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이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주석 자리에 오른 지 1년이 된다.
- 중국은 한국의 제1 교역대상국이다.
- 남북 문제도 중국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 최근 박근혜 대통령-시진핑 주석의 관계가 더 각별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그러나 중국은 여전히 북한의 맹방이며 미국과 긴장관계에 놓여 있다.
- 한국은 시진핑 정권에 대해 좀 더 알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변한 것 같다. 양국은 체제 차이와 북한 변수에도 꽤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이는 어렵지 않게 증명된다. 시진핑(習近平·61) 중국 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은 2월 초 박근혜 대통령의 62회 생일을 축하하는 친필 서신을 공식적으로 보냈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중국은 1월 말엔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역에 안중근기념관을 개관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안중근 표지석 설치 요청에 통 크게 화답한 것이다. 이를 보면 양국 관계에 새 지평이 열린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지금의 중국 정권은 ‘친한(親韓) 정권’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다. 더불어 중국의 가슴과 머리에 있는 북한의 자리가 예전만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현 정권이 이처럼 한국에 비교적 우호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괜히 한국이 좋아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중요성이 부쩍 커진 점과 무관하지 않다. 여기에다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이 중국의 안보를 위협한다’는 고정관념이 많이 흐려진 점도 영향을 준다. 한국을 ‘대화가 되고 신뢰할만한 이웃 국가’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과 달리 주변국에 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문화적으로 세련된 나라’로 한국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그리기도 한다. 또 이념보다는 당과 국가의 발전과 생존에 더 가치를 부여하는 중국 지도부의 실용주의 스타일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 한국과 잘 지내는 것이 여러 면에서 자국에 훨씬 좋다는 자각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너무 이념적이면 최고 레벨 못 올라”
시진핑 정권이 이처럼 이전의 중국 정권과는 달리 한국에 유연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시진핑 정권의 면면을 살펴보기로 하자. 시진핑 정권의 핵심인사들은 시 주석과 7명의 당 정치국 상무위원, 당정 최고 지도부, 인민해방군 수뇌부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권력 서열 1위인 시 주석의 경우, 그는 1949년 공산 중국 건국 이후에 태어난 이른바 당 제5세대로 불린다. 당정 원로들의 후세를 의미하는 태자당(太子黨)은 그의 정치적 고향이다. 그는 1953년 부총리를 지낸 시중쉰(習仲勳)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 아버지의 후광을 전혀 입지 못했다. 태자당으로 누려야 할 특권도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었다. 1966년 발발한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한 채 고향인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의 량자허(梁家河)로 내려가 무려 7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은인자중의 노동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노동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만들었다. 밑바닥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들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경제 전반에 대해서도 눈을 뜨도록 만들었다. 그가 명문 칭화(淸華)대학을 졸업한 다음 1983년부터 2007년까지 24년 동안 허베이(河北), 푸젠(福建), 저장(浙江)성과 상하이(上海)시 등을 옮겨 다니며 성공한 지방 지도자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이때의 경험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실용주의적인 성향이 강하다. 사회주의 근본주의를 추구하는 강경 좌파라고 하기 어렵다. 비리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 중인 보시라이(薄熙來·65) 전 충칭(重慶)시 서기가 재임 시절 공산혁명 노래 부르기를 주창한 것과 비교된다. 그러나 이런 시진핑도 당과 국가가 이슈가 되면 확 달라진다. 어떻게 보면 다소 국수주의적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중궈멍(中國夢·부강한 중국이 되고자 하는 꿈)’이나 ‘위저우멍(宇宙夢·우주 강국을 향한 꿈)’이라는 상투적 용어를 달고 다닌다. 이 역시 그의 ‘당과 국가 우선’ 경향성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2012년 11월 제18기 전국대표대회에서 총서기에 취임하자마자 개혁에 적극 나섰다. 이 역시 ‘고인 물은 썩는다’는 말처럼 개혁에 나서지 않으면 당과 국가의 생존이 쉽지 않다고 자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부패한 당정 관리는 파리든 호랑이든 때려잡는다”는 말을 대놓고 한 것은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다.
그는 최근 소치 동계올림픽 개막식 참석차 러시아에 들렀다.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맛있는 고기는 이제 다 먹었다. 앞으로는 딱딱한 뼈를 씹을 차례다”라고 했다. 이 말 역시 기존 맥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쉬운 개혁은 끝났으니 향후 어려운 개혁에 나서야 한다는 다짐을 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실용주의적 온건 개혁파’로 분류할 수 있다
권력 서열 2인자인 리커창(李克强·59) 총리는 스펙만 보면 시 주석보다는 보시라이 전 충칭 서기에 가깝다. 베이징대학을 졸업한 직후인 1982년부터 이념적 색깔이 농후한 공산주의청년단에 들어가 무려 16년 동안 활약했다. 1993년부터 5년 동안 중앙서기처 제1 서기를 지냈다.
하지만 그는 1998년 공청단을 나온 이후 ‘너무 강성’이라는 자신에 대한 편견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허난(河南), 랴오닝(遼寧)성의 성장과 서기를 차례로 역임하면서 민생경제에 주력하는 등 이념의 그림자를 자연스럽게 벗어던진 것이다. 2008년 3월 11기 전국인민대표대회를 통해 경제를 총괄하는 상무부총리에 취임한 이후 더욱 그랬다. 법학을 전공한 박사임에도 테크노크라트(기술 관료) 출신인 것처럼 적극적으로 경제에 올인했다. 경직된 좌파적 이미지가 전혀 없다고는 하기 어려우나 시 주석과 ‘실용 온건 개혁’ 코드가 잘 맞는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장더장과 장성택의 인연
한국의 국회에 해당하는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상무위원장인 권력 서열 3위 장더장(張德江·68)도 비슷한 성향이다. 장더장은 젊은 시절 강경 좌파가 될 소지가 다분한 경험을 주로 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북한과 국경을 마주한 지린(吉林)성의 옌볜(延邊)대학 조선어과를 나왔으며 1978년 30대 초반 북한의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과에 유학, 수년 동안 주체사상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는 유학을 마친 1980년 이후 줄곧 지린성의 당정 주요 보직을 거치면서 중국의 대북 관계 강화와 교류에 적극 나서기도 했다. 지린성의 서기가 된 1995년부터는 아예 중국 당정을 대표하는 친북 실권자로 꼽혔다. 당시 그의 파트너가 김일성종합대학 동창이며 한국과 중국의 장씨 성을 공유한 장성택이었다. 한국 정부가 이 무렵 중국의 고위급 인물 중에서 다른 인사는 몰라도 장더장만큼은 친한파가 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아예 지레짐작해 분류한 것엔 이런 까닭이 있었다.
이렇게 사회주의 이념에 충실했고 북한과 가까웠던 그도 1998년부터 2007년까지 중국 경제를 대표하는 지역인 저장성과 광둥(廣東)성 서기를 역임하면서 상당히 달라졌다. 무엇보다 개혁·개방을 더욱 가속화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또 ‘너무 이념적이면 최고 레벨의 지도자가 되기 어렵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 이후 그는 좌우 균형이 꽉 잡힌 중도 성향의 인물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일부에서는 그를 ‘장쩌민(江澤民·88) 전 국가주석의 정치적 아들’이라는 의미에서 ‘장더장(江的張·장쩌민의 장)’으로도 부른다. 그는 든든한 정치적 배경에다 중도로의 전향을 통해 시진핑 정권의 핵심으로 자리했다고 할 수 있다.
이외 권력 서열 4~7위인 위정성(兪正聲·69) 정치인민협상회의 주석, 류윈산(劉雲山·67) 당 중앙서기처 서기 겸 중앙당교 교장, 왕치산(王岐山·66) 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장가오리(張高麗·68) 상무부총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대체로 이념적인 색깔이 옅은 중도 성향이다. 좌파와는 일정하게 거리를 둔다. 시 주석과 코드가 맞지 않을 수가 없다.
이들 7명의 상무위원을 제외하면, 25명 정원의 정치국을 구성하는 나머지 당정 고위급 인사들 중 왕양(汪洋·59) 부총리, 후춘화(胡春華·51) 광둥성 서기, 쑨정차이(孫政才·51) 충칭시 서기가 이런 성향의 인물들로 꼽힌다. 이들은 2017년 열리는 제19차 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상무위원회에 진입해 차기 당정 지도자로 부상할 것이 확실시된다. 이는 능력도 능력이지만 시 주석과 일치하는 성향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분석 결과에 따르면, 시진핑 정권에선 ‘실리를 우선하는 온건 개혁파’가 대세를 장악했다고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노선은 사회주의 이념을 우선하는 노선과 비교할 때 한국과 궁합이 훨씬 잘 맞는 편이다. 시진핑 정권이 한국과 그 어느 때보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엔 이런 배경이 있다. 또한 시진핑 정권이 온건 개혁파를 차세대 주자로 육성하는 점으로 보아, 시진핑 정권 이후의 한중 관계도 그리 어둡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2013년 6월 27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 앞에 서 있는 박근혜 대통령 의전차량.
“천하대란 일어날 수도”
오바마·시진핑 정상회담을 다룬 ‘이코노미스트’ 표지.
우선 당정의 컨트롤타워인 당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들여다보면 이런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외견적으로 태자당인 시 주석이 같은 파벌인 위정성 정인협 주석과 왕치산 중앙기율검사위 서기의 후원을 등에 업고 권력을 장악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권력 서열 2위인 리커창 총리는 후진타오(胡錦濤·72) 전 주석 계열인 공청단의 핵심 지도자여서 시 주석과는 결이 다르다. ‘리틀 후진타오’라는 별명을 가진 야심가인 리 총리가 시 주석에게 계속 납작 엎드릴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기회가 주어지면 언제든지 공청단 이름을 앞세워 당정의 헤게모니 장악에 나설 가능성도 없지 않다.
또한 장더장 전인대 상무위원장은 장쩌민 전 주석이 이끌던 상하이방(上海幇)의 직계다. 상하이방의 상당한 영향력을 감안하면 시 주석이 당정의 전권을 완벽하게 장악했다는 말은 하기 힘들다.
류윈산 중앙서기처 서기와 장가오리 상무부총리의 존재도 변수가 아닐 수 없다. 류 서기는 어느 파벌에도 붙을 수 있는 무색무취의 무당파로, 장 상무부총리는 상하이방 계열로 분류된다. 시 주석의 처지에서는 향후 이들의 존재도 부담이 될 수 있다. 정치국으로 범위를 넓히면 더욱 복잡해진다. 상무위원 7명을 제외한 나머지 18명은 태자당, 상하이방, 공청단 세 파벌로 거의 정확하게 황금분할이 돼 있다. 시 주석은 이 중 자기 파벌인 태자당 쪽만 확실하게 틀어쥔 셈이다. 당정의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최고 지도자들 간의 물밑 암투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단언해도 괜찮지 않나 싶다.
중국에서 권력의 또 다른 한 축은 군부다. 지금의 중국을 건국한 마오쩌둥은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온다”고 일찍이 갈파한 바 있다. 그런데 군부도 상황은 비슷하다. 공식적으로 230만 명에 달하는 인민해방군을 지휘하고 핵무기를 통제하는 최고 사령관은 말할 것도 없이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인 시진핑이다. 권위에 도전할 세력이 있어서는 안 되는 절대적 위상이다. 게다가 그는 당 총서기에 취임한 이후 10여 차례에 이르는 장성 인사를 통해 자신의 측근을 군 요직에 많이 앉혔다.
류위안(劉源·63) 중앙군사위 총후근부 정치위원, 류샤오장(劉曉江·65) 해군 정치위원, 류줘밍(劉卓明·60) 해군 중장, 친웨이장(秦衛江·58) 난징군구 부사령관 등 상당수의 장성이 시 주석의 확실한 측근이다. 언뜻 보면 군부 내 시 주석의 권력은 요지부동이다.
하지만 군 내부를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군부 내에 주석을 지낸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인맥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장쩌민 인맥이 상당하다.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중앙군사위 주석판공실 주임을 지낸 자팅안(賈廷安·62) 상장을 비롯한 고위 장성 10여 명이 장쩌민계다. 이들은 시진핑 정권 출범 이후에도 눈을 시퍼렇게 뜬 채 여전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것도 대부분 최고 계급에서 말이다.
후진타오 인맥도 무시하기 어렵다. 역시 비서실장 격인 국가주석 판공실 주임을 지낸 천스쥐(陳世炬·51)가 2012년 10월 중앙군사위 판공청 주임으로 옮겨가면서 친(親) 후진타오 성향의 장성을 많이 육성해놓았는데 이들이 아직 건재하다. 장쩌민 인맥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알려진다. 유사시 이들 군부 내 양대 파벌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경우 군부 내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결론적으로, 시진핑 주석이 완벽하게 군부를 장악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셈이다.
중국의 권부(權府)는 겉보기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시진핑 정권이 당면한 현안에서 이런 점이 잘 나타난다.
정치 분야의 경우 경제가 발전하면서 정치개혁 요구가 커진다. 여기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현실이다. 제18차 당 대회 직후인 2012년 12월 저명한 학자와 법률 전문가 73명은 정치개혁 요구 서신을 당 중앙에 보냈다. 우리의 ‘연판장 돌리기’에 해당하는 공개행동이 나올 정도로 절박하다는 이야기다. “향후 중국에서 25년 전 수많은 시위참가자가 숨진 톈안먼(天安門) 사건이나 중동의 재스민 혁명 같은 정치적 격변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해외의 경고도 나온다.
경제 분야에선 골치 아픈 문제가 더 많다. 수억 명의 중국인은 여전히 절대빈곤상태다. 경기둔화, 청년실업도 심각하다. 고속성장에 따른 환경오염은 당장 중국인의 숨통을 죄여온다. 하나하나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경제의 체질을 개선하면서 최소한 7% 중반대의 성장도 일궈내야 한다. 글로벌 경제위기가 계속되는 상황이어서 쉽지 않다.
사회 분야의 현안도 태산 같다. 당정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극심하다. 빈부격차, 지역격차, 도농격차에 의한 불만과 갈등이 들끓는다. 여기에 테러와 분신 사건이 빈발하는 소수민족 문제도 있다. 예부터 중국은 민심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였고 대규모 민란으로 유명했다. 하나라도 뇌관이 제대로 터지는 날엔 천하대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
“개혁? 정말 피곤하다”
시 주석은 이런 정치, 경제, 사회 문제를 해결하거나 완화하기 위해 개혁을 작심하고 추진한다. 그러나 당정 관료들은 적극적으로 개혁의 손과 발이 되어주는 것 같지 않다. 시진핑 정권 출범 1년 남짓인 시점에서 관료들은 되레 개혁 피로감을 느낀다고 한다.
시 주석은 줄곧 부정부패 일소를 부르짖었다. 이후 공금을 사용한 회식, 호화 접대, 뇌물성 금품 수수 같은 관례가 철퇴를 맞았다. 최근 이임한 주중 한국대사관의 한 고위 외교관 P씨는 다음과 같이 중국 관료 사회의 분위기를 전한다.
“평소 교류하던 중국의 고위 관료는 내가 떠나는 것이 아쉽다면서 점심을 사겠다고 했다. 나갔더니 과거와는 너무나 다르게 대접이 소박했다. 그 관료도 미안했는지 ‘이해해달라. 지금은 상황이 이렇다. 잘못하다가는 목이 날아간다. 정말 피곤하다’고 말했다. 이게 개혁의 현실인 것 같다.”
지금 분위기로는 개혁이 시 주석 재임 기간 내내 이어질 것 같기도 하다. 제대로만 되면 나쁠 것이 없다. 그러나 빈 수레만 요란한 꼴이 되면 사회 전반의 피로감과 실망감은 극심하게 된다. 안 건드리는 것만 못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연초 시 주석 일가 등 최고위층의 친인척과 부호들이 최대 4조 달러(4400조 원)를 해외로 빼돌렸다는 의혹이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에 의해 공개됐다. 권력자들이 해외의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하는 방식으로 역외 탈세를 했다는 것이다.
이 의혹에 대한 이해를 중국 국민에게 어떻게 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 역시 시진핑 정권을 곤혹스럽게 한다. 일단 중국 정부는 이 내용이 중국 내 인터넷과 언론에 알려지지 않도록 통제한다. 이런 통제로 말미암아 중국 시민이 이 내용을 잘 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시골 벽촌에서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심지어 일부 실력이 뛰어난 네티즌들은 천기누설의 주인공인 ICIJ의 사이트에 우회 접속하는 방법으로 거의 완벽하게 자료를 뽑아내 사이버 공간에다 퍼 나르기도 했다. 당연히 이 자료를 본 대부분의 중국인은 분노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고 한다. 만에 하나 이 문제가 중국 사회에서 공론화 된다면 중국의 당정 지도부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적절한 변명이라도 만들어 대처해야 할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물론 이런 산적한 문제와 의혹에도 시진핑 정권은 중국 국민으로부터 비교적 높은 평가를 받는다. 특히 대외 정책에서 그렇다. 민족적 위상과 자긍심을 높인다고 본다. 중국인이 잠재적 적국으로 생각하는 미국과 일본에 대한 시진핑 정권의 강경 대응 기조는 민심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다. 북한을 냉정하게 보는 시각, 남북한 통일을 원론적으로 인정하는 기본 원칙 등도 중국 내에서 호응을 얻는 것으로 보인다.
원래 중국에 북한은 혈맹이었다. 6·25전쟁에 참전해 함께 피를 흘렸다는 사실을 상가하면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관계는 1992년 한중 수교를 전기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지금도 ‘북한은 중국의 완충지대로 지정학적 이익을 중국에 준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 이론에 대한 신뢰는 예전 같지 않다. 중국은 여전히 ‘세계에서 북한과 가장 사이좋게 지내는 국가’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가 혈맹 수준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북한 포기 안 한다는 오판 불식을”
이런 점은 중국사회과학원 아시아태평양지구 전략연구원이 1월 발간한 ‘2014년 아시아·태평양 지역 발전보고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보고서는 중국 주변의 변화를 거론하면서 시진핑 정권에 “어떤 상황에서도 북한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오판을 불식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중국의 싱크탱크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천방지축 행보의 북한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한국 주도의 통일이 중국의 이익에 어느 정도 부합한다면 굳이 적극적으로 막지 않을 수 있다’는 쪽으로 발전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한반도 통일에 대한 중국의 공식 의견은 반대가 아니다. 중국의 일관된 한반도 정책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는 말로 대변된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이 중국과 통일을 논하겠다고 한 것은 중국에 관해 많은 점을 시사한다.
시진핑 정권은 북한이 핵관련 6자회담 복귀에 진정성을 보이는 조치를 취하면 지금까지 북한에 미온적이던 태도를 바꿔 북한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적극 지원할 가능성이 높다. 시 주석을 비롯해 대부분의 정치국 상무위원은 북한과 밀접하게 교류한 경험이 있다.
그러나 김정은에 대한 지원이 중국의 이익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좀 더 냉정하게 계산할 것이다. 시진핑 정권은 명실상부한 G2로 국가위상을 키우면서 동시에 내부의 엄청난 난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구시대의 이념적 유물보다는 실리에 입각해 결정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우리는 시진핑 정권의 이런 특성과 상황을 잘 이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