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의 비밀병기 ‘맞짱 쇼’의 진실
- 뒤통수치기 능한 북한군, 실속 없이 투명한 한국군
- 유엔사 교전규칙에 충실했던 합참, 보복 결심 못한 MB
- ‘과도하게’ 공격적이냐, ‘균형 안 맞게’ 공격적이냐
- 집요한 미국 ‘키맨’들의 1대 1 설득
-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의 ‘안정적 분단’ 원해
- 김장수의 NSC는 ‘고르디온의 매듭’을 풀 수 있나
- 호랑이를 고양이로도 부려먹지 못해
2010년 11월 23일 북한군의 집중포격을 받은 후 응전에 들어간 해병 연평부대의 k-9 자주포.
disproportionately
특정인에 대한 평가에 민감한 것은 인지상정이다. 평판은 여론을 만들고 여론은 정책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게이츠의 인물평을 놓고 논란이 인 것은 대한민국이 좌우 이념으로 첨예하게 나눠져 있음을 보여준다. 그 바람에 더 중요한 대목을 놓쳤다. 연평도 포격전 직후 한미 간 의견 대립과 봉합이 그것이다. 다음은 언론이 전한 게이츠 회고록의 내용.
‘(한국 측에서) 보복을 요구했는데, 한국의 보복 계획은 군용기와 포화를 동원하는 등 과도하게 공격적(disproportionately aggressive)이었다.’ ‘한반도 긴장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고조되는 것을 우려해 오바마 대통령과 클린턴 국무부 장관, 마이크 멀린 합동참모의장 등과 함께 한국의 상대 측과 며칠간 통화하면서 논의했다.’ ‘중국도 북한 지도부를 상대로 상황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노력을 했다.’
주목할 것은 ‘과도하게’라고 해석한 ‘disproportionately’이다. 영한사전은 이 단어를 ‘균형이 안 맞게’로 풀어놓았다. ‘균형이 안 맞게 공격적’이라고 하는 게 이상했는지 ‘과도하게 공격적’이라고 의역했다. 그러나‘과도하게’에 가까운 영어 단어는 ‘excessively’다. excessively라는 쉬운 단어가 있는데도 굳이 disproportionately를 쓴 데는 이유가 있을 텐데, 언론은 이를 따져보지 않았다.
대통령과 국무·국방장관, 합참의장 등 미국의 실력자가 총 출동해 며칠간 한국 측을 설득했다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천안함 사건에 이어 ‘또 당한’ 한국이 미국이 집요하게 설득한다고 주저앉은 이유는 또 뭔가. 그리고 중국은 북한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
그간 우리는 ‘한반도에 무력충돌 사태가 일어나면 미국과 중국이 개입한다’ ‘미국과 중국이 어떤 타협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결정된다’ ‘결정적인 시기 우리는 미국과 중국을 끌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해왔다. 연평도 포격전 직후 상황이 그러했다. 그런데 언론은 게이츠 회고록에 담긴 노무현 인물평에만 관심을 갖느라 그때 벌어진 ‘큰 게임’의 진실을 놓쳐버렸다.
연평도 사태 때 군사작전 수립에 참여하고 미국 측을 상대했던 인사들은 안보와 국제관계 등을 의식해 익명을 요구하며 취재에 응했다.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한 연평도 포격전 비화는 한반도의 위기가 어떻게 조성되고, 그때 국제사회는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려준다. 우리 군과 한미연합사령부, 청와대의 대응 시스템은 어떠한지, 그 시스템의 허점은 무엇인지도 잘보여준다.
연평도 포격전이 있은 날 저녁 합참을 찾은 이명박 대통령. 그는 끝내 보복을 지시하지 않았다.(왼쪽) 연평도 포격전 후 한국으로 긴급히 날아와 한민구 합참의장을 만난 멀린 미국 합참의장.(오른쪽)
먼저 남북한의 군사 충돌 시스템부터 살펴보자. 작전의 속성은 ‘뒤통수치기’다. 상대가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기습하는 것이다. 이를 허용하면 우리는 북한을 “예측 불가능한 망나니”로 부르는데, 이는 ‘당한 우리가 바보이고, 북한은 영악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북한은 내부 통제가 안 되는 망나니 집단이 아니다. 진짜 망나니라면 벌써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다.
북한 지도부는 흥분하지 않으며 정교하게 북한군을 통제한다. 이유는 이기기 위해서다. 섣부르게 벌인 전쟁은 패망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들도 잘 안다. 따라서 끊임없는 도발로 상대에게 겁을 줘 당황하게 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더 큰 허점을 만들게 한다. 허점이 충분히 커졌다고 판단하면 그들은 ‘모든 것을 결정짓는’ 잔인한 도발을 한다. 극대화된 충격과 공포를 안겨 한반도를 조기에 석권하는 전략이다.
지난해 이맘때 북한은 ‘냉정한 전사’의 면모를 보였다. 한미연합군은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독수리연습, 3월 11일부터 3월 21일까지 키리졸브연습을 펼쳤다. 대형 군사작전은 훈련을 명목으로 부대를 움직이다 펼치는 경우가 많다. 2월 12일 3차 핵실험을 성공시킨 북한은 미국이 이 연습을 이용해 기습할 수 있다고 본 듯, 전략로켓군과 장거리포병 부대에 ‘1호 전투태세’를 하달했다.
독수리연습은 전면전 시 한반도로 달려온 미 증원군과 한국군이 하나가 돼 작전계획 5027대로 움직여보는 실(實)기동연습이다. 증원군으로는 주로 오키나와에 있는 미 해병대 3원정군 등이 달려온다. 이들은 여러 단계로 나뉘어 달려와 몇 가지 연습을 하고 철수한다. 그리고 한미연합사를 확대한 전면전 지휘소가 각종 워게임을 해보는데 그것이 키리졸브연습이다.
‘1호 전투태세’ 발령 직후 북한은 평양 인근 기지에서 ‘무수단’미사일을 실은 이동식 발사대 TEL 2대를 꺼내 원산 쪽으로 천천히 이동시켰다. 적당한 곳에 정차한 TEL은 어느 정도 준비한 후 무수단을 쏠 수 있다. 무수단은 미 해병대 3원정군의 본거지인 오키나와는 물론이고 미 13공군이 있는 괌의 앤더슨 공군기지까지 날아간다.
그 때문에 미 공군 우주사령부는 모든 첩보위성과 무인정찰기를 동원해 TEL의 동태를 추적했다. 그러나 산 그림자에 가려지거나 날씨가 나쁜 날은 놓쳤는데, 그때마다 북한이 무수단을 발사하지 않을까 긴장했다. 미군이 그러하니 첩보위성과 무인정찰기가 없는 한국군은 더 긴장했다. ‘귀로 듣는 위험’은 눈으로 보는 적보다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국군은 미군의 반응을 보며 따라 움직이는 ‘덩달이’가 돼갔다.
우리의 준비는 완강해졌다. 훈련에 참여하지 않은 군단과 사단은 직속 포병여단과 포병연대들에 지시해 K-9 자주포와 한국형 다련장 로켓인 구룡을 방열(放列)해놓고 기다리게 했다. K-9과 구룡은 발사 시 엄청난 후폭풍이 일기에 발사 준비를 많이 하는데, 그것이 바로 방열이다. 연속사(射)가 가능하도록 상당량의 포탄도 준비해놓았다. 현무 미사일을 운용하는 육군 유도탄사와 F-15K와 KF-16, 이지스함 등을 통제하는 공군작전사령부(공작사)와 해군작전사령부(해작사)도 작전 태세를 갖췄다.
맞짱 쇼 ‘1호전투태세’
그즈음인 3월 27일 새벽, 2군단 예하 사단이 지키는 강원도 화천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뭔가가 철책을 넘어오려는 것으로 판단한 GOP 중대가 크레모어를 터뜨리며 일제 사격을 한 것. 사단은 ‘진돗개 하나’를 발령했다. 그런데 그 사격으로 우리만큼 긴장했을 북쪽에서는 단 한 발의 실탄도 날아오지 않았다. 날이 밝자 사단은 짐승이 철책을 건드린 것으로 보고 진돗개 하나를 해제했다.
2군단 건너편에는 인민군 5군단이 있다. 천안함 피침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후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을 강력히 제재하는 내용의 5·24 담화를 발표했다. 국방부 장관은 그 후속조치로 대북 심리전 재개를 천명했다. 그러자 바로 그날 ‘전선중부지구사령관’ 명의로 위장한 북한 5군단장이 “(한국군이) 심리전 수단을 설치하면 직접 조준격파사격을 하겠다”는 공개 경고장을 보내왔다. 그 기세에 눌려 한국군은 대북심리전을 하지 못했다.
그때 적 5군단장은 이용환 상장이었고 후임이 이영길 상장이다. 이영길은 북핵 위기가 고조된 지난해 2월 작전국장에 임명됐다. 작전국은 인민군 작전계획인 일명 ‘핵전면전쟁계획’ 등을 발전시키는 부서다. 그런 요직에 임명된 것은 이영길도 천안함-연평도 사건을 일으킨 4군단장(김격식)만큼 호전적이라는 의미다. 그러한 5군단이 야밤에 일어난 우리 군의 격렬한 사격에 침묵했다는 것은, 그들도 통제가 되는 훈련받은 집단이라는 뜻이다.
북한은 느릿느릿 태백산맥을 넘어간 TEL을 함경남도 ○○공군기지 주기장(駐機場)에 노동과 스커드 미사일을 실은 TEL 일곱 대와 함께 배치했다. 미국 첩보위성을 향해 ‘잘 찍어줘~’하는 포즈를 취한 것. 미국은 북한의 의도를 제대로 짐작할 수 있었다. ‘맞짱을 뜨겠다는 쇼를 하는구나.’ 북한은 독수리연습이 끝난 4월 30일 1호 전투태세를 해제했다.
3차 핵실험 성공에도 미국의 공격을 받지 않았으니, 북한의 ‘무수단 쇼’는 성공한 셈이었다. 북한은 위기에 처하면 ‘한판 붙자’는 대형 쇼(show)를 벌여 모면한다. 5·24담화 직후 조준격파사격을 하겠다고 위협해 국방부의 대북심리전 재개를 무산시킨 것이 하나의 사례다. 인민군은 맞짱 작전과 함께 속이고 협박하는 작전도 구사한다. 주로 음모를 꾸밀 때다.
그러나 모든 것을 숨기면 큰 역습을 당할 수 있으니 요상한 공개만 한다. 천안함 사건 발생 4개월 전 대청도 근해에서 남북한 함정이 맞붙어 우리가 승리했다(2009년 11·10 대청해전). 이 교전은 정식으로 맞붙으면 북한이 우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러자 북한은 ‘성전(聖戰)’을 언급하며 뒤통수치기에 들어갔다. 말 공격과 실제 공격 준비를 분리 추진하는 성동격서(聲東擊西) 전술을 구사한 것.
한국군을 몰아간 북한군 작전
2009년 12월 21일, 북한은 일본에서 발행되는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를 통해 ‘(북한이 설정한) 서해 해상군사분계선 북쪽 바다를 해안과 섬에 있는 포병 구분대들이 평시에 해상사격을 하는 구역으로 한다’ ‘아군(북한군) 해상사격구역에서 모든 어선과 기타 함선은 피해가 없도록 자체의 안전대책을 스스로 세워야 할 것’이라는 해군사령부 대변인 담화를 보도했다.
바다에는 세계적인 룰이 있다. ‘공해에서는 모든 배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고, 영해에서는 그 나라에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다른 나라 민간 선박도 자유롭게 통항할 권리가 있다(無害通航權)’는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영해와, 영해에 이어진 공해를 해상사격구역으로 마구 선포하는 것은 이 룰을 어긴 행위다. 그러나 국가는 안보를 위해 서는 해상사격도 해야 하므로 국제해사기구(IMO)는 그에 대한 협약을 만들어놓았다.
천안함 사건 4개월 후이자 연평도 사건 4개월 전인 2010년 7월 21일 청와대를 방문한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부 장관을 만난 이명박 대통령. 오른쪽은 게이츠와 같이 온 클린턴 미 국무부 장관이다.
나비텍스 덕택에 선박은 기상이 좋지 않은 바다와 사격이 진행 중인 바다를 피해 안전하게 항행할 수 있다. 남북한은 이 협약에 가입했기에 모두 나비텍스 방송을 한다. 이 방송은 그 나라 근처로 가야 수신할 수 있는데, 우리는 백령-연평도가 북한에 가까이 있어 북한 나비텍스 방송을 100% 수신한다. 북한은 이를 의식해 도발을 획책할 때는 수를 부린다. 북한의 나비텍스가 아니라 조총련 기관지를 통해 평시 해상사격구역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군 정보본부는 세계 곳곳에 무관을 파견해놓았기에 금방 이를 포착한다. 보고를 받은 국방부는 언론을 통해 이 사실을 공포했다. 그러자 북한은 더 약은 수를 만들었다. 해가 바뀐 2010년 1월 25일 러시아의 나비텍스를 통해 백령도와 대청도 동쪽 바다를 1월 25일부터 1월 29일까지는 해상사격구역으로, 1월 25일부터 3월 29일까지는 항행금지구역으로 한다고 선포한 것.
자국 일을 다른 나라 나비텍스로 발표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1월 29일 우리는 나로호 발사에 성공했다. 이날 나로호의 추진체 1단은 필리핀 근처의 공해로 추락할 것으로 예측됐다. 그 때문에 필리핀에 부탁해, 필리핀 나비텍스로 ‘어느 바다로 언제쯤 나로호 추진체 1단이 떨어지니 주의하라’는 정보가 나가게 했다. 이것이 타국의 나비텍스를 이용하는 합리적인 경우인데, 러시아는 이해가 안 되는 북한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다. 이는 러시아가 생각하는 친구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우리 정보본부는 이 정보도 포착해냈다. 그 때문에 북한이 1월 27~29일 바다를 향해 일제 사격을 하기 전에 우리 함정을 미리 빼낼 수 있었다. 그때 일부 포탄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왔다. 그에 대해 우리 군은 NLL 남쪽으로 사격하는 형식적인 대응사격만 했다. 그러다 여론의 질타가 거세지자 몇 발을 NLL 너머로 발사했다. 이 사건 후 위협을 느낀 합동참모본부는 적이 쏜 포의 위치를 잡아주는 ‘대(對)포병 레이더’를 백령-연평도에 배치했다(2010년 2월).
그렇게 하고도 북한은 거듭해서 ‘성전’을 선포하며 협박했다. 그 형세가 하도 험악해 우리는 대형 함정을 적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은 섬 그늘에 대기하게 했다. 그것을 지켜본 북한은 2010년 3월 26일, 연어급 잠수정을 침투시켜 CHT-02D 어뢰로 백령도 섬 그늘에 숨어 있는 천안함을 격침시켰다. 교묘한 수로 우리의 뒤통수를 ‘제대로’ 갈긴 것이다.
벌거숭이 對 ‘악으로 깡으로’
천안함 사건의 진실이 밝혀진 후 인민군 5군단장의 협박으로 주춤하긴 했지만, 우리는 보복을 검토했다. 그러나 단독으로 하지 못하고 미국을 불러 훈련하며 모색했다. 그리고 중국을 설득하려 했는데, 뜻밖에도 중국이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후진타오 중국 주석은 상하이 엑스포 축하차 방중한 이명박 대통령은 박대하고, 북한의 김정일은 따로 초청해 환대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미국도 한국의 보복을 원하지 않았다. 미국은 2012년으로 예정된 전작권 전환 시기를 2015년으로 연장해주는 선물만 주고 물러서버렸다. 여기서 이명박 정부는 나가떨어졌다. 진실을 밝혀놓고도 아무것도 못하는 처량한 신세가 돼버린 것. 천암함 사건 직후 정세는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가 전쟁 상태가 되는 것을 원치 않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북한이 이런 메세지를 놓쳤을 리 없다. 한국한테는 최고의 군사동맹인 미국과 최고의 무역 파트너인 중국이 결정적인 시기에 한국을 억눌러주니 마음 놓고 도발해도 된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런 이해가 있었기에 북한은 8개월 뒤 연평도 포격전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이 포격전은 한마디로, 너무너무 정직해서 ‘벌거숭이’가 된 한국과 ‘악으로 깡으로’ 무장한 북한이 대결한 사건이었다.
합참이 연평도 등에서 하는 모든 해상 사격 정보를 상세히 공개해놓은 2010년 11월 16일의 국립해양조사원 ‘항행경보’사이트에 떠 있는 지도
천안함 사건이 일어난 곳에서 실사격 훈련을 재개하는 것이라 북한의 반발이 예상됐다. 합참은 상당한 신경을 썼다. 그러나 정직함만큼은 철저히 유지했다. 1주일 전인 11월 16일 국립해양조사원 항행경보란에 지도까지 첨부한 상세한 해상사격구역을 공개한 것. 이 지도에는 육군, 해군(해병대 포함), 공군, 국방과학연구소, 해경의 훈련구역 이름도 정확히 적혔다.
해양조사원 항행경보란은 누구나 볼 수 있게 열린 공간이니 북한과 중국, 미국도 이 지도를 확인했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내용을 나비텍스로도 방송했으니, 북한은 4군단 포병여단을 개머리해안으로 집결시키는 등의 준비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북한은 사격 첫날인 11월 23일 오전 8시 20분 도전장을 내밀었다. 장성급 군사회담 북측 단장 명의로 “우리(북한) 영해에 대한 포사격이 이뤄질 경우 즉각적인 물리적 조치를 한다”는 통보를 ‘기습적’으로 보내온 것.
누구도 예측 못한 ‘육상 도발’
그때 우리 군 정보부대는 인민군 4군단 포병여단이 장사정포를 개머리 해안에 방열했다는 것을 몰랐다. 미군도 몰랐다. 중대한 ‘정보의 허점’을 보인 것이다. 그러니 탁상공론(卓上空論)이 된 대응이 이어졌다.
합참 작전본부는 각 작전사와 동영상 회의를 했다. 각 작전사란 육군의 1군사·3군사·2작사, 그리고 해작사와 공작사, 해병대사 등을 가리킨다. 이 회의에서는 북한이 NLL 너머로 포탄을 떨어뜨리는 ‘해상도발’을 할 것이라는 예측만 나왔다. 연평도를 향해 포를 쏘는 ‘육상도발’은 생각하지도 못한 것이다. 따라서 북한이 해상도발을 하면 어떻게 대응할지만 결의하고 회의를 마쳤다.
그리고 연평부대에 사격을 지시했다. 해양조사원 항행경보란에는 ‘오후 1시부터 사격한다’고 해놓았는데, 오전부터 사격을 했다. 연평부대 예하 포병중대는 벌컨포와 105㎜ 견인포, K-9 자주포(155㎜)를 갖고 있는데 그중 북한을 가격할 수 있는 것은 K-9뿐이다. 이 부대는 북한의 도발에 대비해 K-9 2문은 열외하고 4문만으로 사격했다. 오후에도 사격 연습을 이어갔다.
그런데 에서처럼 오후 2시 34분부터 북한이 쏜 포탄이 연평도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꿈에도 생각 못한’ 연평도 포격전이 시작된 것. 13분 뒤 포병중대는 K-9 포문의 방향을 돌려 응사에 들어갔다. 그런데 기대했던 대포병 레이더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이 레이더는 정상 가동 중이었지만 적 포격 원점을 잡지 못했다. 이 부대는 적의 포격 원점을 모를 때는 연평도에서 가장 가까운 무도부터 쏜다는 작전계획을 갖고 있었다. 무도에는 북한군 1개 중대가 포진해 있다. K-9 포대는 28분간 무도를 향해 포탄을 날렸다.
합참과 공작사는 해상도발과 함께 북한이 공군기를 침투시킬 것이라는 교과서적인 예측만 했기에, 서해 5도상에 공대공 전투기만 띄워놓았다. 그런데 포격전이 벌어졌으니 적 포격 원점을 때릴 공대지 전투기가 필요했다. 합참은 대지공격 순항미사일인 SLAM-ER을 탑재한 F-15K 출격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아무리 서둘러도 F-15K가 SLAM-ER을 탑재하고 이륙하는 데는 최단 1시간이 걸린다.
그때 인민군 포병이 2차 포격을 퍼부었다. 그제야 대포병 레이더가 제대로 포격 원점을 잡아주었다. 개머리해안으로 포문을 돌린 K-9이 30여 발을 발사해 인민군을 잠재웠다. 그 후 F-15K가 연평도 상공에 날아왔다. 그러나 북한이 더는 사격하지 않았기에 합참은 F-15K를 이용한 포격 원점과 4군단 지휘부에 대한 공격을 지시하지 않았다.
이 포격전으로 이명박 정부는 심각한 내홍 상황에 빠졌다. 청와대에서 강력한 응징을 원했는데 합참이 회피했다는 등의 원성이 터져 나온 것이다. 그러나 합참에서는 ‘F-15K로 4군단 지휘부를 공격하지 않은 것은 잘못한 게 아니다’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정전협정 후 대한민국 영토가 최초로 공격을 받았는데, 청와대와 합참은 서로 완전히 겉돌아버린 것이다. 왜 이렇게 됐는가. 이 문제는 한반도 정전체제와 연결된 것이니 찬찬히 살펴보기로 한다.
연합사 교전규칙 그대로 받아
김영삼 정부 때인 1994년 한국은 평시작전통제권(평작권)을 환수했다. 평시작전통제란 간단히 말하면, 정전 시의 작전을 통제하는 것이다. 정전체제 관리는 유엔사가 담당하는데 유엔사는 껍데기만 남은 조직이기에 연합사가 대행해왔다. 연합사는 정전체제 유지를 제1의 임무, 북한이 정전체제를 깨고 쳐들어오면 작전계획 5027을 가동해 격멸하고 북한 정권을 무너뜨려 정권교체(regime change)하는 것을 제2의 임무로 삼았다.
전쟁은 6·25처럼 인민군의 전면 남침으로 일어날 수도 있지만, 작은 충돌이 확대돼 발생할 수도 있다. 전면 남침은 정전체제가 깨진 것이니 연합사는 전력으로 대응한다. 하지만 작은 충돌이 확대돼 전면전이 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따라서 정전 시에 일어나는 작은 충돌이 전면전으로 비화하지 않도록 복잡한 ‘교전규칙’을 만들어놓았다.
북한이 도발(공격)할 때만 싸우는 것을 ‘(현장) 대응’이라고 한다. 그런데 당한 것이 너무 심해 복수를 해야겠다고 판단하면 그 후 우리도 본때 있게 기습해 적에 큰 타격을 가할 수 있다. 이를 ‘(응징) 보복’이라고 한다. 보복은 ‘건드리면 죽인다’는 결기를 보여주니 대응보다 더 좋은 방어수단이 된다. 대응만으로 국방을 하는 것을 ‘방어’, 보복 능력으로 지키는 것을 ‘억제’라고 한다.
교전규칙은 현장 대응만 하고 응징 보복은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북한의 침입을 막아냈으니 이를 ‘억제’로 표현했다. 보복을 하는 것이 억제인데, 연합사는 대응만 하는 것을 억제라고 규정해버린 것이다. 말장난에 가깝지만 연합사가 이렇게 정의했으니 우리는 그대로 따랐다. 평작권 환수는 연합사를 대신해 우리 합참이 정전체제를 유지하는 것이니, 우리는 연합사가 만든 교전규칙을 토씨 하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수용했다.
이 교전규칙대로라면 그날 우리는 연평부대의 대응사격만으로도 개머리해안에 있는 적 포병여단을 잠재웠고 돌파도 당하지 않았으니 억제한 것이 된다. 반면 F-15K를 띄워 SLAM-ER로 4군단 지휘부를 공격한다면 우리가 새로운 도발을 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합참은 SLAM-ER로 보복하지 않은 것은 교전규칙상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청와대에 있던 예비역 참모들도 같은 판단을 했기에 그날 청와대에서는 억제와 확전방지란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국민은 개머리해안의 북한군이 깨진 것은 보지 못하고 불타는 연평도와 희생당한 우리 국민과 군인에게만 주목했다. 천안함 피침 사건을 기억하는 국민은 “우리 군의 대응이 영 시원찮았다”고 비난했다.
응징 보복 지시 안 한 이명박
그러자 청와대 예비역들의 의견을 수용해 확전방지를 거론했던 이명박 대통령이 여론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더 이상의 액션을 취하지 않은 합참을 비난했다. 그에 대해 합참 측은 ‘응징 보복을 하려면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결심해야 한다. 그런 결심이 없으면 우리는 교전규칙대로 억제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내홍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도 이명박 대통령은 보복을 지시하지 않았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한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과 동급이다. 연합사는 전시에 두 나라 대통령의 전략지시를 받게 돼 있으니, 한국 대통령은 연합사보다 항상 우위에 있다. 따라서 한국 대통령이 지시하면 합참은 연합사 교전규칙을 무시하고 작전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대통령은 끝내 응징 보복을 지시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불만은 청와대 안에서만 맴돈 것이다.
한국이 보복하면 북한이 재보복을 하고, 한국이 재재보복을 하면 전면전이 일어나 상호방위조약 등에 따라 미국이 참전해야 한다. 그때는 연합사가 한미 양국군을 작전통제해야 한다. 따라서 미국은 이 대통령이 합참에 강한 지시를 내리지 않을까 지켜보았다. 그런데도 이 대통령이 움직이지 않자 합참이 결심을 했다. 11월 27일 합참은 “연평도에서 재사격을 하겠다. 그때도 북한이 포격을 하면 바로 따라 들어가 엄청난 보복을 하겠다”고 보고한 것. 이 대통령은 이를 승인했다.
이 대통령은 군 통수권자로서 지시한 게 아니라 아래에서 올라온 결정을 승인하는 나약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리고 훗날 ‘그때 우리 군이 약했다’는 투로 이야기를 하니 군인들은 못마땅해한다. 그때 합참이 올린 계획안은 북한이 우리의 재사격을 방해하는 공격을 하면 포격 원점은 물론이고 지원세력과 4군단 지휘부 등을 총공격한다는 것이었다.
합참은 화력을 보강하기 위해 육군 포병여단이 운용하던 K-9과 구룡 등을 연평도에 잔뜩 보냈다. 그런데 연평도에 들어가 ‘포격전 이후’를 취재하던 기자들이 이를 포착해 크게 보도했다. ‘정직한 한국’의 특성이 다시 노출된 것. 그러자 세계가 시끄러워졌다.
합참은 보이지 않는 준비도 했다. SLAM-ER과 JDAM(합동직격탄) 등을 탑재한 F-15K와 KF-16 전폭기, 해성-2 함대지 순항미사일을 탑재한 이지스구축함 등을 ‘보는 눈이 없는’ 하늘과 바다에서 준비하게 한 것. 그러나 한국 언론 보도로 신경이 곤두선 미국-중국-북한은 자기 정보망으로 이 기동을 포착했을 것이 분명했다.
북한은 기싸움에서 밀릴 수 없다고 판단한 듯 ‘재사격을 하면 좌시하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한반도의 전운이 더욱 짙어진 것이다. 미국이 움직였다. 11월 26일 샤프 연합사령관의 연평도 방문이 시작이었다. 샤프 사령관의 현장 방문을 계기로 한국 합참의 의도를 파악한 미국은 한국의 대응을 유의해서 지켜보았다.
1대 1 설득 나선 미국의 키맨들
그런데 청와대가 국방부 장관 교체를 검토하는 바람에 ‘바람이 빠져’ 응징 준비가 주춤했다. 합참의장 등이 장관 후보로 거론됐으니집중력이 흐트러진 것이다. 12월 4일 이 대통령은 국방부 장관을 교체했다. 그때 정보사는 북한군이 우리의 공격에 대비해 갱도에 들어간 사실을 포착했다. 북한이 준비를 하는 이상 우리도 생존성을 강화해야 했다. 연평도는 좁은 곳이니 밀집된 화력이 생존하려면 어느 정도 준비를 해야 했다. 그 바람에 재사격 날짜를 또 늦췄다.
그때 미국은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한 듯 ‘부드러운 역행(逆行)’에 들어갔다. 게이츠가 회고록에서 밝혔듯 오바마 대통령과 클린턴 국무장관, 게이츠 국방장관, 멀린 합참의장 등이 각각 동급의 한국 상대에게 전화를 걸어온 것. 그러나 한국의 주권을 의식해 강한 반대는 하지 않았다. 그들의 의견은 “한국 군부의 결정은 존중하지만 절대로 오버하지 않도록 한국 정부가 통제해달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명박 대통령은 합참과 미국 사이에 끼이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합참과 거의 대화하지 않았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가동해야 합참의장 등 군 지휘관을 불러 의견을 듣고 지시를 내릴 수 있는데 이를 하지 않은 것. 그런 상태에서 미국의 키맨들이 총출동해 1대 1로 설득하자 이 대통령은 조금씩 약해져갔다.
이때의 상황을 게이츠는 회고록에 ‘균형이 안 맞게’란 뜻의 disproportionately란 단어를 써서 ‘원래 한국의 보복 계획은 군용기와 포화를 동원하는 등 과도하게 공격적(disproportionately aggressive)이었다’라고 적어놓은 것이다. 미국은 정전체제 유지가 최고의 목표이기에, 보복을 하더라도 균형 잡힌(공식적인 용어는 ‘비례성을 갖춘’) 보복을 원했다. 그날 북한이 연평도에 떨어뜨린 포탄과 우리가 무도와 개머리해안에 떨어뜨린 포탄 수는 엇비슷하니 한국은 이미 비례성 있는 보복을 했다는 것이 미국의 판단이었다.
이러한 미국을 중국이 지원하고 나섰다. 중국도 미국처럼 한반도가 현 상태(안정된 분단)로 있는 것을 선호하기에, ‘한국은 북한을 자극해 사태를 악화시키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려 했다. 이를 위해 외교문제를 총책임진 다이빙궈(戴秉國)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이 ‘밀어붙이기’ 식으로 이 대통령을 만나러 왔다(11월 27일). 그러나 미국이 한국을 열심히 설득한다는 것을 알았는지, 엉뚱한 소리만 하고 돌아갔다.
미국과 중국의 공조
중국은 한국만 주저앉혀서는 안 된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서울을 떠난 다이빙궈는 바로 평양을 방문해 북한 지도부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평양은 그의 방북을 단호히 거절했다.
미국은 확실한 도장을 찍고자 했다. 미군 서열 1번이자 미국 대통령의 1급 군사참모인 멀린 합참의장을 12월 8일 서울로 보내 한민구 합참의장과 회담을 하게 한 것. 이는 외형상 미국이 군사적으로 한국을 지원한다는 것을 보이면서, 실제로는 한국의 ‘과잉 대응’을 막아보려는 노력이었다.
미국이 정보·감시 자산을 지원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보복을 하기 어렵다는 것을 아는 한국은 반대급부를 요구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북한이 다시 도발하면 그때는 미군이 한국군의 보복을 적극 돕는다는 약속을 받아내야겠다고 생각한 것. 미국이 이 약속을 이행하면 보복-재보복-재재보복을 거쳐 전면전으로 이어지는 ‘뒤끝’을 없앤다는 효과가 있으니 실리적이다. 게이츠는 두 번이나 도발을 당하고도 이러한 선택을 한 한국이 인상적이었는지 회고록에 ‘(이명박 대통령은) 정신력이 강하고 현실적이고 몹시 친미적이었다’라고 평가해놓았다. ‘몹시’라는 단어를 넣어서.
한국은 미국의 약속을 구체화하기 위해 ‘국지도발대비계획’을 작성하자고 했다. 북이 도발하면 도발 원점은 물론 그들을 지원하고 지휘하는 세력까지 응징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미국은 그렇게 하면 새로운 도발이 된다고 난색을 보였다. 그러다 지난해 2월 12일 북한이 3차 핵실험에 성공하자 방침을 바꿔 한국의 계획에 동의했다. 그해 3월 22일 셔먼 연합사령관은 정승조 합참의장과 함께 이 계획에 서명했다.
멀린 의장의 방한으로 한국을 어느 정도 주저앉힌 미국은 중국에도 제 역할을 하라고 주문했다. 그제야 북한은 문을 열었다. 멀린 의장의 방한 다음 날인 2010년 12월 9일 다이빙궈의 방북을 허용한 것. 이는 북한이‘한국이 미국과 협조하면 우리는 중국과 협조한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의도로 추정됐다.
그날의 다이빙궈-김정일 회담에 대해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양측은 양국 관계와 한반도 정세에 대해 솔직하고 깊이 있는 대화를 통해 중요한 합의를 이뤘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접견에서는 조·중 두 나라 친선협조관계를 더욱 공고히 발전시킬 방안과 호상 관심사인 일련의 문제들에 대한 담화가 진행됐다”고만 전했다. 이는 북한이 중국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음을 보이기 위한 듯 베이징으로 돌아온 다이빙궈는 다음 날(12월 10일) 주중 한국대사를 불러 방북 회담 내용을 설명했다. 게이츠는 이러한 중국의 노력이 고마웠는지 ‘중국도 북한 지도부를 상대로 상황을 누그러뜨리려 노력했다’고 회고록에 밝혀놓은 것이다. 이로써 한국의 보복 준비는 더 힘이 떨어져버렸다. 그러나 준비한 것을 물릴 수는 없어 12월 20일께 사격훈련을 하겠다고 밝혔다. 갱도생활을 이어가며 유사시에 대비하던 북한은 한국의 변화를 반신반의하는 듯했다.
재사격 후 갱도서 나온 북한군
12월 18일 북한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를 통해 ‘북침을 겨냥한 사격훈련‘이라는 제목으로 “괴뢰패당이 연평도 포격 사건을 일으킨 장소에서 또다시 포사격 훈련을 하겠다고 떠드는 것은 조선반도를 전쟁으로 밀어 넣으려는 군사적 도발”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친구’인 러시아를 통해 한 가지 쇼를 더 벌였다. 12월 19일 러시아로 하여금 ‘연평도 사태 후 긴장이 고조되는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유엔 안보리 긴급회의를 소집하게 한 것.
12월 20일이 밝아왔다. 그런데 안개가 짙어 사격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 국민뿐만 아니라 북한을 포함한 여러 나라가 지켜보고 있어 안 할 수도 없었다. 해무(海霧)는 오후가 돼도 걷히지 않았다. 합참은 사격을 지시했다. 그런데 국민 예측과 달리 싱거운 사격에 그쳤다. 가장 핵심인 K-9은 1문만 동원해 4발을 쏘는 것으로 끝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합참은 사거리가 긴 K-9은 북한을 때리기 위해 1문만 사격 훈련에 참가시킨 것이다. 대신 같은 155㎜ 자주포이지만 사거리가 짧고 정확도가 떨어지는 K-55로는 많은 사격을 하게 했다. 이 의도를 우리 국민은 오해했다.
두 시간 후 북한이 반응을 보였다. 조선중앙통신은 “우리 군대의 자위적인 2차·3차 대응타격이 두려워, 계획했던 사격수역과 탄착점까지 슬그머니 변경하고 지난 11월 23일 군사적 도발 때 쓰다 남은 포탄이나 날리면서 소리만 요란하게 낸 천하 비겁쟁이들의 유치한 불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민군 최고사령부 보도를 발표했다. 그리고 슬그머니 갱도에서 기어나왔다.
게이츠 회고록 발간을 계기로 추적한 연평도 사태의 진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의 정전 상태가 흔들린다 싶으면 적극 개입해 원상복구를 시도한다. 이는 두 나라가 한반도의 통일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국이 미국과 박자를 맞추면 북한은 러시아를 파트너로 활용한다는 것도 보인다. 북한은 정식 대결로는 우리를 이길 수 없으니, 별의별 꼼수를 동원한다는 것도 확인됐다. 위기가 고조되면 북한은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을 상대로도 맞짱 쇼를 벌인다.
북한은 음흉하게 뒤통수치기를 하는데 우리는 벌거숭이로 대응한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한국은 너무 투명해서 실력발휘를 못한다는 점도 보인다. 평작권 환수의 한계와 교전규칙의 맹점도 보인다. 그리고 북한이 핵과 장거리 미사일을 휘두르면 한국은 모든 것을 미국에 맡기고 따라가야 한다. 그러니 한국은 미국에 종속된다. 북한은 중국에 구박을 받지만, 때로는 중국을 제어하는 능력을 보인다. 미국은 한국을 제어하지만 중국은 북한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날 MB는 고립돼 있었다
이 많은 문제점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거듭해서 도발을 당해도 우리는 제대로 보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한국은 ‘언감생심’ 통일을 기대한다.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통일은 대박’이라고 했지만 이 난마(亂麻)를 돌파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난마를 끊어낼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것은 ‘김칫국부터 마신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만 이런 제약을 받는 것일까. 9·11테러를 돌이켜보면 미국도 같은 제약을 받는 것이 확인된다. 미국은 국방정보를 우리보다 많이 공개한다. 우리 대통령은 여성이 아닌 한 군대를 갔다 온다(이명박 대통령은 미필). 미국은 모병제여서 대개 군 경험이 없는 인물 중에서 대통령이 나온다. 그런데도 위기가 발생하면 결연히 행동한다. 결정적인 위기 때 미국 대통령은 군을 통수하는데 왜 우리는 하지 못할까.
취재에 응한 소식통들은 NSC(국가안전보장회의)의 능력 차이를 들었다. 한 예비역 장성은 “우리는 공은 열심히 차지만 그 선수들을 부리는 작전은 연구하지 않는 축구팀”이라고 말했다. 합참 이하의 군은 몇 가지 허점을 보이긴 하지만 많은 훈련을 한다. 그런데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은 군을 부리는 연습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연습을 해본 적이 없으니 위기가 닥쳤을 때 대통령은 얼어붙어, 첨단 무기를 쌓아놓고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미국 대통령도 그러한 연습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위기가 발생하면 대응을 하는데, 이는 NSC가 해야 할 일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헌법 기관인 NSC를 형식적으로만 유지하고 전혀 활용하지 않았다. 미국은 활용한다. 미국 NSC에는 합참의장이 참여해 모든 예측 가능한 위기에 대응책을 준비한다. 그리고 실제 위기가 발생하면 대통령에게 적절한 대응방안을 제시한다.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 때 우리 대통령과 합참의장은 이러한 커넥션을 전혀 갖지 못했다. 안보위기가 발생했는데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군과 연결되지 못한 것이다. 양쪽을 이어줬어야 할 국방부 장관과 청와대의 참모들도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바쁘게 움직였지만 가장 중요한 임무를 하지 못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박근혜 정부에서 김장수 안보실장이 구축한 NSC 체제에 주목한다. 이 NSC가 유사시 군과 대통령을 바로 연결할 수 있는 체제인지 반문하는 것이다. 김 실장이 구축한 NSC는 외교부와 통일부가 주축이다. 합참의장 등 군 지휘관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매우 작아 보인다.
고르디온의 매듭
연평도가 포격당하던 그날 이명박 대통령은 고립돼 있었다. 군 통수권자인 그는 군을 바로 지휘하지 않았다. 호랑이를 데리고 있으면서 고양이로도 부리지 못한 것이다. 국방부 장관은 국회에 출석하고 난 후 이 대통령을 만났다. 결정적인 위기에 대통령이 군을 지휘하지 못했다는 것이 한국의 진짜 위기다. 이런 사태를 막으려면 제대로 된 NSC가 있어야 한다.
2010년 이명박 대통령이 직면했던 위기가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닥칠 수 있다. 김장수 실장의 NSC는 그 위기를 돌파할 지혜가 있을까. 그리고 대통령의 결단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NSC가 제 구실을 한다면 지금의 미국 국방부 장관인 척 헤이글은 훗날 회고록에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은 고르디온의 매듭을 잘랐다’는 기록을 남길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누구도 풀지 못한다는 ‘고르디온의 매듭’을 단칼에 잘라 풀어낸 위대한 지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