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누군데! 설마.’ 방심하다 당한다. 노인 대상 사기는 날로 급증하고 수법도 갈수록 교묘해진다. 홍보관 사기, 보이스피싱 사기, 대출 사기, 상조 사기, 효도관광 및 경로잔치 사기, 투자 사기, 공공기관 사칭 사기….
- 끝 간 데 없는 노인 대상 사기 범죄 백태와 그 예방법.
노인 대상 사기 범죄를 당했을 땐 신속한 신고가 최선이다. 전남 목포경찰서 산정지구대 소속 경찰관이 경로당을 찾아 전화 사기 등 범죄에 대한 예방법을 담은 안내문을 나눠주고 있다.
자식 몰래 갖고 있던 돈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고, 앞으로 매달 나올 (캐피털) 할부금 청구와 지로 청구서를 생각하면 최씨는 ‘하루하루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지경이다. 그는 “남편은 아침에 나가면 저녁에나 돌아오고, 자식들은 분가해 지들 살기 바쁘지, 종일 우두커니 혼자 집 지키자니 심심하고 외로워서 친구 따라나선 게 큰 화를 불러올지 몰랐다”며 후회했다.
#2 수중의 노후자금이 부족하지 않을까 불안해하던 김모(64) 씨는 재작년 친구 말에 솔깃해 주식투자에 나섰다. “국내 명문대를 졸업하고 증권회사에 20년간 근무하면서 상장주식 운영관리를 맡았던 국내 최고 주식투자 전문가가 운영하는 회사다. 일단 투자만 하면 주식 데이 트레이딩을 통해 월 30%의 고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친구 말에 반신반의하며 퇴직금의 일부인 4000만 원을 우선 투자한 것.
매달 약속한 이자가 꼬박꼬박 통장으로 들어오자 나머지 1억4000만 원까지 모두 투자한 김씨는 형제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에게도 투자를 권유했다. 하지만 ‘고수익 보장 주식투자’는 사기로 판명 났고 그동안 투자한 원금을 한 푼도 못 건진 그는 가족과 친구들까지 등지게 됐다.
5년 새 36% 급증
고령화시대를 맞아 노인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사기가 기승을 부린다.
자식들과 떨어져 10여 년째 홀로 사는 배모(79) 씨는 얼마 전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수화기를 들자마자 대뜸 “어머니, 어머니”하면서 살갑게 구는 상냥한 여자 목소리에 배씨는 상대방이 누군지 미처 물어볼 생각조차 못하고 대화에 끌려들어갔다. 배씨는 “얼결에 이름과 나이, 내 명의로 된 단독주택에서 혼자 산다는 말까지 다하고 말았다. 한참 얘기하다 ‘아차’ 싶어 누구냐고 물었더니 ‘혼자 계시면 심심하지 않으냐? 놀러 나오시라, 여기 어머니 또래 친구가 많다’고 하기에 그제야 평소 딸이 조심해야 한다며 신신당부하던 말이 생각났다. 노인들을 꾀어내서 바가지 씌워 물건 팔아먹는 곳인지 깨달았다”고 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이튿날이 되자 한 중년 남성이 전화를 걸어왔다. ‘배○○ 어르신 아니냐? 아드님이 이○○씨 맞느냐?’며 자신이 배씨 아들을 데리고 있다며 당장 통장과 도장을 들고 은행으로 가서 돈을 부치라고 했다. “처음엔 놀라 당황했다”는 배씨는 “남자가 말한 이○○는 아들이 아니라 사위이고, 해외에 나간 사위를 그가 데리고 있다는 게 말이 안 돼 꼬치꼬치 따졌더니 남자는 화를 버럭 내고 전화를 끊었다. 며칠 동안 무서워서 잠을 못 잤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대검찰청 ‘범죄분석’ 자료에 따르면, 2012년 한 해 전국에서 발생한 사기범죄 건수는 24만1275건. 이 중 피해자가 60세 이상인 경우는 1만9806건을 차지했다. 2007년 발생한 1만3784건에 비해 5년 사이 약 36% 증가했다. 이처럼 노인이 허위·과장 광고나 기만 상술에 쉽게 넘어가 사기꾼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는 이유는 뭘까.
지난해 12월 서울시가 개최한 민관합동토론회에서 ‘고령 소비자 피해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한 황진자 한국소비자원 약관광고팀장은 고령소비자의 피해 특성을 몇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일반적으로 재택률이 높다보니 가정방문이나 전화 권유를 받을 기회가 많고, 시간적 여유가 있기 때문에 악덕 상술의 타깃이 되기 쉽다. 둘째, 퇴직 등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경우가 많아 정보 부족 혹은 새로운 상품이나 서비스에 어두워 전단지 광고의 체험담이나 감언이설에 쉽게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셋째, 서체 크기가 작고 표현이 어렵다는 이유로 계약서를 잘 읽지 않는다. 넷째, 평균수명 연장에 따라 현재 보유한 자산만으론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에 투자 등 자산 운용으로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말에 쉽게 넘어간다. 다섯째, 심신의 기능 저하나 건강에 대한 불안 때문에 효능이 검증되지 않은 상품이나 쓸모없는 물건을 구입하는 경우가 많다.
직장 또는 사회생활을 오래한 노인들은 퇴직금과 주택 등 기본적 자산을 가진 경우가 많다. 사회생활 경험이 많을수록 ‘내가 누군데! 설마’하며 방심하기도 한다. 또 독거 혹은 부부만 사는 노인가구가 늘면서 누군가 조금만 친절하고 살갑게 굴면 금세 믿고 마음을 여는 외로운 노인이 많아 사기꾼의 표적이 된다. 다시 말해 ‘돈’ ‘건강’ ‘외로움’이 노인 대상 사기의 키워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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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마음 열지 마라”
도시를 떠나 전원주택을 구입해 아내와 텃밭을 가꾸며 여생을 보낼 꿈에 부풀었던 최모(67) 씨는 지난해 1월 ‘사이버경찰청 수사관’을 사칭한 남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남자는 “개인정보가 유출돼 통장이 수십 개 개설됐다. 함정을 파서 범인을 검거하려고 하니 당장 은행에 가서 통장의 돈을 내가 불러주는 계좌로 전부 입금하고, 은행창구에서 폰뱅킹 등록을 한 뒤 ID와 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남자를 ‘수사관’이라고 철석같이 믿은 최씨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통장에서 수차례 돈이 빠져나갔고 이를 수상히 여긴 은행이 ‘지급정지’ 조치를 취했다. 범인들이 검거됐지만 귀농을 꿈꾸며 살던 집을 판 돈과 퇴직금을 합쳐 1억900만 원이 들어 있던 최씨의 통장에 남은 돈은 3000만 원뿐이었다.
사건을 담당한 윤한명 서울 동작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장은 “은퇴한 노인에게 퇴직금과 집은 전 재산이고, 더 이상 돈을 벌 기회가 없기 때문에 남은 수십 년 동안 아껴가며 써야 하는 노후자금이다. 그게 다 털리게 생겼다니 넋이 나가 앞뒤 가리지 않고 범인이 시키는 대로 한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윤 팀장은 “검찰, 금융감독원 등 정부기관을 사칭하는 전화는 내용을 듣지 말고 무조건 끊어야 한다. 그런 곳에서 전화로 개인정보를 요구하는 경우는 없다. 가족이 몇 명이고 누구인지 다 알더라도 무시해야 한다. 수사에 필요할 경우 경찰서로 나오라고 하지 절대 전화로 개인정보를 묻지 않는다”고 말했다.
노인의 특징과 심리, 약점을 노려 끊이지 않는 노인 대상 사기사건 유형엔 ▲홍보관 사기 ▲보이스피싱 사기 ▲대출 사기 ▲상조 사기 ▲효도관광 및 경로잔치 사기 ▲투자 사기 ▲공공기관 사칭 사기 등이 있다. 홍보관 사기는 얼마 동안 특정 공간을 빌려 사람들을 모아놓고 춤과 노래, 음식과 공짜 선물을 제공해 환심을 산 뒤 허위·과장 광고를 통해 건강기능식품, 의료기기, 건강매트, 장례용품(수의) 등을 팔며 폭리를 취하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노인 피해자를 양산하며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지만, 근절되기는커녕 최근 몇 년 새 ‘체험방(의료기기를 갖춰놓고 무료 체험과 판매를 하는 매장), ‘59매장(59세 이하 대상 매장)’‘단타방(1~15일 이내 운영하는 매장)’‘데키야(65세 이상 노년층 대상 매장)’ 등으로 진화했다.
66세 여성 조모 씨는 2009년 홍보관을 통해 상조서비스 가입 명목으로 260만 원을 지급했다. 당연히 가입했다고 생각한 조씨는 최근 상조서비스 관련 피해 사례를 TV에서 접하고 불안한 마음에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가 직원으로부터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 “상조서비스는 후불제로 하고 그때 낸 돈은 수의 두 벌을 계약한 비용”이라는 것. 기가 막힌 조씨는 당시 받은 서류를 꺼내 확인한 뒤에야 계약서가 아닌 ‘수의 보관증’이란 걸 알았다. 조씨는 “환불해달라고 했더니 ‘5년 전에 산 물건 값을 환불해주는 데가 어디 있느냐’면서 대신 수의를 주겠다는데, 한번 속고 나니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노정호 한국노년복지연합 사무총장은 “최근 노인을 대상으로 상조서비스 가입을 빙자한 사기 문제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노 사무총장은 “일반 상조회사는 통상적으로 매달 3만 원씩, 10년간 회비를 낸다. 하지만 홍보관에선 ‘상조서비스 계약은 장례를 치른 뒤 돈을 내는 후불제로 하면 된다. 대신 상조서비스 때 해주는 수의는 질이 형편없으니까 별도로 좋은 걸 마련하라. 수의는 집에서 보관하기 힘드니 대신 우리가 보관해주겠다’며 노인들을 현혹한 뒤 상조서비스 계약서가 아닌 수의보관증을 주는 수법을 쓴다”고 귀띔했다.
무조건 신고가 상책
지난해 말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지능범죄수사팀은 유사수신 방법으로 36억 원 상당을 편취한 피의자 15명을 검거했다. 퇴직자와 주부를 대상으로 카드단말기 렌털 사업에 투자하면 고수익을 보장하겠다고 속여 334명으로부터 돈을 편취한 것. 신동석 팀장은 “범인들은 자기들이 투자를 권유하는 카드단말기가 ‘카드결제가 가능한 일반 카드단말기와 달리 계좌이체 기능이 있어 국세청 세금을 피할 수 있으므로 유흥업소나 대형 음식점에서 인기가 높다’는 말로 사람들을 현혹했다”고 설명했다. 신 팀장은 이어 “일단 투자를 권유받으면 투자사라는 회사의 자본금과 수익이 얼마인지 등을 기업 공시를 통해 반드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고수익’으로 유혹하면 무조건 사기로 의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편 지난해 7월 불특정 다수를 겨냥해 소액대출 문자메시지를 발송한 뒤 연락해온 사람들에게 대출 조건으로 휴대전화를 개통하게 하고 이를 중고폰으로 판매한 일당 5명이 검거됐다. 남궁숙 서울 성북경찰서 지능팀장은 “피해자들은 휴대전화를 개통해주면서 대당 20만~40만 원을 대출받았다. 피해자 66명 중 12명이 65세 이상이었다. 생활이 어려워 급전이 필요한 서민의 절박함을 노린 것”이라며 주의를 당부했다.
노인 대상 사기 피해가 빈발하자 전국 경찰서와 지방자치단체, 노인 관련 단체들은 노인종합복지관, 경로당 등을 찾아 사기피해 예방법 홍보에 적극 나섰다. 서울시는 지난해 (사)한국노년복지연합과 공동으로 ‘노년층 사기 예방 교육 영상물’을 DVD로 제작해 노인복지관과 대한노인회 등 관련기관에 배포했다.
한편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피해 사실을 감추지 말고 신고하는 게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이라고 조언한다. 경로당과 노인복지관, 지자체, 주민센터, 민간 소비자단체, 경찰청, 한국소비자원 등에 신고하면 상담과 피해 구제를 받을 수 있고, 서울시의 경우 ‘어르신 상담센터’를 통해 피해 신고를 받고 있다.
신동석 팀장은 “직접 피해를 당한 게 없어도 사기로 의심되는 전화를 받았거나 수상한 사람이 방문했다면 경찰에 신고하는 게 좋다. 사기범은 불특정 다수를 노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여러 건의 신고가 들어오면 실제 피해 사실이 없어도 예방을 위해 수사에 착수할 수 있다”며 신고를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