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소 | 동아일보 충정로사옥 회의실
● 패 널 |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 사회·정리 |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한국 정치사에 ‘안철수 현상’이 등장한 지 3년이 지났다. 3년 동안 총선과 대통령선거, 지방선거 등 세 차례의 전국 선거가 치러졌다. 의회, 중앙, 지방권력이 모두 교체된 것. 성공한 최고경영인(CEO)이자 대학교수로 폭발적인 국민적 지지를 이끌어낸 안철수는 그 사이 교수에서 대선 예비후보자, 국회의원, 야당 공동대표로 변신을 거듭하며 정치권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7·30 재보선 이후 선거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넉 달 만에 당 대표에서 물러나 평당원으로 돌아갔다.
3년 전 혜성처럼 떠오른 안철수 현상은 이대로 유성처럼 스러질 것인가, 와신상담 끝에 항성으로 다시 빛날 것인가. 3인의 논객이 파헤친 안철수 신드롬의 실체.
사회 ‘안철수 현상’이 나타난 지 3년이 지났습니다. 안철수 현상 이후 한국 정치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고 봅니까.
김호기 안철수 현상에 담긴 핵심 가치는 기성 정치에 대한 시민사회의 거부, 새로운 정치세력 등장에 대한 열망이었습니다. 그런 열망이 안철수 개인에게 투영된 것이죠. 정치 전면에 나섰던 정치인 안철수가 (7·30 재보선 이후) 후면으로 물러나 상당한 어려움에 처한 건 분명하지만, 그의 나이로 보나 여러 가지를 고려할 때 정치인으로서 완전히 실패했다고 단언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기성 정치를 거부하고 새로운 정치를 열망하는 시민사회의 흐름이 과거보다는 약해졌어도 여전히 존재하니까요.
시대의 포르투나

이철희 안철수 현상은 안철수가 만들어낸, 안철수에 의한 현상은 아니었죠. 안철수는 하나의 매개였죠. 1971년 대선 때 김대중 대통령후보가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센세이셔널한 바람을 일으켰던 것과는 상황이 달라요. 그때는 정치인이 흐름을 주도했다면 안철수 현상은 (국민 사이에) 뭔가 웅크리고 있던 흐름이 안철수라는 매개를 만나 폭발한 것이니까요. 안철수 현상 이후 기득권 포기 등 여러 변화가 있었으니 한국 정치가 많이 바뀐 건 사실이죠. 그럼에도 안철수 현상이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를 따진다면 저는 실패했다고 봅니다.
(국민 사이에) 새롭게 분출한 흐름을 해석해서 특정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이 리더의 몫인데, 결정적으로 지난 대선 때 안철수라는 정치인이 보여준 (안철수 현상에 대한) 해석은 크게 잘못됐다고 봐요. 이후에는 기성 정치세력이 안철수 현상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왜곡하는 쪽으로 몰고 갔죠. 그러다보니 안철수 현상을 만들어낸 에너지가 진취적 에너지로 전환되지 못해 결실을 보지 못했죠.
이제 (안철수 현상의) 한 라운드는 끝났다고 봅니다. 지난 대선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한 라운드가 끝났고, 앞으로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열망이 어디로 투영될지가 2라운드의 관건이 되겠죠.
윤 정치에 투신하기 전, 안철수 의원은 한국 사회가 갈망해온 몇 가지 덕목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투명하고 깨끗한 성공, 공공성, 시대의 멘토로서 따뜻한 소통. 그런 의미에서 안 의원은 우리 사회가 배출한 귀한 인재였다고 봐요. 문제는 정치권에 투신한 이후죠. 의료인이나 기업인, 대학교수로 성공하는 것과 정치권에서 성공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거든요. 이철희 소장께선 정치인이 된 안철수가 안철수 현상을 잘못 해석했다고 하셨는데, 저는 그가 잘못 해석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시민과 민중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선 정확하게 해석했는데, 현실 정치인이 된 후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했고 준비도 전혀 돼 있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사회 안철수 현상 이후 오히려 여당이 크게 변했습니다. 당명도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상징색도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바꿨죠. 박근혜 비대위는 김종인, 이상돈, 이준석 비대위원을 임명해 노·장·청의 조화를 꾀했고요. 그런 점에서 안철수 현상으로 드러난 시대적 요구를 새누리당이 더 적극적으로 수용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김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과도한 해석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