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마와 숙녀’ ‘얼굴’ 등을 쓴 시인 박인환은 서른 남짓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생머리를 곱게 묶고 나타난 가수 박인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났다. 박인희가 부른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을 들으며 사람들은 흘러간 사랑을 추억했다.
- 이 노래를 들으면 일순간 마음이 따뜻해지는데, 그건 우리가 그만큼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다.
‘길가에 가로수 옷을 벗으면 떨어지는 잎새 위에 어리는 얼굴’로 시작되는 노래 ‘끝이 없는 길’이 생각나는 쓸쓸한 겨울 풍경.
“지금 그 사람은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로 시작되는 박인희의 ‘세월이 가면’이다. 양말을 신었는데 새끼발가락은 무척 시렸고 유리창에 비치는 얼굴조차 꽁꽁 얼었던 11월 중순의 깊은 밤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 노래가 그리 유명한지도 또 누가 부르는지도 몰랐다. 그저 이렇게 맑은 목소리가 있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만 가졌을 뿐.
대학에 들어갔다. 어려웠던 권위주의 시대, 대학은 진저리 나도록 싫었고 현실에서의 탈출 또는 일탈만을 꿈꾸던 철없던 그 시절, 여름 농촌 봉사활동은 ‘아기다리고기다리던’ 낙이자 젊음의 해방구였다. 그 시절 봉사활동은 대개 여러 대학이 합동으로 했다. 그래야 선남선녀들이 봉사활동 외에 그 무엇을 기대하지 않겠는가. 설렘과 뒷얘기에 가슴을 떨던 그런 시절이었다. 피임교육과 기생충 치료를 하는 의대생과 간호대생들이 주축이고 나를 비롯한 비(非)의대생들은 논길 넓히기 등 주로 몸으로 때우는 일을 맡았다.
함초롬한 이미지, 곱게 묶은 생머리
박인희
마지막 밤의 캠프파이어로 아쉬움을 달랬다. 시골 국민학교 운동장 한가운데 둥그렇게 둘러앉아 모닥불을 피워놓고 돌아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져간 모닥불 같은 것….” 맞다 그랬다. 그때 우리들의 얘기는 밤하늘에 올라가 별이 됐고 중년이 된 지금 이 순간 곰곰 생각해보니 ‘인생은 말없이 사라져가는 모닥불 같다’는 노랫말이 새삼 실감난다.
‘세월이 가면’ ‘모닥불’ 두 노래는 모두 가수 박인희가 불렀다. 지금의 기성세대가 누구나 한 번쯤 보고 싶어 하는 그리움의 가수다. 함초롬한 이미지에 생머리를 곱게 묶은 그녀는 어느 순간 나타났다 태평양 건너 미국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서울행 발걸음을 딱 끊어 이제 그녀의 근황을 아는 사람조차 드물다. 미국 LA인근에서 방송 활동을 한다더라 정도의 소문만 흘러 들려올 뿐, 복고풍에 힘입어 웬만한 옛날 가수들이 TV에 다시 얼굴을 비추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국내 언론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가수 박인희의 출발은 ‘뚜아 에 무아’다. 해외여행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그저 경복궁 옆 알리앙스 프랑세스나 남산의 괴테 하우스에 가서 이국 정서를 맛보던 시절, ‘뚜아 에 무아’라는, 당시로는 생경한 보컬 이름을 들고 나타난 그녀다. ‘뚜아 에 무아’는 불어로 ‘너와 나(Toi et Moi)’라는 뜻인데 영어가 아닌 불어로 팀명을 짓는다는 것부터 남달랐다. 아마 영어를 한수 아래쯤으로 보거나 아니면 그 시대를 풍미했던 샹송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그때는 사실 연애소설의 주인공으로도 불문과 여대생이 곧잘 등장했다. 1968년 가을 타이거스라는 록그룹의 리더로 활약하던 이필원과 당시 록음악의 메카였던 미도파 살롱의 인기 DJ이자 숙명여대 불문과 재학생이던 박인희가 만나서 결성했다. 우연히 함께 부른 에벌리 브라더스의 ‘렛 잇 비 미’를 계기로 듀엣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뚜아 에 무아’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포크 명곡을 남기며 젊은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초창기에는 ‘스카브로우의 추억’이나 ‘썸머 와인’등 번안곡을 주로 불렀으며 ‘그리운 사람끼리 두 손을 잡고/ 도란도란 얘기하며 걸어가는 길’로 시작되는 ‘그리운 사람끼리’를 비롯해 ‘약속’ ‘님이 오는 소리’ 등 맑은 노래를 적잖이 남겼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의 노래를 일컬어 ‘영혼에 호소하는 인간의 목소리가 전하는 가장 맑은 노래’라는 수식어를 선사했다. 그래서 지금도 유튜브에서 관련 단어를 치면 그들을 그리워하는 온갖 상찬과 노래가 빼곡하다. 어쩌면 이처럼 고운 노래를 깨끗한 목소리로 부를 수 있느냐는 글이 많다.
박인희의 진가는 천상의 화음이라던 듀엣이 깨지고 솔로로 독립한 뒤 더욱 빛을 발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세월이 가면’이 있다. 이 노래의 탄생 과정이나 의미, 파급 영향 등은 새삼 재론의 여지가 필요치 않을 정도다. 지금도 유튜브나 인터넷 공간에는 그녀에 대한 기성세대의 절절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글이 엄청나게 올라온다.
“너무 보고 싶어요, 인희 씨”
“텅 빈 가슴을 음악으로 채워 넣었던 시절. 당신의 음악은 너무 사랑스럽고 그리워 눈물이 납니다. 어려운 시대에 정말정말 좋은 음악으로 위로해줬던 우리 시대의 가수 박인희 님. 잘 계시지요. 아무리 멀리 있어도 있는 곳만 알면 달려가서 만나고 싶습니다. 어디에 계시나요.”
“세월은 가도 역시 그 아름다운 시에 그 곱고 그리운 목소리 잊을 수 없구려. 박인희는 가수인지 시인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참으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었었지요. 많이 궁금하고 보고 싶구려.”
“그리운 박인희! 너무 사랑해요. 너무 보고 싶어요. 잊지 못할 그리운 그 목소리,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노래 ‘세월이 가면’은 알려진 대로 고 박인환의 시에 극작가이자 당시 경향신문 기자였던 이진섭이 곡을 붙여 탄생했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 태어나 6·25전쟁 3년 뒤인 1956년 3월 고작 서른 남짓한 나이로 세상을 하직한 시인 박인환의 존재를 한국인에게 각인해준 노래다. 불안했던 시대, 전쟁으로 인한 폐허의 상처를 위로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페이소스 짙은 낭만적 노래가 있어야만 했는가 보다. 그래서 명동의 어느 초라한 주점에서 가난한 시인은 이토록 애틋한 회상의 시를 토했고, 그의 벗 이진섭은 즉흥적으로 곡을 붙였다는 것이 탄생설화다.
그러나 노래가 세상에 나온 지 꼭 일주일 만에 이 불행했던 시인은 세상을 떠났다. 그에 대한 시단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이 시는 애상적인 노래 곡조에 힘입어 한국인에게 메가톤급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세월이 가면’은 술집 상호로, TV 드라마 제목으로, 그림 제목으로 등장했으며 실제로 후배 가수들에 의해 셀 수 없을 만큼 자주 불려왔다. 연전에 EBS가 특집 다큐멘터리로 재조명하기도 했다.
정말 알 수 없는 것은 ‘박인환’의 시들이 ‘박인희’의 노래 덕분에 더욱 빛을 발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널리 알려진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 ‘얼굴’ 역시 박인희의 낭송과 노래로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다. 그래서 가수 박인희가 박인환의 친척이라고 잘못 알고 있거나 억지로 우기는 사람도 주변에 더러 있다.
그러나 묘하게도 이름이 너무 닮아 오누이쯤으로 착각하게 할 뿐 그 어디에도 연결고리는 없다. 박인환은 강원도 인제 출신에다 고작 서른에 세상을 떠났고, 박인희는 해방둥이로 1945년생이다. 따라서 박인환이 작고했을 당시 초등생에 불과하거나 아니면 동기동창인 이해인 수녀와 같이 수다를 떨던 풍문여중 학생일 뿐이다. 그러니까 죽은 시인 박인환을 이 세상에 유명하게 한 가수 박인희는 묘하게 이름만 비슷할 뿐 전혀 인연이 없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박인환의 고향 인제읍에 세워진 기념 문학관에도 박인희의 노래로 유명해진 그의 시들이 전면에 등장해 찾는 이들을 반긴다. 문학관에 들어서자 박인희의 노래들이 나직이 흘러나온다. ‘세월이 가면’이 작곡될 당시의 명동거리가 재현돼 있으며 박인희 앨범 재킷이 진열되어 있다. 전쟁이 할퀴고 간 황량한 명동의 풍경을 재현해 놓은 주점에서 노래 ‘세월이 가면’이 탄생되는 순간이 조각상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박인환문학관의 외관 풍경. 잘생긴 동상의 주인공이 댄디 보이 시인 박인환이다. 이 멋쟁이 낭만파 시인은 폼을 내어 옷을 차려 입을 수 없는 여름이 싫다고 했다.
사실 ‘세월이 가면’은 좀 특별한 노래고 시다.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신파조라고 비판하는 이도 있지만, 사람들은 ‘세월이 가면’이 던지는 인간이 지니는 숙명적인 의미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세월이 가면’을 들으며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흘러간 사랑을 추억한다. 그래서 그 순간만큼은 사랑이 무르익던 여름날 호숫가, 가을날의 낙엽 지던 공원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해진 기쁜 우리 젊은 날을 연상하고 가버린 젊음과 사랑을 추억하며 묵직한 그리움에 젖게 된다. 노래 ‘세월이 가면’은 시인 박인환을 다시 보게 하는 기제가 되고 노래로 인해 박인환/인희 두 사람은 가상의 오누이 같은 존재로 남아 있다. 망우리 공원묘지 박인환의 묘비에도 ‘세월이 가면’이 오롯이 새겨져 있다.
사람들은 가끔씩 박인희의 이 노래를 두고 기막히다고 표현한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싸늘한 가슴에 있네”로 끝나는 노래를 듣노라면 진하디진한 그리움에 숨이 턱 막혀온다고 한다. 센티멘털이나 낭만이라는 단어는 애써 피해야 하는 것으로 알아온 젊은 시절과 달리 나이가 들수록, 그리고 스스로가 늙어간다고 느낄수록 ‘세월이 가면’을 가만히 부르고 듣게 된다. 마치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과 같은 이치다. 까닭은 알 수 없지만 ‘세월이 가면’을 들으며 사람들은 일순간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노래를 들으며 상념에 젖는 사람은 이제 더는 청춘이 아니다. 이렇게 세월을 보내서는 안 되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보내면 안 되는데 하는 사이에 세월이 참 많이도 흘렀다. 삶이란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얼마 남지 않게 되면 점점 빨리 돌아가게 된다. 세월은 너무 빨리 갔고, 그 여름 봉사활동이 끝나는 밤, 사위어가는 모닥불 앞에 쪼그리고 앉아 ‘세월이 가면’을 같이 불렀던,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지금 다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박인희의 ‘세월이 가면’을 들으면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코끝이 찡해진다. 그리고 노래 속에는 모닥불 피워놓고 젊은 눈빛을 반짝이던 스물 몇 살의 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