형찬 통일 한반도의 헌법은 어떤 절차를 거쳐 제정할 것인지 궁금하다.

    이국운 방법이 두 가지가 있다. 우선 현재의 우리 헌법을 개정하는 방식이 있다. 국회 통과 후 헌법 개정 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

    김형찬 거기에서 말하는 국민은?

    이국운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북한 주민도 우리 국민이다. 북한 주민의 국민성을 부인한 상황에서 헌법을 개정한다면 그 헌법이 어떻게 북한 주민에게 정당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다른 하나는 새로운 헌법을 만드는 것이다. 제헌의회를 구성해 헌법안을 의결하고 국민투표를 거친다. 사담 후세인 몰락 후 이라크가 이런 식으로 헌법을 만들었다. 두 방법 중 어느 길로 갈지 선택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다.

    김형찬 독일은 어떻게 했나.

    이국운 서독은 1950년대 헌법이 아닌 기본법을 만들었다. 기본법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분단 시기 서독을 통치하는 임시헌법임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독일은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5개 주와 동베를린이 독일연방공화국(서독)에 가입하는 형식으로 통일을 했다. 서독이 만든 기본법 아래로 동독의 5개 주와 동베를린이 들어온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한반도의 경우도 대한민국 헌법 개정이나 새 헌법 제정이 아닌 제3의 방법이 있다. 헌법을 그대로 두고 북한 지역을 수복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앞서 언급한 두 가지와 이 방법 모두 김 변호사께서 제기한 수많은 쟁점을 해결하지 않으면 법률적으로 대단히 복잡한 일이 될 것이다.

    김형찬 1월 9일 한 신문이 “정부가 법무부와 통일부, 법제처가 주축이 된 ‘부처 협의체’를 통해 통일 후 한반도에 적용될 통치 구조를 다양한 시나리오로 연구해 ‘통일 헌법’ 마련에 나서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정부는 이 보도는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한 것으로 안다.

    김기섭 통일헌법을 법무부 통일부 등이 만드는 것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만드나? 한쪽이 제외돼 있어서 안 된다.

    이국운 남북이 통일 협상을 하게 될 경우 우리가 내놓을 헌법안을 준비할 수는 있겠다. 그런데 그런 작업이 실제적 의미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한국 사회가 헌법 개정 논의에 나설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분권과 자율, 자치를 강조하는 형태로 헌법을 개정할 필요성이 있다. 국가의 틀이 분권화한 형태로 바뀌면 북한을 끌어안아 통일의 길을 열어가는 것이 현재 체제에서보다 수월할 것이다.

    ■ ‘이념 vs 이념’을 마치며

    한 사회에서 이념적 갈등은 한편으로는 소모적인 대립을 부추길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생산적 논의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이념 갈등이 그러하듯이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의 이념 갈등도 이와 같은 양면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근래 우리 사회에서 빚어진 이념 갈등은 대부분 정책적 판단과 정치적 행위를 이념으로 재단하며 논란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소모적 대립의 폐단이 통상적 수준을 넘어선 듯하다. 본 기획은 그러한 이념 갈등을 생산적 논의의 방향으로 이끌어가고자 기획됐다. 이를 위해 서로 대립하는 이념을 맞세우기보다는 이념별로 이론가와 활동가가 서로의 지식과 경험을 점검하고 배울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념은 이상사회를 현실에서 구현하려는 생각이 결집돼 만들어진 것이다. 적어도 그것이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 국가·사회의 이념인 한 남을 억누르거나 배제하며 나 혼자만 잘 살겠다는 이념은 존속할 수 없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에서부터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 공화주의, 인권사상, 복지국가론, 생태주의, 직접민주주의, 그리고 법치주의까지, 이 기획에서 다룬 열 가지 이념이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살도록 하며, 일부의 과도한 탐욕으로 인해 사회 구성원이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며 살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어서는 안 된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그러한 국가·사회를 이루기 위한 방법에서 차이가 있고, 당면 과제의 우선순위를 다르게 볼 뿐이었다.

    물론 각 이념의 폐단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이념이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통해 서로 다른 이념의 문제의식과 방법에 귀를 기울이며 대안을 모색함으로써 해결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의 본말(本末)과 선후(先後)를 함께 정리해낼 수 있다면 이념의 논쟁과 갈등은 더 밝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동력이 될 것이다.

    역사 속에서 경험해왔듯 어떤 이념은 소수의 특권을 옹호하고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기도 하지만, 그 이념이 가진 근본적 속성은 언젠가 그러한 현상적 왜곡의 가면을 드러내어 균열시킴으로써 결국 이념의 왜곡된 형상은 안으로부터 붕괴하게 된다. 이념의 갈등이 현상적 갈등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의 모순을 드러내 그 본질을 되찾아가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념 논쟁의 길이다. 그리고 그렇게 각 이념이 본질을 드러내도록 함으로써 이념들은 더 나은 형태로 진화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현실의 변화를 통찰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이념을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주요 과제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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