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호

反개혁 ‘슈퍼 甲’ 대한민국 대학교수

폴리페서, 텔레페서, 커미션페서…

  • 김정인 | 춘천교육대학교 교수 redpeng66@daum.net

    입력2014-08-22 10: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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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 베끼고 제자 논문 가로채고 정치권에 줄 서는 행태. 장관 후보가 된 교수들만의 행태가 아니다. 교수는 가장 개혁적이지 않은 슈퍼 갑이라는 지적이 많다. 상당수는 65세 정년까지 부조리에 편승해 연구도 대충, 수업도 대충 하면서 인생을 즐기자는 쪽이다. 다른 상당수는 마음이 아예 다른 데(정치권력·돈)로 떠난 쪽이다. 대학교수 사회의 속살을 파고들었다.
    反개혁 ‘슈퍼 甲’ 대한민국 대학교수
    최근 김명수 교육부 장관 후보 인사 청문회 파동은 대학교수들의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냈다. 그렇게 한바탕 폭풍이 지나갔건만, 또 그걸로 끝이다. 교수 사회는 어떤 비판이나 부끄러움에도 아랑곳 않고 폐단을 반복한다.

    이 파동 뒤 두 달의 기나긴 여름방학이 찾아왔다. 이제 2학기 개강을 앞뒀다. 교수 사회는 그저 조용하기만 하다. 교수 사회에서 스스로 정화하자는 운동이 일어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모두들 ‘나는 장관 할 생각이 없어’라고 손사래 치며 여파가 가라앉기만 기다리는 듯하다. 교수 사회의 폐단은 또 이렇게 쌓이기만 하고 개혁의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인가. 안타깝다. 일찍부터 교수를 보는 세상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실력이 없다. 품격이 낮다. 휴강이 많다. 가르치는 일에 성의가 부족하고 연구와 공부를 게을리 한다. 대학교수면 한 사회의 최고 지식계급으로서 학식에 있어서나 인격에 있어서나 덕성에 있어서나 남의 모범이 되고 존경을 받을 만한 권위를 가져야 한다. 권력은 없지만 권위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오늘날 대학교수에게서 학문과 인격의 권위를 찾아보기 힘들다.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인 1955년 ‘사상계’에 실린 교수비판론이다. 교수에게 가르치고 공부하는 일은 직분에 해당한다. 교수로서의 직분에 소홀하다는 치명적인 비판, 학문과 인격에서 권위가 없다는 질타로부터 자유로운 교수가 오늘날에도 과연 얼마나 될지 자못 궁금하다.

    교수 사회 스스로 적폐를 청산하고 개혁을 일굴 만한 추동력을 갖추지 못한 채 권력이 요구하는 타율적 개혁에 질질 끌려 다니는 무기력함이 체질화한 데는 분명한 까닭이 있다. 지금까지 많은 교수가 학문적, 인격적 권위도 없으면서 권력만을 좇았다. 한국 교수 사회의 적폐 중 가장 큰 적폐는 어용교수였다.



    ‘대학교수 → 고위공직’ 코스

    어용교수란 주로 독재 권력에 참여하거나 협조한 교수를 의미했다. 그렇기에 민주화운동기마다 분출했던 대학 개혁 운동에서 어용교수는 청산 대상이었다. 어용교수는 교수 사회의 체질을 약화하고 대학 개혁의 걸림돌이 됐다.

    어용교수가 처음으로 도마에 오른 건 이승만 정부 때였다. “명색이 대학교수라는 사람들이 덮어놓고 집권자의 시책을 합리화하기에 여념이 없다”라는 개탄이 나왔다. 어용교수라는 말은 일제 식민 통치에 동조한 학자를 어용학자로 부른 데서 파생됐다. 태생적으로 상당히 부정적인 함의를 가졌다. 이기붕이 이승만 정부의 2인자로서 입지를 굳히면서 어용교수들은 자유당 입당을 넘어 이기붕을 노골적으로 찬양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이기붕의 호인 만송을 따서 ‘만송족’으로 불렸다.

    4·19혁명 후 대학에는 개혁 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정정당당한 학자적 기풍으로 정치와 관권의 간섭을 배제하자는 것이 교수에게 주어진 책무였다. 그러나 교수 사회는 어용교수들에게 곡학아세를 참회하고 물러나라고 압박하지 않았다. 어용교수의 축출이 학문의 자유를 확보하는 선결 조건임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앞장서진 않았다.

    대신 학생들이 힘 있게 밀어붙였다. 서울대 상대 학생들은 권력에 아부하는 교수의 퇴진을 요구하며 동맹휴업을 펼쳤다. 경북대 의대 학생들은 집단으로 자퇴서를 쓰며 압박했다. 하지만 이런 호소는 5·16 군사정변과 함께 묻히고 말았다.

    군사정부는 교수들을 국정에 적극 끌어들였다. 이승만 정부에선 그러지 않았으나, 군사 정부에선 정부에 들어가는 것이 교수들의 공공연한 자랑거리가 되었다. ‘대학교수→고위공직’ 코스는 이때 완성된 셈이다.

    反개혁 ‘슈퍼 甲’ 대한민국 대학교수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교수를 적극 활용했다. 여기에 주로 해당되는 교수들은 ‘평가교수’로 불렸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과를 점검하기 위해 1965년 구성한 평가교수단이 원조에 해당한다. 자문기구 성격인 평가교수단은 박정희 정부 내내 운영됐다. 일부 교수들은 이를 바탕으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상당수 교수는 처지가 궁박했다. 권력은 교수에게 학생 지도에 더욱 철저히 임할 것을 요구했고, 학생은 교수를 권력 요구에 맹종하는 벙어리 교수라고 손가락질했다. ‘교수는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신세라는 한탄이 절로 나오던 시절이었다.

    긴 겨울 끝에 1980년 민주화의 봄이 찾아왔다. 학생들은 어김없이 어용교수 축출에 나섰다. 서울대생은 어용교수 명단을 내놓았고 전남대생은 어용교수백서를 발표하며 교수 사회를 압박했다.

    이번엔 정부까지 거들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학자의 양심을 버리고 행동한 교수가 있다면 자퇴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유신독재에 적극 동조한 교수는 스스로 진퇴를 결정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도 컸다. 교수 사회도 ‘대학의 자율이 정치적으로 침해받던 상황에서 직분을 지키지 못한 소극적인 자세를 반성한다’는 성명을 냈다.

    하지만 어용교수를 축출하려는 노력은 전두환 정부에 의해 좌절됐다. 교수가 권력에 협조하는 행태는 계속됐다. 학생들은 이런 교수에게 적개심을 드러냈다. 국회의원이 되거나 장관으로 입각한 교수의 연구실을 폐쇄하는 퍼포먼스는 1980년대 내내 대학에서 반복됐다. 학생들의 강경한 세에 눌려 서울대에선 전두환 정부에 참여한 교수들 중 한 명도 대학으로 복귀하지 못했다.

    원론적으로 보면, 대학에서 교수는 학생과 함께 대학을 이끌어가는 주체다. 하지만 민주화운동기마다 어용교수 청산이 동맹휴업을 불사할 만큼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학생은 어용교수 퇴출에 나서지 않는 교수 사회를 지탄했다. 그들에게 교수란 어용교수와 저항교수, 이렇게 두 부류였다. 어용교수에는 독재 권력에 참여하거나 협력하는 교수뿐 아니라 침묵하며 순종하는 교수도 포함됐다. 그러니까 저항교수를 뺀 모든 교수가 어용교수였다.

    이렇게 대학 개혁의 두 주체인 교수와 학생은 어용교수 문제를 둘러싸고 자주 갈라섰다. 학생은 대학 개혁의 주체로, 교수는 대학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현상이 반복됐다. 그 세월을 거쳐 교수 사회에는 어용교수란 낙인을 피하기 위해 학생의 눈치를 보거나 그들에게 영합하는 교수가 생겨났다. 자정(自淨)이 아닌 보신(保身)을 택한 것이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이후 어용교수가 대학에서 퇴출되는 일이 일어났다. 광주 조선대에서 어용무능교수로 지목된 30여 명의 교수가 쫓겨난 것이다. 이런 변화에도 교수를 바르게 세우는 일은 요원해 보였다. ‘동아일보’ 1990년 7월 10일자에 따르면 교수에게 개혁을 기대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학원의 자치와 학문의 자유를 요구하던 양심적 학자, 부정 불의 불합리와의 타협을 거부하던 지조 있는 많은 교수들은 오랜 세월 박해와 탄압을 받고 정든 대학에서 추방되었다. 모난 돌은 정을 맞았다. 이렇게 해서 대학사회에는 침묵과 무사안일주의가 유행하니 이것은 교권의 포기요 무기력의 극치이다. 그래서 교수는 있되 스승은 없는 대학이 되고 교권은 실종 상태였다. 반면 군사 문화에 아첨 아부하는 어용교수가 날뛰어 존경을 받으려는 대학사회는 뜻있는 양식인의 빈축과 냉소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이 슬픈 우리 대학사회의 현주소이다.

    1991년 어용교수 퇴출이 곧 대학 개혁이라고 여긴 학생운동의 역사를 응축해 보여준 충격적 사건이 일어났다. 정원식 국무총리 서리는 한국외대에서 교수로서의 마지막 강의를 하고 나오다가 학생들로부터 밀가루와 달걀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언론은 패륜적 집단행동이라고 학생들을 질타했다.

    그런 가운데 ‘교수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이 던져졌다. 이런 가운데 김영삼 정부는 대학 개혁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로 인해 교수 사회는 그만 갈 길을 잃고 말았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니…

    우리 사회에서 어용교수라는 용어는 점차 폴리페서라는 용어로 대체됐다. 정치권과 학교를 오가는 교수를 뜻하는 용어인 폴리페서(polifessor·정치를 뜻하는 politics와 교수를 뜻하는 professor의 합성어)는 1980년 3월 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등장한 뒤 2014년 현재까지 우리사회에 널리 통용된다. 한 교수는 지금도 대학가에선 폴리페서가 넘쳐난다고 말한다. 이 교수는 폴리페서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니 학문 연구가 제대로 될 리 없고 재미가 날 리도 없다. 차라리 교수직을 그만두고 정치의 장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낫다. 자신의 지식과 견해를 정치에서 펼치고 정치 프로로서 책임도 진다면 무엇이 문제겠는가. 그러나 이들은 어정쩡하게 양다리를 걸친다. 정치를 하든 학문을 하든 무엇 하나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정치 쪽에서 잘 안되면 다시 교수노릇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1998년 이전엔 주로 보수 성향 교수들이 보수 정권과 야합하는 것이 문제가 됐다. 이후엔 진보 성향 교수들이 진보 정권에 발을 담그거나 편향적 목소리를 내는 것도 문제가 됐다. ‘정권의 홍위병’ 논란이 또 교수 사회를 병들게 했다. 다른 일군의 교수들은 이도저도 아닌 채 학점을 남발하고 적당주의, 온정주의, 보신주의로 일관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은 대충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교수의 지위나 누리며 살자는 쪽이다.

    어용교수의 전성기가 박정희 정부 시기였다면, 폴리페서의 전성기는 노무현 정부 시기였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이른바 ‘코드’가 맞는 교수들이 정부 내 부처와 위원회에 적극 기용됐다. 교수신문은 “노무현 정부를 ‘교수 참여 정부’라고 표현해도 그리 지나치지 않다”는 평을 내놓기도 했다. 독재 권력이 사라지고 민주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독재 미화라는 꼬리표를 단 어용교수란 말은 사라졌지만, 그 어용적 행태는 폴리페서란 이름으로 반복됐고, 교수의 정치 참여를 둘러싼 폴리페서 논쟁을 낳았다.

    ‘교수신문’이 2013년 교수들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는 폴리페서 논쟁의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이 조사에서 교수들은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로 ‘교수의 무분별한 정치 참여’를 꼽았다. 지식인으로서 자율성과 독립성을 가장 위협하는 요소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73.6%가 정치권력과 자본을 꼽았다. 폴리페서 행태와 대학 자율성이 상충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지금도 녹록하지 않다.

    反개혁 ‘슈퍼 甲’ 대한민국 대학교수

    한 대학의 강의실.

    적폐를 관행이라 우겨도 침묵

    2014년 7월을 달군 김명수 교육부 장관 후보 인사 청문회 파동은 정치와 학문에 양다리를 걸친 무책임한 어용교수, 즉 폴리페서의 존재를 새삼 확인해줬다.

    이 청문회가 진행될 때 우리나라 대학교수들은 어떠했는가. 장관 후보자는 마땅히 청산 대상이 돼야 할 교수 사회의 적폐를 관행이라 우겼다. 대학교수들은 이런 모습을 보면서도 가만히 있기만 했다. 이들은 교수 사회의 부조리를 없앨 의향이 없다. 또 현실이 어떠하든 거기에 투항하고 순응해 기득권을 지키고자 한다. 이것이 이 시대 교수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교수들에게도 권리만 있던 옛 시절이 더 좋았다. 권력발(發) 대학 개혁 후 교수는 계약임용제와 성과연봉제라는 직격탄을 맞았다. 교수 철밥통 시대가 끝났고 빈익빈부익부 시대가 찾아왔다. 그럼에도 교수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갑 중의 갑이다.

    그간 황우석 사태를 비롯해 각종 논문 의혹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그때마다 교수의 도덕성이 도마에 올랐다. 그러나 교수 사회는 이를 성찰할 겨를이 없다. 경쟁 문화에 적응하기에 급급했다. 여기저기서 ‘교수는 자영업자’라는 한탄이 들려왔다.

    反개혁 ‘슈퍼 甲’ 대한민국 대학교수

    1981년 학내 문제를 놓고 토론을 벌이는 대학생들.

    성과가 돈과 정교수 직위로 환산되는 낯선 경쟁 문화 속에서 오히려 ‘적폐의 관행화’가 이뤄졌다. 남의 논문 표절, 자기 논문 표절, 제자 공 가로채기는 물론이고 부끄럽게도 성추행, 임용비리, 횡령 같은 범죄조차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구조적 관행이 돼버렸다. 교수들은 부도덕한 ‘관행’에 힘입어 업적 쌓기에 몰두하는 각자도생의 길을 걸어왔다. 소통을 전제로 한 학문공동체란 말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교수의 자정능력 부재 속에 수십 년간의 적폐와 경쟁 문화가 화학적으로 결합하면서 부와 권력과 명성을 좇는 일이 당연시됐다. 권력을 좇는 폴리페서에 이어 돈을 좇는 커미션페서(기업 사외이사 등 각종 영리활동을 통해 부수입을 많이 올리는 교수·commission과 professor의 합성어), 명성을 좇는 텔레페서(television과 professor의 합성어)가 양산된다.

    김명수 교육부 장관 후보 인사 파동에서 드러난 적폐가 후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교수 사회라는 집단의 문제라는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교수 사회는 다른 문제로도 흔들린다. 1월 교육부는 대학 구조 개혁안을 발표했다. 학령인구 감소를 전제한 것이기에 대학과 교수 사회가 받는 압박은 유례없는 것이었다. 대학마다 교육부가 제시한 평가기준을 충족하고 재정 지원을 받기 위해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구조조정이 단행됐다. 극단의 상황에 몰린 일부 교수들 사이에서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이런 일들로 자괴감과 무력감에 빠진 교수들은 4월 세월호 참사로 또다시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일부 교수들은 참회문을 내놓았다. 성균관대 문과대학 교수들은 ‘우리는 스승이 아니었다’라는 선언문에서 “이미 사회 곳곳에서 침몰의 징후가 보이는 비리와 모순이 있었음에도 우리는 승진, 성과급 따기, 연구비 수주 등에만 집착하며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치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전국국공립대학교수회연합회와 한국사립대학교수회연합회도 공동성명에서 “지성의 전당이어야 하고 인재 양성의 산실이어야 하는 대학의 교수로서 과연 얼마나 제자리를 지켜왔는지 되짚어본다”라고 했다.

    다행히도 요즘 들어 교수 사회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커진다. 6월 교수들은 대학을 객관적이고 종합적인 시각에서 연구하고 올바른 해법을 마련하고자 한국대학학회를 창립했다. 희망의 조짐이 보이는 건 반가운 일이다.

    反개혁 ‘슈퍼 甲’ 대한민국 대학교수
    김정인

    1966년 서울 출생

    서울대 역사교육과 학사, 국사학과 석·박사

    춘천교육대 사회과교육과 부교수

    저서 : ‘1960년대 근대화 정책과 대학’(논문)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대사’(공저)


    하지만 부조리는 대학 안에 너무 많이 쌓여 있다. 대학 밖에서의 자극과 압박보다는 교수 사회의 자정 노력이 더욱 시급한 이유다. 그러나 교수들에게 스스로를 개혁하고 대학을 바꿀 동력이 남아 있을까. 솔직히 암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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