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래사냥’은 퇴폐와 자학이 넘치던 안개 같은 시대에, 젊은이들의 좌절과 불안한 삶을 풍자적으로 묘사했다. 청바지 뒷주머니에 타임지를 꽂고 다니던 그 시절의 청춘들을 들뜨게 한 국민가요다.
-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외로움과 슬픔만이 가득 차는 올가을, 사라지는 모든 것을 생각하며 동해바다로 떠나볼까.
동해 바닷가를 옆에 끼고 나란히 난 철도와 국도에 기차와 트럭이 엇갈리며 달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열차 노선이고 국도라고 한다.
까까머리 10대 시절 국어 시간, 선생님이 느닷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순간 교실 안엔 와~ 웃음이 터졌다. 잠시 후 선생님은 “아니, 소설은 입시 땜에 못 읽으니 영화라도 형님 옷 빌려 입고 봐야지” 하고 넘어갔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그랬다.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를 보러 갔다가 학생 주임 선생에게 귓바퀴 잡힌 채 끌려 나오던 그 시절, 나는 영화 여주인공 안인숙의 중요 부위는 보질 못했지만, 선생님의 충격적인 말씀에 최인호의 소설 ‘별들의 고향’과 그것을 원작으로 한 영화 ‘별들의 고향’이 그 시대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는 것은 확실하게 알았다. 소설은 당연히 곧바로 읽었지만 영화는 극장에선 보지 못하고 스무 살이 넘어 어찌어찌해서 비디오로 본 기억이 남아 있다.
20대, 내가 가장 떨리는 가슴으로 읽은 소설은 역시 최인호의 ‘겨울 나그네’였다. 1984년 어느 일간지에 연재된 소설은 대학생이던 나와 주인공들의 세대가 맞물리면서 묘한 동질감을 안겨줬다. 우울했던 1980년대 중반 늦은 밤, 하숙집 길목 가판에 있던 신문을 사 들고 읽노라면 나의 고통이 소설 속에 고스란히 담긴 것 같아 흠뻑 빠져들었다. 살벌하던 시대, 휘둘린 청춘 남녀의 이루지 못할 사랑을 그린 소설은 보도블록을 깨어 던지거나, 겁에 질린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그 시대와는 정말 무관한 얘기들.
하지만 사회면을 장식하던 핏빛 활자들을 보란 듯이 무시한 소설은 나를 현실과 전혀 다른 달콤한 세계로 밀어넣었다. ‘오직 한 가닥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으로/ 남몰래 고민하던 민주주의에 대한 간절함’도 소설을 읽는 순간만큼은 없었다. 초창기 최인호가 보여준 번득이는 감수성, 세련된 문체 등은 평범한 독자인 내가 보기에도 적합한 관형어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386세대의 삶의 일부가 됐고 기쁜 우리 젊은 날을 사로잡은 이른바 청년문화의 기수였다.
소설가 최인호의 유산
그러나 격동의 1980년대를 지나오면서, 그리고 문학과 사회의 관계를 고민하게 된 이후부터 나는 최인호의 문학에 깊은 절망을 느꼈고 그에 대한 열정은 차갑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아프다고, 견딜 수 없다고 비명을 질러댔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가끔은 우리와 같은 시대,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문학은 사회의 가장 예민한 살갗이어서 가장 먼저 상처 입고 가장 빨리 아파한다고 한다. 험악하던 시대, 현실의 모순을 문학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점도 이해하지만, 시대의 아픔을 찾아보기 어려운 그의 글들이 몹시 서운했다. 그의 글을 열정적으로 읽으면서도 나는 점차 불편해져 갔다.
그래서 정작 지난해 이맘때 그가 세상을 떠난 순간에도 그의 작가적 이력을 긍정적으로 보기엔 맘이 내키지 않았다. 당시 모든 언론이 저마다 그와의 귀한 인연을 들이대며 상찬을 늘어놓았다. ‘한국문학의 큰 별’이니, ‘청년문화의 기수’니, ‘감수성의 천재’니 하면서 이른바 저명인사들이 앞다투어 쏟아내는 그에 대한 엄청난 찬양 속에 냉정한 비판의 소리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어려웠던 시대, 함께 살아내지 못한 시대의 인물을 무작정 비난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죽음 앞에 일방적인 찬사를 쏟아내는 것은 부박하다. 한 시대를 같이 고민하고 풍미했다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그러했듯이 나 또한 그를 무척 좋아했지만, 그러나 한순간도 그를 존경하지는 않았다고 나는 한 일간지 칼럼에다 작가 최인호를 냉정하게 몰아붙인 바 있다.
그럼에도 최인호가 이 땅의 386들에게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 그는 이른바 1970년대 청년문화의 아이콘이었다. 그는 유신 시절 ‘청년문화선언’(1974)에서 “전에는 침묵의 대중을 몇몇 엘리트들이 정의 내리며 주도하고 이끌었지만, 오늘날의 청년문화는 엘리트를 인정치 않는다. …오늘날의 청년문화는 침묵의 다수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의 문화인 것이다”라며 기성세대가 청년문화를 저질·퇴폐로 몰아붙이는 데 반박하며 이른바 통기타·블루진·생맥주 문화를 옹호했다.
그가 주장하는 청년문화의 정점에 있는 노래가 ‘고래사냥’이다. 당시 젊은이들에게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를 끈 노래다. 노래는 곧 비슷한 성격의 청춘영화의 주제곡으로 삽입되면서 더욱 맹위를 떨치게 된다.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이다. 일간 스포츠에 연재된 최인호의 소설을 원작으로 요절한 하길종이 감독했다. 영화에는 ‘고래사냥’ ‘왜 불러’가 전편에 흐르면서 현실에 대한 젊은이들의 반발 심리를 대변했으며 김정호의 ‘날이 갈수록’이 그 시절 젊음들의 우울한 자화상을 그렸다. 장발 단속, 음주문화, 미팅, 무기한 휴강, 입대 등 젊은이들의 풍속도를 리얼하게 보여주는 영화에서 노래는 이른바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고래사냥, 바보들의 행진
뭐라 딱히 표현하기조차 어려운 상황, 퇴폐와 자학이 넘치던 안개 같은 시대였다. 1970년대 젊은이들의 좌절과 불안한 삶 등 상실감과 비애를 풍자적으로 묘사한 노래 ‘고래사냥’은 그래서 국민가요쯤으로 여겨진다. 아직은 희소성이 있고 풋풋했던 대학가였다. 그래서 비록 지금은 존재감조차 희미해졌지만 당시 고연전의 막판에서는 모두가 악에 받쳐 고래고래 함께 부르던 청춘의 노래였다.
그러나 ‘고래사냥’이 ‘왜 불러’와 함께 대학가 시위 현장에서 단골로 불리자 공윤(공연예술윤리위원회)이 금지곡으로 판정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지만 그땐 정말 그랬다. 노래를 삽입한 영화 ‘바보들의 행진’ 또한 무려 다섯 차례의 검열을 통해 술집에서 병태가 일본인과 싸우는 장면, 경찰서에서 여자의 옷을 벗기는 장면, 데모 장면 등 30분 분량이 잘려나갔다(‘한국영화 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년).
영화 ‘고래사냥’ 촬영지인 동해 현남항의 풍경.
병태의 친구인 부잣집 외아들 영철은 적성에 맞지 않는 대학생활을 하며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전국적으로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갈 곳이 없는 대학생들은 술로 스트레스를 푸는데, 술만 마시면 동해바다로 고래사냥을 가고 싶다고 말하던 영철은 어느 날 정말로 동해바다로 떠나 자살을 하고 병태는 군대를 선택한다. 병태를 태운 입영열차가 막 출발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영자가 나타나 열차의 창문에 매달린 채 병태에게 입맞춤을 한다. 흥행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둔 이 영화의 또 다른 오브제는 기차다. 지금의 KTX 급이 아니라 삼등삼등 완행열차가 노래의 또 다른 주인공쯤 된다.
당시 완행열차는 당연히 ‘비둘기호’다. 적자를 이유로 한 경영논리에 의해 강제 퇴출된 지 오래다. 역이란 역은 모두 멈춰 서는 완행열차. 믿기지 않겠지만 속도가 워낙 느려 간혹 날쌘 청년들은 커브 길을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거나 올라타는 묘기를 부리기도 했다. 이 열차는 고급인 통일호나 새마을호를 만나면 그 열차가 지나갈 때까지 역에 멈춰 서서 한참 동안 기다려야 했다. 싼 운임 내고 탄 설움을 톡톡히 지불했다. 비록 느리고 허름하기 이를 데 없지만 이 열차가 꼭 필요한 사람들이 있었다. 열차에는 인근 도시 학교로 통학하던 청소년들의 재잘거림, 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가는 대학생들의 설렘이 담겼다. 삶은 달걀과 푸성귀를 담은 광주리를 이고 아들 딸 집으로 가던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있었고, 5일장에 내다 팔 물건들을 담은 봇짐을 들고 새벽 첫차를 탄 장꾼들이 있었다. 비둘기호의 단골 승객은 다름 아닌 우리 어머니였다.
그러나 비둘기호의 추억은 이제 너무 아득하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통일호나 무궁화호, 새마을호를 타야 했다. 그러던 가운데 통일호마저 없어졌다. 세월은 흘러 이제는 새마을호보다 훨씬 빠른 KTX가 나타났다. 통일호, 무궁화호, 새마을호를 타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제 KTX를 이용한다. 그러나 모두가 KTX를 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참기름과 찹쌀 자루를 걸머진 할머니나 지방 장터를 돌아다니는 장꾼은 비싼 요금을 감당할 수가 없다. 깨끗하고 쾌적한 KTX가 완행열차를 타고 고래사냥을 간다는 386세대의 추억마저 고스란히 앗아간 셈이다.
복고주의 열풍
노래 ‘고래사냥’의 주체할 수 없는 대중적 인기는 동명의 영화 ‘고래사냥’을 탄생시킨다. 역시 최인호 소설이 원작으로 1984년 배창호가 감독했다. 지금은 사라진 피카디리극장에서 상영돼 서울에서만 무려 43만 관객을 동원, 그해 최고 흥행을 기록했다.
안성기, 이미숙, 가수 김수철이 등장하는 영화는 신군부 정권에 맞서는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를 무대로 어디론가 탈출하고 싶은 젊은이들의 심정을 대변했다. 주제가 ‘고래사냥’은 당시 대학가가 안았던 절망과 희망을 도도하게 포착하면서 특히 청년 지식인들을 끊임없이 선동했다. 계엄령, 위수령, 긴급조치에 억눌린 젊음에게 서둘러 고래사냥을 떠나라는 절규 아닌 절규였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거지 역에 안성기,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왜소한 병태 역에 음악을 담당한 가수 김수철이 직접 출연했고 이미숙의 풋풋한 벙어리 연기가 관객의 호감을 샀다. 노래의 인기는 뮤지컬도 만들어냈다. 1996년에 극단 환퍼포먼스가 이윤택 연출로 9억 원의 제작비를 들여 같은 내용을 뮤지컬로 만들었다.
세월은 유수같이 흘렀다. 그러나 ‘고래사냥’은 과거에만 있지 않다. 술집 뒷골목에서 술 취한 386들에 의해 이따금 불려지던 노래는 최근의 복고풍에 힘입어 되살아났다. 영화 ‘건축학개론’에 이은 ‘응답하라 1997’ 등으로 상징되는 복고주의 열풍은 역사의 뒤편으로 퇴장해 있던 불멸의 노래들을 다시 등장시켰다.
사실 지금의 1970년대 복고바람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다. ‘세시봉’으로 상징되는 통기타 가수들과 ‘불후의 명곡’에 송창식, 신중현 등이 등장해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부모 세대와 다른 정체성이 형성된 그 시절에 대한 애잔함이 아직도 호소력을 발휘하는 데 있을 것이다. 7월 5일 KBS ‘불후의 명곡’에서 정동하 · 딕펑스가 부르는 ‘고래사냥’을 보셨는가? 관중석에 앉은 중년 세대들이 악을 쓰고 절규하듯 따라 부르다 마침내 눈물을 훔치는 장면에 TV를 보던 나는 무한한 슬픔을 느꼈다. 청바지 뒷주머니에 타임이나 뉴스위크지를 꽂고 다니며 종로통을 방황하던 바로 그들이다. 노래 ‘고래사냥’의 배경은 당연히 가상공간이지만 현실 공간에도 엄연히 무대가 존재한다. 강원도 남애 해안에 가면 ‘고래사냥’의 무대가 있다. 미시령 터널 덕분에 서울에서 불과 두 시간 반이면 동해 바닷가다. 대관령 굽이굽이 옛길을 상상하던 나는 너무나 편리해진 터널 길에 말을 잊는다.
‘고래사냥’의 무대 남애 해변은 저 유명한 정동진역에서 조금만 올라오면 있다. 노래나 영화에 등장하는 것 못지않은 총천연색 관광열차가 해안가 파도를 내려다보며 달린다. 당연히 완행열차다. 바로 영화 속에 등장했던 그런 열차다. ‘고래사냥’의 유명세에 힘입어 지자체들이 앞다투어 만든 인공적인 장소, 하지만 사시사철 노래 ‘고래사냥’을 그리워하는 386세대의 인파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펜션 이름도 고래사냥이고 횟집 이름도 고래사냥이다. 늦여름, 여전히 피서철임에도 인근 경포대나 속초에 비해 한적하다 못해 고적하기까지 한 남애 바다는 송창식의 또 다른 노래 ‘철 지난 바닷가’가 딱 어울릴 법한 쓸쓸한 풍경이다. 계절은 어느덧 가을로 접어든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고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지만 우리는 떠나야 한다. 동해바다로 삼등삼등 완행열차를 타고 떠나야 할 때다. ‘고래사냥’은 우리더러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떠나라고 부추긴다. 그러나 고래는 삶에 찌든 저마다의 가슴에 숨 쉰다. 가을이다. 이 가을에는 사라지는 모든 것을 위해 한 번쯤 고개를 숙여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