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 | 김형찬 미래전략연구원 원장·고려대 교수(철학)
■ 패널 | 김기섭 내외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 이국운 한동대 교수(법학)
■ 정리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후퇴하지 않는 민주주의’로의 길
국가권력의 자의적 행사에 의해 큰 고통을 경험했던 한국 사회에서 그러한 권력의 영향력을 배제한 법치의 구현은 민주화 과정의 주요한 과제였다. 하지만 전제왕정이나 독재정권의 시대를 넘어 형식적 의미에서 법치주의를 상당한 수준으로 이뤄낸 현 단계에서도 여전히 법치의 실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넘쳐나는 것을 보면 이제 법치주의에 관해 이전과는 다른 차원에서의 논의가 필요한 듯하다.
우리의 전통에서 법치란 가장 이상적인 국가·사회의 운영 방식은 아니었다. 법치 위에는 언제나 덕치(德治), 혹은 인정(仁政)의 이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법치의 필요성이 인정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덕치 또는 인정으로 설정된 통치의 방향 아래서 그것을 보조하는 방편으로 간주됐다. 덕치가 전제왕정 시대에 성인(聖人)의 면모를 갖춘 군왕의 능력에 의존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면 인정이란 그러한 덕치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인(仁)이라는 보편적 원칙·기준에 의한 것이어야 함을 보여준다.
물론 이것은 법에 의한 지배 위에 전제적 군왕의 통치권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 시대에는 적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법치가 가진 한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고 구체적인 인간들의 삶을 모두 포괄하기에 ‘법’은 턱없이 거친 형식이다. 법조문이 아무리 늘어난다 해도 일상사의 미묘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판단 기준을 모두 담아낼 수는 없다. 그러한 법을 만들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결국은 사람에게 맡겨지는 것을 보면 여전히 법 위에는 덕치 또는 인정과 같은 사람의 개입 영역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덕치나 인정이 아니라 법치의 방식이 요구되는 것은, 다양한 인간 삶을 최대한 반영해 끊임없이 법을 제정·수정하고 적용의 판례를 남김으로써 권력이 오용될 여지를 축소하고, 국가·사회의 운영에서 보편타당한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독재정권 시대의 악법을 제거하고 민주주의의 형식적 절차를 보장받을 수 있는 법을 제정하는 것이 1987년 이후 민주화의 주요 과제였다면 이제는 주권을 가진 개개인이 타자와 함께 이해관계와 의견을 조정하고 협상하는 일상의 과정을 공명정대한 삶의 질서로 만들어가는 것이 법치주의적 의미에서의 민주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법치의 구현이 법의 발의와 제정에서부터 법의 해석과 적용에까지 전 과정을 통해 이뤄지는 것임을 고려한다면 그 과정에서 법의 공정성을 저해하는 여러 요인에 대한 견제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입법 과정에서 민의를 온전히 대변하지 못하는 대의제의 문제에서부터 법의 해석과 적용에 개입되는 이념적 편향과 기득권자의 영향력, 법의 집행에서 가해지는 권력의 오남용 등을 고려한다면 법치주의는 그 전 과정에 개입되는 요소들의 정당성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결국에는 최선의 공정성을 확보해가려는 사람들의 노력을 통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법 없이 사는 사람들의 세상’을 꿈꿔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세상은 정치·경제를 포함한 사회 모든 영역에서 크고 작은 권력의 부당한 개입을 배제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은 오랜 역사에서 얻은 교훈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러한 국가·사회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구성원들의 절실한 염원과 그것을 구현해야 한다는 강렬한 책임감이 작용할 때 가능하다는 점에서 법치주의는 결국 그러한 사람들을 통해서 이뤄진다. 이처럼 법치는 그 법과 연관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그 사람들의 이념적 입장과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법치주의의 기반 위에서 행해질 때 이 사회가 유무형의 부당한 권력에 의한 자의성을 배제하고 공공성의 영역을 확대해나가며 쉽사리 후퇴하지 않는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이뤄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김형찬 | 미래전략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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