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변한 것 같다. 양국은 체제 차이와 북한 변수에도 꽤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이는 어렵지 않게 증명된다. 시진핑(習近平·61) 중국 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은 2월 초 박근혜 대통령의 62회 생일을 축하하는 친필 서신을 공식적으로 보냈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중국은 1월 말엔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역에 안중근기념관을 개관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안중근 표지석 설치 요청에 통 크게 화답한 것이다. 이를 보면 양국 관계에 새 지평이 열린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지금의 중국 정권은 ‘친한(親韓) 정권’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다. 더불어 중국의 가슴과 머리에 있는 북한의 자리가 예전만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현 정권이 이처럼 한국에 비교적 우호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괜히 한국이 좋아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중요성이 부쩍 커진 점과 무관하지 않다. 여기에다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이 중국의 안보를 위협한다’는 고정관념이 많이 흐려진 점도 영향을 준다. 한국을 ‘대화가 되고 신뢰할만한 이웃 국가’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과 달리 주변국에 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문화적으로 세련된 나라’로 한국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그리기도 한다. 또 이념보다는 당과 국가의 발전과 생존에 더 가치를 부여하는 중국 지도부의 실용주의 스타일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 한국과 잘 지내는 것이 여러 면에서 자국에 훨씬 좋다는 자각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너무 이념적이면 최고 레벨 못 올라”
시진핑 정권이 이처럼 이전의 중국 정권과는 달리 한국에 유연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시진핑 정권의 면면을 살펴보기로 하자. 시진핑 정권의 핵심인사들은 시 주석과 7명의 당 정치국 상무위원, 당정 최고 지도부, 인민해방군 수뇌부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권력 서열 1위인 시 주석의 경우, 그는 1949년 공산 중국 건국 이후에 태어난 이른바 당 제5세대로 불린다. 당정 원로들의 후세를 의미하는 태자당(太子黨)은 그의 정치적 고향이다. 그는 1953년 부총리를 지낸 시중쉰(習仲勳)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 아버지의 후광을 전혀 입지 못했다. 태자당으로 누려야 할 특권도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었다. 1966년 발발한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한 채 고향인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의 량자허(梁家河)로 내려가 무려 7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은인자중의 노동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노동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만들었다. 밑바닥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들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경제 전반에 대해서도 눈을 뜨도록 만들었다. 그가 명문 칭화(淸華)대학을 졸업한 다음 1983년부터 2007년까지 24년 동안 허베이(河北), 푸젠(福建), 저장(浙江)성과 상하이(上海)시 등을 옮겨 다니며 성공한 지방 지도자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이때의 경험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실용주의적인 성향이 강하다. 사회주의 근본주의를 추구하는 강경 좌파라고 하기 어렵다. 비리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 중인 보시라이(薄熙來·65) 전 충칭(重慶)시 서기가 재임 시절 공산혁명 노래 부르기를 주창한 것과 비교된다. 그러나 이런 시진핑도 당과 국가가 이슈가 되면 확 달라진다. 어떻게 보면 다소 국수주의적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중궈멍(中國夢·부강한 중국이 되고자 하는 꿈)’이나 ‘위저우멍(宇宙夢·우주 강국을 향한 꿈)’이라는 상투적 용어를 달고 다닌다. 이 역시 그의 ‘당과 국가 우선’ 경향성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