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호

“참으면 윤 일병 터지면 임 병장”

군폭(軍暴)과의 전쟁

  • 이정훈 │편집위원 hoon@donga.com

    입력2014-08-21 16: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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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실수에 의한 치사?
    • 부사관과 초급지휘관 역량부터 강화해야
    • 보안사항 줄여 병사 휴대전화 허용 검토할 만
    연이어 터져 나온 병영 폭력사건으로 온 나라가 뒤숭숭하다. “군대 좋아졌네!”란 말이 돈 것이 엊그제 같은데, ‘참다참다 못 견디면 맞아 죽거나 자살하고, 아니면 동료를 죽여야 하는’ 현실 앞에 입대할 아들을 둔 부모의 불안은 커져만 간다. 해병대에서는 변기 핥기까지 시켰다고 하니 마음 편할 사람이 없을 것 같다.

    전 국민이 하나가 돼 군을 지탄하면서 권오성 육군참모총장과 권혁순 3군사령관 등 2명의 육군 대장이 옷을 벗었다. 윤 일병이 소속했던 28사단에서는 사단장과 계선상에 있는 포병연대장-포병대대장-포대장(중대장)이 보직해임됐다. 천안함-연평도 사건보다 더 크게 책임을 물은 것이다.

    국민 지지 얻은 살인죄 기소

    병영 내 폭력이 횡행하게 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이다. 그러나 무작정 우리 군을 비난만 해서는 곤란하다. 문제가 있긴 해도 군은 우리를 지켜주고 통일을 이뤄나갈 중추세력인 만큼 인내를 갖고 잘못된 것을 고쳐나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 감정에 편승해 몰아붙이기보다는 법과 상식에 근거해 문제점을 추려내고 손질해야 한다. 윤 일병 사건과 관련해 쏟아진 정보 중에서 옥석(玉石)을 가려내는 일부터 해야 한다.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남성은 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전에 국가를 위해 의무 군복무를 해야 한다. 그런데 적과 대치하고 있는 탓에 훈련과 근무가 많아 한국군의 분위기는 경직돼 있다. 그런 낯선 환경에 들어간 신참은 ‘서열이 있는 세계’에서 낯선 이들과 부대끼며 힘겨운 적응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들이 탈 없이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한층 성장해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그러한 기대에도 아들이 주검으로, 그것도 맞아 죽어서 돌아오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져 버렸다. 어느 부모가 그런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군필자들 또한 군에서 억울하게 맞아본 기억이 있기에 군에서 일어난 구타 사망 사건에 대해서는 격노한다.

    28사단 검찰부는 주범인 이 병장 등을 상해치사혐의 등으로 기소했다. 그러자 윤 일병 사건을 세상에 알린 군인권센터 임태훈 소장은 “주범인 이 병장은 살인죄로 기소해야 한다” “(그런데도 상해치사죄로 기소됐으니) 이 수사는 축소, 은폐됐다”고 주장했다. 국민은 이에 크게 공감했다.

    여론의 반향이 워낙 컸기에 국방부 장관은 휴일에 합참의장과 3군 총장을 불러내 회의를 하고,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공개적으로 군내 폭력을 지탄했다. 여론이 크게 악화하자 육군은 재판부를 28사단에서 3군으로 옮기고, 재판장도 대령(28사단 부사단장)에서 준장으로 바꿨다. 국방부 검찰단이 이 병장을 살인죄로 기소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3군 검찰부는 보강수사를 해 공소장을 변경하기로 했다.

    과연 윤 일병 사건 수사와 기소 과정엔 은폐와 축소 시도가 있었을까. 군인권센터는 윤 일병 사건 수사가 축소 은폐된 증거로 수사 기록을 제시했다. 이는 6군단 헌병대 등의 수사자료를 근거로 28사단 검찰부가 만든 것인데, 현재로서는 공범 4인의 가혹행위를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다. 육군은 재수사가 아니라 공소장 변경을 위한 보강수사를 하겠다고 했으니 이 자료는 보강수사에서도 기초가 될 수밖에 없다.

    “참으면 윤 일병 터지면 임 병장”

    8월 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열린 윤 일병 추모제에서 윤 일병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있다. 오른쪽은 군인권센터 임태훈 소장.



    28사단 검찰부는 가해자 4인을 상해치사죄로 기소했는데, 군인권센터와 국민 감정은 살인죄로 기소해야 한다는 쪽이다. 상해치사 기소를 사건 축소로 봐야 할지는 28사단 검찰부와 6군단 헌병대 등이 조사하고 군인권센터가 공개한 사건일지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사건일지는 최초 수사를 한 헌병대와 수사 대상이 된 28사단 측의 은폐 시도가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대 내에서 강력 사건이 일어나면 해당 부대의 헌병대가 수사를 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러나 윤 일병 사건은 28사단이 아닌 6군단 헌병대가 수사했다. 이에 대해 육군 측은 “수사에 객관성을 부여하기 위해 처음부터 상위 부대 헌병대를 투입했다”고 설명한다.

    윤 일병 사건을 유심히 살펴본 독자라면 ‘윤 일병의 사망일을 4월 6일로 봐야 한다’는 기사를 기억할 것이다. 이는 군인권센터에서 주장한 날짜다. 반면 군이 발표한 윤 일병의 사망일은 4월 7일이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상위 부대의 헌병대 투입

    수사 자료는 4월 6일 오후 4시30분경, 상급자 4인으로부터 폭행을 당하던 윤 일병이 쓰러졌음을 보여준다. 주범으로 지목된 이 병장은 의무병이 아니라 앰뷸런스 운전병이었다. 윤 일병이 쓰러지자 이 병장을 제외한 가해자들은 의무병답게 윤 일병의 상태를 확인해 심장이 뛰지 않는 것을 알았다(4시40분). 이 때문에 바로 심폐소생술을 했으나 호흡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때 이들은 윤 일병이 숨졌다는 것을 인지하고 ‘윤 일병이 냉동식품을 먹고 쓰러진 것으로 하자’고 합의했다.

    2분 뒤 이들은 이 병장이 모는 앰뷸런스에 윤 일병을 태워 연천의료원으로 향했다. 이때 가해자 중 한 명인 지 상병은 타지 않고 대신 N 하사가 탑승했다. 앰뷸런스 안에서 2명의 가해자는 울기만 해 N 하사가 혼자 심폐소생술을 했다. 그러다 이들에게 ‘윤 일병에게 산소를 투여하라’는 지시를 반복해서 내렸다.

    그 시각, 부대원이 병원으로 후송됐다는 것을 안 부대 당직사령은, ‘이송된 환자가 누구이고 왜 쓰러졌는지’ 파악하기 위해 의무대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지 상병은 구타 사실을 숨기고 “윤 일병이 냉동식품을 먹고 TV를 시청하다 고개를 가누지 못하더니 ‘저 오줌을 쌌어요’라고 해서 살펴보니 호흡이 없었다”라고 거짓 대답을 했다.

    앰뷸런스가 연천의료원에 도착했으나 의료원 측은 시설이 없다며 윤 일병을 받지 않았다. 그때 주차장에서 잠시 기다리게 된 3인(N 하사 제외)은 이 병장의 주도로 “냉동식품을 먹고 윤 일병이 쓰러졌다”고 하기로 또 입을 맞췄다.

    이들은 다시 앰뷸런스를 몰고 국군양주병원으로 달려갔다. 28사단에서는 지휘통제실에 있던 이모 소령이 지 상병을 호출해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했다. 지 상병은 윤 일병이 냉동식품을 먹고 쓰러졌다는 답변을 반복했다.

    국군양주병원에서는 윤 일병이 병원으로 이송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28사단 헌병대가 기다리고 있다가 앰뷸런스가 도착하자 바로 3인을 불러 진술을 요구했다. 이들은 미리 약속한 내용대로 대답했다.

    지 상병은 지휘통제실에서 내무반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K 병사 등이 지 상병을 붙잡고 자초지종을 물었다. 지상병은 K 병사 등을 향해 “어디까지 알고들 있느냐? 이 병장이 때려서 그렇게 됐다”라고 털어놓았다.

    1시간여가 흐른 저녁 7시37분쯤 이 병장 등 3인이 헌병대 조사를 받고 돌아왔다. 이 병장은 바로 지 상병을 붙잡고 “입을 맞춘 대로 이야기하라”고 했다. 입실 환자인 다른 병사들에게는 “그때 당신들은 자고 있었던 것으로 하라”고 지시했다.

    포대장에게 구타 제보

    지 상병으로부터 진실을 전해 들은 K 병사는 고민하다 동료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의견을 구했다. 동료는 포대장에게 보고할 것을 권했다. 국군양주병원도 윤 일병을 처치하지 못해 그날 밤 윤 일병을 구급차에 태워 의정부 성모병원으로 보냈다. 그 시점에 K 병사는 포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윤 일병은 냉동식품을 먹고 갑자기 쓰러진 것이 아니라 이병장과 의무병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제보했다. 그때가 오후 10시10분쯤이었다.

    그런데 무슨 느낌이 들었는지 10시40분쯤 지 상병은 K 병사에게 “윤 일병이 차라리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만 입 닫고 조용히 있으면 잘 마무리될 수 있다”며 비밀 유지를 당부했다. 밤 11시가 되자 포대장이 모든 의무병과 의무대에 입원해 있는 병사를 대상으로 면담에 들어갔다.

    4인은 미리 맞춰놓은 대답을 했다. 그러나 포대장은 K 병사가 아닌 다른 병사로부터도 윤 일병에 대한 가혹행위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참으면 윤 일병 터지면 임 병장”

    특별인권교육을 받는 육군 30사단 장병들. 8월 8일 전군은 국방부 장관 지시로 특별인권교육을 실시했다.

    그날(4월 6일) 오전 7시30분 윤 일병은 잠을 잔다는 이유로 이 병장에게 폭행당한 것을 시작으로 하루 종일 4인에게 시달렸다. 20분 뒤 이 병장의 폭행으로 윤 일병의 안경이 부러졌다. 9시쯤에는 이 병장과 하 병장이 때렸고, 10시에는 이 병장이 가래침을 뱉고는 핥아 먹으라고 했다. 거듭된 폭언과 폭행으로 윤 일병이 매우 힘들어하자 이 병장은 수액(링거)주사를 놓았다. 윤 일병은 오후 2시까지 이 주사를 맞았다.

    윤 일병이 2시간여 동안 수액주사를 맞고 일어난 오후 3시50분쯤, 4인은 윤 일병이 냉동식품을 쩝쩝거리고 먹는다며 또 폭행했다. 그로 인해 윤 일병이 입 안에 있던 음식물을 바닥에 떨어뜨리자 이 병장은 이를 핥아먹게 했다.

    그리고 40여 분간 폭행과 얼차려가 이어졌고 4시30분쯤 윤 일병이 침을 흘리고 오줌을 싸며 쓰러졌다. 그런데도 꾀병을 부린다며 이들은 윤 일병의 뺨을 때리고 배와 가슴을 거듭 가격했다. 윤 일병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후 이 병장 등은 윤 일병을 앰뷸란스에 태워 병원으로 갔다.

    포대장이 대략적으로 알아낸 사건 개요다. 자정을 넘긴 4월 7일 새벽 0시30분쯤 감을 잡은 당직사령이 4인을 지휘통제실로 불러 시간대별로 윤 일병의 하루 일과를 설명하게 했다. 그러나 4인은 범행을 실토하지 않았다.

    날이 밝은 오전 7시30분쯤 포대장은 목격자의 진술 등을 서류로 작성해 지휘통제실로 올렸다. 4인이 범인임을 짐작한 육군은 위중한 사건으로 판단하고 오전 9시, 6군단 헌병대로 하여금 4명을 임의동행해 조사하게 했다.

    4인은 허위진술을 거듭했다. 6군단 헌병대장은 이들을 1명씩 분리했다. 그리고 “병원에서 윤 일병이 곧 깨어날 것이라는 연락이 왔다. 그가 깨어나면 누가 어떻게 때렸는지 다 말할 것이다. 감췄다가 드러나면 더 무거운 처벌을 받는다”고 다그쳤다. 그러자 구타한 사실을 자백하기 시작했다. 4인조가 자백을 한 날 의정부 성모병원에 있던 윤 일병은 오후 4시20분쯤 기도(氣道) 폐쇄에 의한 뇌손상으로 사망했다. 폭행 사실을 확인한 헌병대는 오후 7시33분쯤 이들을 긴급체포했다.

    사망일 6일이냐, 7일이냐

    윤 일병이 폭행을 당해 사망했다는 사실은 김관진 당시 국방장관에게도 간략히 보고됐다. 육군은 국방부 기자실에도 구두로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는 3월 24일 경기도 파주에서 처음 발견된 북한 무인기 사건의 파장이 클 때라 이 사건에 주목하는 이가 드물었다.

    이틀이 지난 4월 9일 상해치사혐의 등으로 구속영장을 발부받은 28사단 검찰부는 4인을 구속하고 후속 수사에 들어갔다. 이것이 사건일지를 토대로 재구성한 윤 일병 사건의 윤곽이다.

    사건일지를 종합하면 심한 구타를 당한 4월 6일 윤 일병은 호흡이 멎어 1차 사망했으나, 심폐소생술과 의약품 투여로 심장은 뛰는 일종의 뇌사 상태로 있다가 다음 날 심장마저 멈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군인권센터 운영위원이기도 한 김대희 전문의는 “전문 심폐소생술을 하다보면 사망한 후에도 약 같은 것으로 다시 심장이 뛰고 호흡이 돌아오는 자발순환을 하게 할 수가 있다. 윤 일병은 자발순환은 돌아왔으나 호흡이 없는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민간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다가 자발순환도 유지되지 못해 완전 사망한 것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군인권센터는 윤 일병이 스스로 호흡하지 못한 4월 6일 뇌진탕으로 사망한 것으로, 군은 심장이 멈춘 4월 7일을 사망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군이 하루 동안 윤 일병 사망 사건을 은폐했다는 근거로 보긴 어렵다. 포대장을 비롯한 28사단 관계자와 헌병대도 은폐를 시도하지 않았다. 은폐는 가해자 4인이 했다.

    그러나 살인으로 봐야 할 것을 치사로 판단했다면 기소 축소 시비가 일 수 있다. 교통사고나 과실로 사람을 숨지게 한 경우는 살인할 의도가 없었기에 보통 치사로 판단한다. 그러나 감정이 크게 얽혀 사람을 때리다 숨지게 한 폭행치사(상해치사)는 살인과 구분하기 어렵다.

    그런데 법원은 살인죄로 판결하는 것이 부담스러운지 이러한 경우 대개 치사로 판결해왔다. 그러나 가해자가 급소를 때렸거나 흉기를 사용한 경우, 피해자가 쓰러졌는데도 살리려는 행위를 하지 않은 경우엔 살인으로 본다.

    4인은 흉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윤 일병이 쓰러진 후에는 심폐소생술을 실시하고 병원으로 이송한 사실이 있다. 진실은 은폐하려고 했지만 나름대로는 윤 일병을 살려보려고 노력한 것이다. 이런 점에 주목하면 이들을 치사죄로 기소한 것은 문제의 소지가 적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4월 6일 윤 일병이 하루 종일 폭행을 당하고 가래침과 음식물을 핥아먹는 모욕을 당한 것을 떠올리면 생각이 달라진다. 4인은 그전에도 윤 일병을 상습적으로 폭행하고 그가 쓰러지면 수액주사로 회복시킨 후 다시 때리는 잔인한 면모를 보였다.

    이렇게 폭행하면 사람은 죽을 수 있다. 그러니 지금 하고 있는 행위가 범죄인 줄 알면서도 저지르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으로 볼 수도 있다.

    이 문제는 공소 내용을, 살인을 주위적(主位的) 범죄, 치사를 예비적 범죄 사실로 변경한 후 군사재판에서 결정될 전망이다. 군사재판도 3심제로 치르는데, 최종심은 국가조직인 대법원에서 한다. 민간 법원은 살인죄를 좁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으니 어떤 판결을 내릴지 지켜봐야 한다.

    처음 누려보는 ‘절대적 리더십’

    ‘군대 고생은 내무반 생활’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병사들끼리 모인 내무반 생활은 근무나 훈련보다 더 큰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적응하지 못해도 피할 수가 없다. 졸병에게 내무반은 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내무반에서 해야 할 일을 놓고 선임병과 후임병으로 갈려 지시와 복종이 있기 때문이다.

    내무반 폭력은 여러 원인에서 비롯되는데 그중 하나가 지역감정에 의한 괴롭힘이다. 특히 경상도와 전라도 출신 병사들이 갈리면, 우세한 쪽이 약한 쪽을 상대로 지속적으로 고통을 주는 경우가 많다.

    윤 일병 사건에서는 이런 요인이 보이지 않는다. 가해자 4인의 주소지는 부산, 경남 밀양과 마산(창원), 인천이고 윤 일병의 주소지는 서울이다. 윤 일병의 선임으로, 처음에는 윤 일병처럼 맞다가 윤 일병이 후임으로 온 뒤에 윤 일병에 대한 폭행에 가담한 병사의 주소지는 전북 군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남 및 부산 출신 3인이 주력을 형성한 사실은 눈에 띈다.

    병장을 비롯한 고참 병사 세력과 분대장을 맡은 젊은 하사 세력 간의 갈등도 심하다. 윤 일병 사건에서는 ‘거꾸로’병장과 하사 간의 유착이 발견된다. 의무반 관리 책임자인 유 하사는 3살 많은 이 병장을 형님이라고 부르며 그와 한 편이 돼 윤 일병을 폭행했다. 함께 성매매도 했다. 이는 유 하사가 이 병장에게 크게 밀리면서 ‘야합’했음을 의미한다.

    군대에선 계급이 최고다. 학창 시절 리더를 경험해보지 못했어도, 학력이 낮아도, 돈이 없어도, 힘 좋고 뱃심이 세면 하급자를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곳이 군대다. 젊은이 대부분은 입대 후 처음으로 리더 노릇을 해보게 된다. 그러나 그릇된 리더십 중독증에 걸린 병사를 제어하지 못하면 사고가 일어난다.

    잘못된 리더십에 중독된 병장이 분대장과 소대장까지 지배하면 지옥 같은 군대 생활이 이어진다. 이러한 현상은 GP, GOP, 해안소초처럼 고립된 부대에서 일어나기 쉽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해안소초의 소대장이 “소대원들에게 맞았다”며 무장 탈영해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윤 일병 사건은 초급지휘자인 분대장과 소대장이 소속원을 어떻게 통제해야 하느냐는 화두를 던진다.

    자유로운 내무반

    8월 11일에는 윤 일병 사건이 일어난 28사단의 관심병사 두 명이 휴가를 나왔다가 ‘○○○를 죽이고 싶다’는 메모를 남기고 자살했다. 죽이고 싶다는 감정은 내무반 생활에서 싹트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갈등이 적은 내무반, 즐거운 내무반을 만드는 것이 ‘참으면 윤 일병, 터지면 임 병장’의 재연을 막는 길이라고 진단한다(임 병장은 지난 6월 22사단 GOP에서 총기난사 사건을 일으킨 병사). 이는 병사들과 바로 접촉하는 부사관과 초급지휘자들의 역량 강화로 풀어가야 한다.

    우리 군은 참모총장-3군사령관 전역, 28사단장-포병연대장-포병대대장-포대장 보직해임으로 윤 일병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그러나 유사한 사고의 재발을 막으려면 역순으로 처벌 강도를 높여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병사들과 직접 접촉하는 초급지휘관의 능력을 강화하고 책임도 무겁게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윤 일병 사건 후 우리 군도 미군처럼 병사들에게 휴대전화를 허용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이에 대해 한미연합사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미군은 직업군인이니 근무가 끝나면 일반 직장인이 누리는 것과 같은 자유를 줘야 한다. 그런 자유도 없다면 누가 군대에 지원하겠느냐. 한국군에서도 직업군인인 장교와 부사관들은 휴대전화를 갖고 다니지 않나. 그와 같다고 보면 된다.

    대신 근무는 엄격하게 한다. 체력이 약하거나 실력이 달리면 진급 등에서 손해를 보기 때문에 그런 병사는 근무가 끝난 뒤 오히려 자발적으로 운동을 한다. 병력이 적은 미군은 꼭 비밀로 해야 할 것만 엄격히 지키게 하고, 나머지는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어도 문제 삼지 않는다.

    한국군은 의무병제다. 한국은 큰 적을 상대하고 있으므로 모병제를 하기 어렵다. 의무병은 자발성과 책임감이 부족해 ‘시켜야 움직이는’ 특성이 있다. 참여의지가 낮은 의무병을 하나로 녹여내려니 근무 후에도 내무반을 통제하는 문화가 만들어졌다고 본다. 그러나 민도가 많이 올라갔으니 이제는 한국군도 근무 생활과 내무반 생활을 엄격히 구분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근무시간 외에는 각자 개인 생활을 할 수 있게 한다는 차원에서 휴대전화 허용을 검토해야 한다고 본다. 그전에 한국군은 보안 사항을 대폭 정리해야 한다. 꼭 지켜야 할 것은 엄격히 지키고 나머지는 오픈하라는 것이다.

    2005년 28사단 GP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한국 언론은 비밀 중의 비밀인 GP에 대해 자세히 보도했다. 지금 국방부를 비롯한 군 기관에 차를 몰고 가면 블랙박스를 끄라고 한다. 그러나 천안함 사건 때는 방송사 카메라들이 부대로 몰려간 희생자 가족을 따라가서 다 촬영하지 않았는가. 보안사항은 꼭 지킬 것만 엄격히 지키는 쪽으로 정비한 후 휴대전화 사용을 허가하는 것이 시대에 맞는 병영 운영이다.”

    국방정책 시민단체가 주도하나

    그러나 그는 미군 내에서도 병사들 간에 갈등이 존재한다고 전했다. 지역감정보다 더한 인종갈등이 있어 이를 줄이기 위한 장치를 여럿 만들어놓았다는 것.

    그는 “한국의 국방정책을 시민단체가 주도하게 할 순 없지 않으냐”며 “의무병 복무기한 단축으로 관심병사의 입대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면, 군은 ‘괴로운 내무반’을 없애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 그 대신 근무와 훈련은 엄격히 하면서. 이것이 안보를 지키면서 제2의 윤 일병, 임 병장이 나오지 않게 하는 길”이라고 조언했다.

    군인권센터는 어떤 곳?

    주요업무는 ‘세계인권선언과 국제인권법 구현’

    임태훈 소장, 동성애 커밍아웃하고 병역거부


    “참으면 윤 일병 터지면 임 병장”

    숨진 윤 일병 사진을 제시하며 브리핑하는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 그는 동성애자임을 주장해 병역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윤 일병 사건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은 곳은 군인권센터다. 이 센터는 두 차례의 브리핑으로 윤 일병의 억울한 죽음을 알렸다. 8월 7일의 2차 브리핑은 엄청난 관심을 끌어 상당수 방송사가 생중계했다. 이날 군인권센터 임태훈 소장은 “가해자인 유모 하사와 이모 병장이 성매매까지 했다”며 성매매 후 이들 간에 이뤄진 인터넷뱅킹 명세를 들어 보였다.

    그는 “이 사건을 축소 은폐한 육군의 관련 헌병대장과 군 검찰관을 직무유기혐의로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언론매체는 군인권센터의 주장을 철저한 검증 없이 그대로 보도했다.

    임태훈 소장은 여러모로 눈길을 끄는 인물이다. 센터 홈페이지에 있는 ‘소장의 말’과 그가 ‘한겨레’ ‘오마이뉴스’ 등과 했던 인터뷰 기사 등을 토대로 그를 추적해보았다.

    그는 ‘소장의 말’에서 “한국은 커다란 군대라고 일컬어진다. 이는 군대와 군사주의 문화가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저는 불합리한 군대에서 상존하는 차별에 항의하는 의미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군대 내 인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양심적’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긴 했으나 병역거부자라는 얘기다.

    젊은 남성들끼리 생활하는 병영에선 남성 간 성관계나 성폭행이 발생할 수 있다.

    2013년 개정된 군형법은 92조6에서 ‘항문성교 등을 한 사람은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군은 이런 식으로 동성애를 금하고 있기에 동성애자를 입대시키지 않는다.

    임 소장은 1997년 ‘동성애자 인권연대’를 만들 때 참여했고 1998~2002년엔 2기 대표를 지냈다. 2004년 군 입대를 앞둔 그는 동성애자라며 커밍아웃을 하고 징병검사를 거부했다. 그는 이 때문에 병역거부로 기소돼 1년6개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광복절 특사로 1년 4개월 만에 출소했다.

    군축, 무기거래도 감시?

    2008년 이명박 정부는 광우병 촛불시위로 홍역을 치렀다. 당시 임 소장은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인권법률의료지원팀장으로 활동하다 이듬해 군인권센터를 만들었다.

    군인권센터의 정관에 따르면 소장과 운영위원이 센터 운영의 중추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소속 의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들, 노무현 정부 때(2006년) 만들었다가 이명박 정부 때(2009년) 해체한 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활동하던 이, 한겨레통일문화재단(김대중 정부 때 통일부 장관을 지낸 임동원 씨가 이사장) 소속 인사 등이 운영위원으로 있다.

    군인권센터는 ‘유엔이 채택한 세계인권선언과 한국 국회가 비준하고 공포한 국제인권법이 구현되도록 한다’ ‘국방예산, 군축 및 무기 거래에 대해서도 계속적으로 감시활동을 펼쳐나가겠다’ 등을 ‘하는 일’로 규정해놓았다. 국방예산과 군축, 무기 거래에 대한 감시는 군인 인권과 큰 연관성이 없는 것 같은데도 하는 일로 해놓은 것이다. 그러나 세계인권선언 구현을 주장하면서도 북한 주민이나 북한 군인의 인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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