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력 대통령 후보인 안철수 의원이 평당원으로 돌아갔다.
- 어쩌면 그에겐 더 큰 선택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
- 권력욕이 없어 국민으로부터 사랑받지만 정치에 실패한 군자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권력욕이 있어 군자가 아닌, 그래서 사랑받지 못하는 성공한 정치인으로 변신할 것인가.
7월 31일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사퇴를 표명한 뒤 국회를 떠난 안철수 의원.
정치는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새정치민주연합의 대표에서 물러난 안철수 의원이 정치적으로 치명타를 입었고 예전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중론이다. 만약 이대로 안철수 의원이 정치적으로 몰락한다면, 아마 대한민국 정치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드라마틱한 등장과 가장 드라마틱한 퇴장을 한 정치인 중 한 명으로 기억될 것이다.
안 의원이 워낙 혜성같이 등장해 엄청난 인기를 누렸기에 ‘안철수 현상’이라고까지 불리며 수많은 논란과 해석을 낳았다. 매우 예외적인 안철수 현상에 대한 설명으로 흔히 기존 정치에 대한 환멸, 변화와 새로운 정치에 대한 요구, 개인 안철수의 성공신화에 의한 후광효과, 청년 토크 콘서트의 인기 등과 같은 다양한 사후 분석이 있었다. 그 많은 이유가 함께 모여 만들어냈기에 한국의 정치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환경적이고 피상적인 상황적 요인들로 설명하기에는 안철수 현상과 관련된 너무나 많은 본질적 질문이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교과서적인 롤모델
정치인들은 안철수 현상에 대해 정치적 관점에서 그 역할과 의미를 논의해왔다. 하지만 국민이, 특히 안 의원을 지지하거나 지지했던 많은 사람이 과연 그를 정치인으로 인식하느냐가 의문시된다. 많은 사람이 안철수라는 한 개인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졌을지 몰라도 정치적인, 특히 정치공학적인 안철수의 의미를 그리 크게 기대하거나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안철수라는 개인에게서 바로 우리 사회가 갈망하던 ‘능력 있는 군자’라는 환상을 좇았을 수 있다. 한국인은 이상적인 리더로 아버지와 같은 군자상을 추구한다. 스스로를 위하는 게 아니라 남을 위하고 더 큰 사회적 이익을 위해 자신의 욕심과 이득을 포기하고, 사사로운 감정이나 관계가 아닌 원칙과 사회적 규범을 중시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아끼는 따뜻하고 관대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유달리 좋아한다. 이런 사람을 싫어하는 사회와 사람들이 어느 세계에 있겠냐마는, 가족주의적이고 관계주의적인 한국인의 문화심리적 특성은 이런 리더에 대해 유달리 강하게 집착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한국 사회의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면 그러한 군자는 성공하기 힘들다. 타인을 배려하고 양보하며 사익보다는 공익을 우선시하고 욕심보다는 원칙을 따르며 살아온 이들이 세속적인 기준으로 성공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역사였고 세상이었다.
지난 50년 동안 세계 역사상 전례가 없는 경제 발전을 이루어온 대한민국은 그러한 발전의 대가로 원칙과 명예, 배려, 규범을 다소 외면해왔고, 그 과정에서 그런 군자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그래서 많은 한국 사람은 마음속 한 곳에 그런 가치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과 후회, 그리고 분노와 갈망을 안고 있다. 경제 발전의 과정에서 많은 기성세대는 원칙을 지키고 손해를 보느니, 편법과 비겁을 선택해왔다. 배려와 양보보다는 경쟁과 승리를 추구해왔다. 이들은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은 원치 않았고 마음은 불편하지만 가족을 위해, 회사를 위해, 국가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해왔다.
하지만 경제가 발전하고 교육이 보편화하고 사회적 욕구와 기준이 다양해지면서 이제는 사회의 원칙과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젊은 세대는 그런 가치를 당연히 지키면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고 배웠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다만 그들의 부모 세대에서 그런 예를 찾기 힘들어 실망했고, 그들의 부모는 여전히 (최소한 암묵적으로) 과거와 같은 방법으로 경쟁과 생존에서 살아남기를 기대하는 이중성에 혼란스러워한다. 이런 혼돈의 시기에 안철수라는 존재는 바로 그런 교과서적인 롤모델로 등장했다.
능력 있는 군자?
안 의원이 실제 인격적으로 군자의 덕목을 갖추었는지, 세속적으로 성공했는지 (이 점은 상대적으로 명확해 보이지만)는 그를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필자가 확인할 길이 없고 사회심리학자인 필자의 관심사도 아니다. 하지만 일반 국민, 특히 최소한 안 의원을 지지하는 국민에게 그는 바로 군자처럼 살면서도 세속적인 성공을 이루어낸 영웅이었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세상에 보여주는 존재였을 것이다.
안 의원은 서울대 의과대학을 다녔고 의사가 됐다. 그리고 소프트웨어 산업에 선구자적으로 뛰어들어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프로그램을 개발해 엄청난 벤처부자가 된다. 서울대 의대 입학, 의사고시 합격,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 등과 같은 성공의 경로는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지탄받는 특혜나 편법이 통할 여지가 없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부의 상속, 뇌물, 부패, 부당거래, 갑을관계 등의 불법과 탈법 뉴스에 지치고, 현실에서 그러한 유혹에 시달리고, 그러한 비리에 피해를 경험해온 국민에게 안 의원은 그런 것이 없어도 세속적인 성공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인 존재처럼 인식됐을 것이다.
비리 없이도 다양한 영역에서 성공을 거두어온 능력남 안철수 의원이 ‘군자’의 반열에 오르는 사건은 바로 서울시장 후보 양보의 순간이었다. 한국 사회의 신뢰도를 묻는 조사에서 가장 점수가 낮은 집단은 언제나 사법 당국과 정치인이다. 그러한 인식이 합당한지와 상관없이 일반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정치인은 탐욕스럽고 자신의 이익만을 고려하고 국민이나 국가, 공익은 안중에도 없다고 국민 대다수가 인식한다는 증거다. 대기업, 사주, 자본가와 같은 가진 자에 대한 인식도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런 한국 사회에서 자본가이며 정치인인 안 의원이 아무런 조건 없이 서울시장후보 자리를 박원순 후보에게 양보하는, 그것도 자신의 지지율이 더 높은데도 포기하는 모습은 신선했다. 바로 가질 수 있는데도, 가져도 되는데도, 모두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홀연히 포기하는 모습은 바로 국민이 원하는 군자의 모습이었다. 배려와 양보의 표상으로 부각된 서울시장후보 양보 사건은 과거에 백신 프로그램을 무료로 배포했던 행동, 기득권(의사로서, 성공한 사업가로서)을 포기한 경력 등과 함께 국민에게 일관성으로 지각됐을 것이다.
사람의 행동에 대한 관찰이 그 사람에 대한 성격이나 기질적, 또는 인격적 성향으로 연결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일관성이다. 병을 고쳐주는 의사라는 직업과 게임이나 상업적인 프로그램이 아닌 컴퓨터에 해로운 바이러스를 없애주는 백신 프로그램의 개발자라는 공익적 이미지도 그런 일관성을 더욱 부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안 의원은 많은 사람에게 능력 있는 군자가 됐고, 바로 이 시대가 갈망하는 롤모델이 될 수 있었다.
선택은 포기하는 것
2011년 9월,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 양보 의사를 밝힌 뒤 박원순 변호사와 악수하는 안철수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
선택은 흔히 ‘취할 수 있는 여러 개 가운데 필요하거나 적절한 것을 뽑는 행위’라고 정의된다. 이런 정의는 맞기도 하지만 사실 틀린 것이다. 일반적으로 여러 개 중 하나를 고르는 선택 행위의 결과는 하나를 얻지만 동시에 반드시 그 이상의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결과를 수반한다. 짜장면과 짬뽕을 놓고 골라야 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포기하게 된다. 편의점의 수많은 음료수 앞에서 하나를 고르는 순간 수십 개의 다른 음료수는 포기해야 한다. 결혼하는 순간 이 세상의 30억이 넘는 이성을 포기하게 된다. 대학입시에서 6개의 지원서를 내는 순간 지원하지 않은 수많은 대학에 진학할 기회를 포기하게 된다.
현실에선 포기하는 것이 훨씬 더 많고 크다. 그래서 원래 선택은 갖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선택의 과정에서 가질 것에만 목숨을 건다. 그러니 당연히 포기해야 하는 것들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포기가 본질인 선택은 한국인의 심리적 특성에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다. 서양의 철학적 관점은 일반적으로 대립적이고 직선적이며 명시적이다. 선과 악, 천당과 지옥, 천사와 악마, 빛과 어둠 등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대립적인 개념으로 만들어 서로 경쟁해 한쪽이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철학적 구조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서양의 동화나 영화도 대부분 명확한 선의 존재와 악의 존재 간의 갈등을 그린다.
진실을 규명한다는 현대과학적 사고와 방법도 이러한 정신체계적 선호를 반영한 것이다. 어찌 보면 융합이니 통섭과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학문적 시류에 대한 반박인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와 같은 논란은 바로 서구적 과학적 정신세계와 그 반대 세력의 충돌로 볼 수 있다. 반대 세력의 사상적 관점은 훨씬 더 동양적 철학에 가깝다. 일반적으로 서양에서 대립 개념으로 보는 것들이 동양에서는 더 조화롭고 유기적으로 상위 수준에서 통합되며, 결투를 통해 한쪽만이 생존하는 것보다 서로 보완적이고 의존적인 관계로 인식된다.
사회문화적으로 유교적 배경을 가진 한국인 또한 비슷한 사상적 배경을 가졌다. 어릴 때부터 항상 철학적으로는 중용의 가치를 배우고 융화, 화합을 추구하도록 교육받는다. 심지어 국기인 태극기의 가운데 있는 태극 문양도 직선이 아닌 S자 모양의 곡선으로 음과 양의 조화를 상징하고, 4괘도 하늘, 땅, 물, 불의 조화와 보완이다.
어떤 극단적 치우침보다는, 한쪽이 이기고 다른 쪽이 완전히 패배하는 결과보다는,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하나를 포기하는 것보다는, 항상 ‘치우치지 마라, 그것만 하지 말고 이것도 해라, 놓치는 것이 없는지 봐라, 이겨도 너무 이기지 마라, 이겨도 너무 기뻐하지 마라, 이건 잘했는데 저건 왜 못했니’와 같이 잃어버리는 것이 없도록 교육받는다. 이런 문화적이고 사상적인 배경은 결국 한국인으로 하여금 포기하는 것은 나쁘고, 포기하기 싫어하고, 더구나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을 가지게끔 만든다. 더구나 현실에서 선택하면서 뭔가를 포기하면서도, 자신은 포기하지 않았다는 착각에 빠지게도 만든다.
조화로운 비극
안 의원은 바로 선택하고 포기하기 싫어하는 한국인의 특성에 가장 잘 맞는 상징적 인물로 보였을 것이다. 사실 안 의원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한국인의 포기하기 싫어하는 특성은 이미 한국 정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정치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대통령 직선제가 된 이후 한국 선거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일반적으로 국민이 연속되는 선거를 통해 어느 한 정치 세력에 연속적인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선거에서 여당이나 야당이 성공하면 일반적으로 다음 선거는 반대쪽이 성공하는 경향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결과는 한쪽의 독주를 견제하는, 또는 지난 선거에서 승리한 쪽에 경고하는, 그리고 균형 잡힌 정책을 실시하라는 국민의 절묘한 선택이라는 해석이 뒤따른다.
하지만 이 절묘한 선택은 인간의 일관성 면에서 보면 좀 이상하다. 한 시기에 국민의 다수가 진보건 보수건 어떤 후보나 정당을 지지했다는 것은 그 후보나 정당이 주장하는 정치적 지향점이나 정책을 선호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비슷한 시기에 실시된 선거에도 그러한 국민 다수의 선호가 반영돼야 한다. 즉 대통령에 진보주의자가 당선되면 뒤따르는 국회의원선거도 진보세력이 승리해야 하고, 대통령에 보수주의자가 당선되면 국회의원선거에서도 보수세력이 승리해야 한다. 왜? 그게 국민이 선호하는 국정운영과 정책의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고, 그래야 정책의 일관성이 생긴다.
하지만 한국인은 그런 일관성이나 정책의 효율성보다는 조화를 택하고, 혹시 한쪽으로 치우쳐서 잃어버리는 것이 있을까봐 견제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에 진보 대통령에 보수 다수당 또는 보수 대통령에 진보 다수당을 갖는 조화로운 비극을 경험해왔다. 사실 이러한 선거 결과가 비극적인 이유는 국민이 그렇게 싫어하는 발목잡기를 하기 딱 좋은 구조이기 때문이다. 일부러 발목잡기를 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적 소신을 따르다보면 그냥 발목잡기가 되는 환상의 조합인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승자를 원하지 않는다. 패자가 없는 승자를 원한다. 그래서 우리의 정치와 정책은 항상 죽도 밥도 아닌 그 무엇인가가 되고, 그 무엇을 만든 국민은 나중에 누가 밥을 망쳤느냐고, 누가 죽을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되묻는 정치 코미디를 반복해왔다.
혼혈의 성공
2014년 7월 30일 재보선의 결과와 같이 최근 몇 년간 치러진 선거에서 소위 진보 세력이 이끄는 정당(민주당, 새정치민주연합)은 연이어 패배했다. 앞에서 얘기한 견제세력을 만드는 절묘한 국민의 선택은 지난 몇 년 동안 볼 수 없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2007년 대선 이후 대부분의 선거에서 보수진영의 당이 쭉 승리해왔다. 정치공학적으로 매우 이례적이라고 얘기하며, 그 이유로 ‘선거의 여왕’이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역할을 흔히 강조해왔다. 다양한 정치공학적인 논리와 설명도 있겠지만, 포기를 싫어하는 한국인의 문화적 심리 특성을 고려해도 새누리당의 성공과 새정치민주연합의 실패는 최소한 일정 부분 설명된다.
기본적으로 현재의 새누리당은 혼혈이다. 새누리당에는 사실 한 당에 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인생행로를 거쳐온 사람과 다양한 정치지향점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공존하고 더구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재벌가 출신에 재산이 1조 원이 넘는 정몽준에서부터 전문경영인 출신의 이명박, 농업고등학교 출신의 김태호, 나경원과 조윤선 등의 쟁쟁한 여성 엘리트들, 젊은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에 저항한 진보 전사였던 김문수,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쭉 있어온 극보수 어르신들까지. 배경이 너무나도 다른 이 수많은 정치인이 그 안에서 조화를 이룬다.
더구나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부터 보수당에는 항상 자체 견제 세력이 있었다. 이 전 대통령 때는 박근혜 대통령이 강력한 견제 세력으로 갈등을 빚었다. 실제 세종시 이전과 같은 굵직굵직한 국가정책을 두고 여당과 야당의 갈등보다 여당 내의 갈등이 더 크게 부각되기도 했다. 지금의 새누리당에도 끊임없이 친박과 비박이라는 이름으로 갈등이 진행 중이며, 재미있게도 비박이라는 김무성 의원이 대표최고위원이 되면서 여당 내 야당처럼 인식된다.
이렇게 다양한 세력의 갈등이 상존하는 새누리당은 그 자체가 굳이 뭔가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이미지를 국민에게 인식시켰을지 모른다. 박 대통령이 당선될 때 주요 공약은 보수 정당답지 않게 ‘복지’였다. 지금도 성장과 복지를 놓고 새누리당과 보수진영 내에서 갈등이 지속된다. 어찌 보면 정책이 갈팡질팡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많은 보수층 인사가 새누리당이 보수답지 않다고 얘기하는 반면 또 다른 사람들은 새누리당이 보수적이라고 얘기한다. 성장과 복지에 대한 갈등은 원래 여당과 야당 간에 빚어지게 마련인데, 여당 내에서 자기들끼리 충돌하는 것은 결국 야당이 없어도 된다는 얘기가 될 수 있다. 성장을 추구하는 보수적 아버지와 복지를 추구하는 진보적 어머니 사이의 혼혈인 새누리당은 포기를 싫어하는 한국인에게 짬짜면과 같은 절묘한 선택일지 모른다.
순혈의 실패
7월14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1위를 차지한 김무성 신임 당대표가(오른쪽) 경쟁자였던 서청원 의원을 포옹했다.
이런 집단사고는 주어진 정보에 대한 종합적인 사고나 균형 잡힌 논의를 막아 결국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수 없게 만든다. 더구나 이런 과정에서 그 구성원들은 반대 의견을 냈을 때의 집단적 비판을 무서워하게 돼 점점 더 극단적인 순혈주의적 특성을 띠게 되고 더 폐쇄적인 행동을 보인다. 이런 집단사고 현상은 최근 새정치민주연합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보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집단사고를 통한 순혈주의는 결국 선택을 싫어하는 한국인에게는 피하고 싶은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아마 민주당은 안철수 의원의 새정치연합과 통합하면서 안 의원이 가진 중도적 이미지와 중도 세력의 지지를 기대했을 것이다. 사실 민주당과 통합 이전 안 의원의 이미지는 중도였다. 누가 봐도 정치적으로 보수적일 것 같은 배경에 보수를 비판하는 언 행과 그렇다고 딱히 진보 세력과 손을 잡지도 않는 그를 보수도 진보도 아닌 중도세력으로 많은 지지자는 인식했다. 게다가 안 의원을 지지하지 않는 많은 사람이 비난했던, 안 의원의 모호하고 추상적인 언어적 표현은 사실 그가 중도적이고 통합적인 이미지를 갖는 데 꼭 필요한 요소였다.
모든 정책은 구체적인 각론으로 들어가면 얻는 것과 잃는 것이 생기고 명확해진다. 그런 선택의 상황에서 그 정치적 지향점에 따라 서로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 정치적 결정이다. 하지만 각론이 아닌 상위의 수준에서 좀 더 거시적이고 궁극적인 담론을 얘기한다면,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가치들을 굳이 충돌시키지 않고도 논의가 가능하다. 그 어떤 정치적 지향점도 결국 궁극적인 목적은 친국민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원론적으로 추상적이고 모호한 담론에는 선택과 포기가 존재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국민은 안 의원의 원론적인 얘기에 반대할 이유도 전혀 없고, 실제로 선택을 하지 않은 안 의원을 싫어해도 ‘왜 그런 선택을 했느냐’고 반대할 거리도 없었다.
군자냐, 성공한 정치인이냐
이런 안 의원의 강점은 민주당과 통합이라는 선택을 하는 순간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 안 의원이 선택하는 순간, 국민도 포기할 게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당과의 통합부터 실패한 재보선까지의 과정에서 안 의원이 입은 가장 큰 손실은 아마 중도적 이미지보다 군자적 이미지일지 모른다. 지지자들이 열광하는 안철수 현상의 중심에는 개인적 욕심과 사익을 초월하는 군자적 인성이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과 통합한 이유, 새정치민주연합에서의 역할, 공천 과정에서 빚어진 갈등을 통해 안 의원이 과연 개인적 영달이나 야망을 초월한 사람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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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얘기한다. 권력욕만으로 정치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막아야 하지만, 권력욕이 없는 사람에게 정치는 결코 어울리지도 않고 성공하기도 힘들다고. 여전히 포기를 싫어하는 국민으로부터 사랑받은 안 의원에게 이제 더 큰 선택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권력욕이 없어 사랑받는, 하지만 정치에 실패한 군자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권력욕이 있어 군자가 아닌, 그래서 사랑받지 못하는 성공한 정치인으로 변신할 것인가. 근데 이게 가능은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