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사전달이라는 언어의 기술적 기능은 점차 설자리를 잃는다. 오히려 화자(話者)와 청자(聽者) 간 상호반응이 더 중요해졌다. 한국어는 의사전달뿐 아니라, 상대방이 내 말을 듣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상호반응 시스템을 함께 갖고 있다.
- 한국에서 소통이 더 어렵고 불통이 많은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영어는 한국어보다 생각과 사실을 전달하는 데 더 충실하다.
그런데도 여전히 헷갈려서 정확히 답하기 어려운 영어 질문이 바로 “Didn‘t you have dinner?(너 밥 안 먹었니)”다. 우리말로 대답은 너무나 쉽다. 밥을 먹었을 때는 “아니오, 먹었어요”, 안 먹었을 때는 “네, 안 먹었어요”라고 하면 된다. 안 먹었냐고 물어봤으니까. 하지만 영어 대답은 전혀 다르다. 밥을 먹었을 때는 “Yes, I did.”, 안 먹었을 때는 “No, I didn‘t.”다. 더 황당한 것은, 영어로 “Did you have dinner?(너 밥 먹었니)”로 물어봐도 영어의 대답은 똑같다. 우리말로는 ‘먹었니’와 ‘안 먹었니’라는 질문에 다르게 대답해야 하고, 영어에서는 질문에 상관없이 대답은 한결같다.
처음 미국에 가서 한동안 진짜 헷갈렸다. 나중에 간신히 영어에 익숙해진 다음에는 “안 먹었니” 하는 질문에 영어로 “No, I didn‘t”라고 완벽한 부정문 대답을 하면서도 머리는 더 열심히 끄덕이며 긍정의 사인을 보냈다. 이런 사소한 질문은 괜찮다. 국가 원수들 간의 중요한 협상과정에서 미국 대통령이 “동의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우리나라 대통령이 말로는 “아니오, 동의하지 않습니다”라고 정확히(하지만 어색하게) 얘기하면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면, 얼마나 헷갈리고 위험한 순간이 되겠는가. 이런 언어적 차이는 단순히 문법의 차이가 아니다. 본질적으로 언어 기능의 차이이고, 궁극적으로는 문화의 차이를 반영한 것이다.
상호적 반응
보통 우리는 언어를 생각과 사실을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영어가 한국어보다 그 목적에 더 충실하다. 상대방이 어떻게 (긍정이든 부정이든) 물어보건 상관없이, 그 질문은 결국 나의 식사 여부를 묻는 질문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나의 식사 여부에만 근거해서 답하면 된다. 밥을 먹었으면 무조건 Yes (네), 밥을 안 먹었으면 No (아니오). 상대방의 질문 형태는 중요하지 않고, 정확히 나의 식사 여부만 고려해서 긍정과 부정을 결정하면 된다. 따라서 나의 상태를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기술하는 방법으로 가장 오류가 적은 의사소통법이다. 더구나 질문을 듣지 않고 답만 들어도 식사 여부는 명확히 드러난다. 그래서 영어의 궁극적인 목적은 ‘기술(description)’이 된다.
반면 한국어는 나의 식사 여부보다는 상대방이 나에게 어떻게 물었느냐가 더 중요하다. 나에게 긍정으로 물어보면, 나의 상태가 긍정이면 긍정으로 답하고, 부정이면 부정으로 답하면 된다. 하지만 부정으로 물어봤을 때, 나의 상태가 부정이면 긍정으로 답하고 나의 상태가 긍정이면 부정으로 답해야 한다.
한국어는 왜 이렇게 복잡하고 비효율적이고 헷갈리는 문법을 가질까? 바로 한국어의 본질적 기능이 기술에 머무르지 않고 ‘상호적 반응(interactive response)’에 있기 때문이다. 이 반응의 기능을 확인하는 방법은 한국에서 한국말로 영어처럼 대답해보면 확실해진다. 누군가 “밥 안 먹었니”라고 물어볼 때, “아니, 안 먹었어”라고 대답해보라. 십중팔구는 다시 물어본다. “밥 안 먹었냐고?”라고. 다시 “아니, 안 먹었어”라고 대답하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그다음 우리가 들을 말은 빤하다. “너 내 말 안 듣고 있지!”
어찌 보면 한국어는 의사전달의 기능뿐 아니라, 상대방이 내 말을 듣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시스템을 같이 가지고 있다. 이래서 한국에서 소통은 어렵고, 불통이 많은 것처럼 보인다. 사실 그런 반응 확인 시스템은 한국 사회를 더 어렵게 하는 요소가 아니라, 관계주의적 한국문화에 더 잘 들어맞기에 우리 스스로가 발전시켜온 것이다.
한국 사회를 동북아문화권에 속하기에 흔히 집단주의로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한국 문화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측면에서 보면 분명 집단주의적이다. 개인의 특성이나 고유성보다는 집단의 조화와 화합을 중요시하고, 개인의 권리나 자유보다는 집단을 위한 의무나 책임을 강조하고, 개인의 성취와 자아실현보다는 집단의 이익과 집단정체감이 더 우선시되는 경향을 가진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집단주의 국가가 똑같지 않다. 특히 수많은 심리학적 연구가 일본과 미국을 비교한 자료들에 근거하기에 일반적인 집단주의적 특성은 일본인의 문화적 특성을 가장 잘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집단주의 vs 관계주의
일본과 한국을 비교한 심리학적 연구에 따르면 일본인들의 집단주의는 조직에 대한 집단주의다. 즉, 조직 속의 한 개인으로 자신의 역할과 조직의 목적과 이익에 부합하는 행동규범을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집단주의는 조직이 아닌 사람에 대한 집단주의였다. 부모, 자녀, 친구, 친척과 같은 중요한 사람들이나 조직이 아닌 조직의 동료들과의 관계와 화합이 삶에서 중요한 문화적 특성을 갖는다. 이것은 심리학에서 한국인의 고유한 심리적 특성으로 밝혀진 관계주의다.
관계주의는 조직과 인간의 관계가 아닌, 일대일의 대인관계적 맥락에 더 초점을 맞춘다. 자신의 존재와 정체감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며, 따라서 누구와 있느냐에 따라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규정하는 맥락성과 역동성을 보여준다. 조직이나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임무보다 오히려 타인과의 개인적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2008년 7월 광우병대책위원회가 주도한 촛불시위.
이런 관계주의적 특성이 바로 우리 언어를 상대방과의 맥락에 따라 더 역동적으로 반응하는 형태로 만들었다. 흔히 존대어의 체계를 관계주의를 반영한 한국어의 특성으로 얘기하지만, 조직 속의 집단주의에서도 조직 내 역할과 서열에 따른 존대어의 기능이 존재하므로 그리 적절한 설명은 아니다.
관계주의를 더 잘 반영하는 한국어의 특성은 바로 질문에 따라 바뀌어야 하는, 기술의 기능을 초월한 상호반응의 기능이라고 볼 수 있다. 개인주의와 조직적 집단주의는 효율성과 목적 중심적 특성을 가지니 정확하고 효율적인 기술적 언어가 중요하다. 하지만 관계 자체가 더 중요한 한국인에게는 기술되는 내용보다는 내 말을 듣는다는 주관적 느낌이 훨씬 더 중요해진다. 그래서 회사에서도 내가 멍청하게 물어봐도 항상 정확한 내용을 가장 효율적으로 기술하는 사람은 왠지 차가운 인정머리 없는 놈이 된다. 하지만 내가 멍청하게 물어보면 같이 멍청하게 반응하는 동료는 왠지 정이 가는 편안한 상대가 된다.
대한민국은 현재 불통 사회다. 각종 언론에서는 정부와 대통령이 불통이라는 국민의 인식을 연일 전한다. 젊은 층과 386세대, 그리고 노년층 간의 이견과 불통은 사회적 갈등의 중요한 요인이다. 가족 내에서도 자녀와 부모, 부부간에도 불통이라는 하소연이 흔하다. 이런 우리 사회의 불통 원인은 정확한 기술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바로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 상호반응의 느낌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는 예전에도 소통의 문제에 대한 언급은 있었지만, 아마 소통의 문제가 사회적 키워드로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2008년의 광우병 사태인 것 같다. 정부가 추진한 미국산 소고기 수입재개협상에 대한 많은 국민의 반대 시위로 시작해 거의 정권 퇴진운동으로까지 확산됐고, 역사적 결론은 훗날 내리겠지만 이명박 정부가 집권 초기부터 국내 정치력을 상실하게 된 매우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평가된다. 많은 정치평론가는 광우병 사태에 대해 좌파와 우파의 정치판, 반미와 친미의 격돌, 보수와 진보의 갈등, 세대 간 충돌 등의 다양한 해석을 내놓지만, 심리학자로서의 분석은 기술적 소통과 상호반응적 소통의 문제였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미국산 소고기에 대한 광우병 사태는 여러 비합리적인 면이 있었다. 실제 미국산 소고기를 먹어서 광우병에 걸릴 확률을 고려하거나 유럽, 일본 같은 나라들보다 광우병 발병 빈도가 더 낮은 미국산 소고기에 대해서만 유달리 반응이 격했던 사실, 소에게 이미 오래전부터 동물성 사료를 금지해 광우병은 거의 100% 통제가 가능하고 실제로 발병이 급격히 줄어들었던 점은 그 비합리성을 어느 정도 확인해준다. 더구나 지금은 미국산 소고기가 실제로 별문제 없이 유통된다. 하지만 그 당시 많은 국민이 보인 미국 소고기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비합리성에서만 찾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왜냐하면 정부가 합리적인 정보를 계속 제공했는데도 사태가 진정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됐기 때문이다.
한국적 소통
인간이 특정 대상에 대한 태도를 형성하는 근본적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실용적 이유다. 어떤 대상에 대한 긍정적 또는 부정적 태도를 형성하는 것이 실질적 이득이나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실질적 이득이 손해보다 큰 사회적 대상에 대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긍정적인 태도를 형성하게 된다. 그 반대인 대상에게는 부정적인 태도를 형성한다.
또는 실제 스스로 어떤 손실을 계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태도를 통해 행동을 통제하게 된다. 예를 들어, 전기플러그를 만지면 왜 위험한지를 두 살짜리 어린아이는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아이가 위험한 행동을 못하게 하는 방법은 전기의 위험성을 설명하는 것보다 전기플러그를 싫어하게 만드는 게 효율적이다.
하지만 이런 실용적 이유가 없이도 우리는 태도를 형성하는데, 그것은 바로 상징적 이유 때문이다. 즉 어떤 태도를 가짐으로써 자신이 추구하는 어떤 상징적 가치를 강조하거나 드러내려 하는 경우다. 흔히 우리가 어떤 정치 후보를 지지한다고 얘기할 때, 실제로는 그 후보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도 많다. 오히려 그 후보를 지지함으로써 자신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를 확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경우에 해당한다. 명품을 소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 물건의 실용적 가치보다, 그 태도와 행위를 통해 자신 삶의 가치와 의미를 드러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광우병 사태는 표면적으로 미국 소의 위험성과 같은 실용적 이유를 얘기했지만, 많은 사람에게 오히려 한국의 자존심, 미국에 대한 반감, 이명박 정부에 대한 견제 등의 다양한 상징적 가치를 드러내는 행위였다. 그래서 이런 상징적 가치에 대해서는 기술적 소통이 아닌 상호반응의 소통이 필요했다. 상징적 가치에는 정확성이나 효율성은 적용되지 않기에 기술적 소통은 의미가 없다.
그런데도 정부는 계속 미국산 소고기가 얼마나 안전한지에 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인 정보만을 반복적으로 얘기했다. 국민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상징적 가치들에 대한 질문에 정부가 반응해주길 바라고 있었을지 모른다.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한 객관적이고 일관성 있는 대답이 아니라, 자신들이 물어보는 방식에 대해 역동성 있게 반응해주는 그런 소통을 원했을지 모른다.
이런 불통의 논란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카드정보 유출 사건에 대해 현오석 부총리는 “금융소비자도 정보를 제공하는 단계에서부터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정보제공에 다 동의해주지 않았느냐”는 발언으로 홍역을 치르고 사과까지 했다. 1월 31일 발생한 여수 기름유출사건에 대해 윤진숙 해양수산부장관은 “기름 유출의 1차 피해자는 정유사, 2차 피해자는 어민”이라고 말해 비난을 받더니 급기야 경질됐다.
이분들의 말은 기술적 기능으로 보면 거의 틀린 것이 없다. 정보 유출에서 핵심내용인 금융회사가 다른 기관에 정보를 제공한다는 부분에 대부분의 사람이 동의한 것도 사실이고, 유조선이 정유사 항만시설을 들이받아 유출사고가 났으니 시간적으로나 인과관계를 따지면 1차 피해자는 정유사가 맞다. 이분들의 말을 전체적인 맥락이 아닌 부분만 선정적으로 기사화하는 언론의 오류도 엄청나게 크다.
하지만 그 모든 점을 고려하더라도 상호반응의 기능을 고려하면, 어차피 원인을 물어본 말이니 원인만 정확히 얘기하면 된다는 자기중심적 대화법에 의존한 발언 당사자도 일부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이런 일들이 벌어질 때마다 당사자들은 진의가 왜곡되었다고 억울하다고 얘기하겠지만, 언어와 대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보 전달이 아니라 상대방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타인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으면 하는 목적성을 가지고 대부분 대화가 이루어진다. 그런 생각을 떠오르게 하지 못하는 모든 대화는 결국 실패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이런 소통과 불통의 문제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 왜 여성 지도자들이 급부상하는가’라는 이슈와 직접 연결된다. 모든 남성과 여성이 반드시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많은 심리학적 연구는 평균적으로 남성은 문제중심적 사고와 대화를 하고, 여성은 정서중심적 사고와 대화를 한다고 밝혀왔다. 진화의 과정에서 자원을 구하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사냥을 하고 싸움을 하는 등의 역할을 담당했던 남성은 위급한 상황에서 효율적인 사고와 대화의 기능이 더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여성 리더의 출현
서로에 대한 잘못된 대화법은 돌이킬 수 없는 불화를 낳기도 한다. 사진은 부부 갈등을 소재로 한 영화 ‘장미의 전쟁’.
당장 대부분의 부부싸움을 보면, 슬퍼하는 아내에게 남편은 자꾸 왜 그러냐고, 원인이 뭐냐고만 물어본다. 그래야 문제를 해결하고 슬플 일이 없어질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내에게는 자신이 지금 슬프다는 그 자체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아내들은 자신이 슬프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과거 20년 전에 일어났던 일을 얘기한다. 그럼 남편은 왜 직접 관련도 없는 과거의 일을 다시 얘기하냐고 화를 낸다. 아내는 남편이 자기 말을 듣고 있는지, 자기가 화가 나 있는 상태를 이해하는지를 확인하고자 계속 질문을 바꿔본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남편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냥 자신을 더 궁지로 몰아넣으려는 아내의 이상한 대화법 정도로 생각하고 원인을 알아내려고 더욱더 집요하게 이렇게 대답한다. “그러니까 도대체 왜 그러냐고?”
시대가 변하면서 모든 세상사는 너무나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이제 원인과 결과가 명확해지지도 않은 사회가 돼간다. 미디어의 발달과 사회적 전파 속도가 빨라지면서 사람들의 사고 속도는 이미 정보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이런 시대에는 진실을 파헤치는 집요함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고, 실제로 다 알 수도 없다. 대부분 사건의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데 보통 6개월이나 몇 년, 심지어 영원히 밝혀지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상황에서 언어의 기술적 기능은 그 설자리를 잃어버린다. 오히려 상호반응의 기능이 더 중요해지고 있으며, 관계주의 문화를 가진 한국 사회에서 그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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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따뜻한 리더, 여성 리더의 급부상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과거에는 여성이 리더가 되려면 남성 리더의 덕목을 갖춰야 한다고 심리학적 연구 결과들이 주장했다. 하지만 이제는 반대로 성공한 남성 리더들이 여성리더의 덕목을 갖추고 있다고 얘기한다. 바로 그 여성 리더의 특성 핵심에 ‘상호반응적 소통’이 있다.
오늘도 차마 “왜 그래?”라는 질문은 못하고 눈만 껌벅껌벅하면서 당황하는 나에게 나의 아내는 얘기한다. “지금 내가 슬프다고!” 당신에게 그런 소통을 청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돌아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