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사물들<br>강정 외, 허정 사진, 한겨레출판
천차만별의 음식물은 물론 옷과 집까지, 모두 세상을 떠날 때는 가지고 갈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동식물은 다르다. 동물은 태어날 때나 세상을 떠날 때나 옷도 집도 세간도 필요 없다. 식물은 더욱 몸이 가볍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햇빛만으로도 수백 년, 수천 년을 살아낸다. 사물들은 더더욱 강인한 체력으로 시간의 강력한 하중을 견뎌낸다. 바위들은 수천수만 년의 세월 동안 비바람의 습격을 이겨내며 고요히 그 자리를 지킨다.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보석 또한 인간이 제멋대로 매기는 가격은 매일매일 바뀔지라도 이에 아랑곳 않고 영겁의 세월 동안 저만의 빛깔을 뿜어낸다.
하지만 사물이 지닌 진짜 매력은 단지 그들이 시간의 풍화작용을 인간보다 잘 이겨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으로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사물의 매력은 ‘사물과 인간의 관계맺음’에서 우러나온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는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통해서 사물의 통역 불가능한 목소리를 제한적으로나마 들을 수 있다.
‘시인의 사물들’은 사물을 바라보고 만지고 음미하며 사물과 더 깊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시인의 합창을 담았다. 시인은 속삭인다. “사물은 인간의 감옥에 갇힌 수인들”이라고. 하지만 시인은 아무런 죄 없이 인간의 처분에 내맡겨진 사물들의 속 깊은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침묵을 아름다운 언어로 번역해내는 세계의 영매가 된다. 시인은 침대 하나에서 “우리의 정신을 옮기는 네 다리의 상징물”을 보고, 오래된 타자기에서 “창작의 산고를 겪은 동반자”의 얼굴을 본다.
침대는 안락에서 불안으로 불안에서 안락으로 우리의 정신을 옮기는 네 다리의 상징물이다. 어떤 사람은 거기서 식사를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사랑을 나누며 어떤 사람은 잠을 자기도 한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그들 모두는 안락과 불안 사이를 오가며 이계의 짐승 등에 올라탄 듯한 멀미를 느낀다.
-‘시인의 사물들’ 중에서
소유하지만 멀어진다
사람들이 사물을 구입하고, 소비하고, 무심결에 지나치고, 별 뜻 없이 괴롭히는 동안, 시인은 사물에 깊이 침잠한 영혼의 속삭임을 들으려 안간힘을 쓴다. 현대인은 셀 수 없이 많은 사물을 소유하지만 사물과 교감하는 일에는 점점 무력해져간다. 하지만 시인은 그 무력함에 반기를 든다.
때로는 사물이 그 사람의 캐릭터를 더욱 명징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우리는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그 사람이 애용하는 물건을 통해 그 사람의 별명을 만들기도 한다. 초등학교 시절 내 별명은 ‘수도꼭지’였다. 조금이라도 상처가 되는 말을 들으면 곧바로 수도꼭지에서 수돗물이 콸콸 흘러나오듯 자동적으로 펑펑 울어버리는 성격 탓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다. 차라리 눈물을 흘리고 싶은 순간에도 좀처럼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메말라버린 내 수도꼭지는 슬픔을 표현하는 통로를 잃어버렸다. 가끔은 아무리 참으려 해도 콸콸 눈물이 쏟아지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진다.
우리는 사물을 소유한다. 하지만 때로는 사물이 우리를 소유한다. 휴대전화가 바로 그렇다. 휴대전화를 들고 나오지 않거나 배터리가 떨어지거나 잘 터지지 않으면 우리는 별안간 심각한 불안감에 휩싸인다. 휴대전화는 목줄이 되어 우리의 자유를 감시하고, 노동의 채찍질이 되어 쉬는 날도 쉴새없이 업무를 보게 만든다.
인간은 사물을 소유하지만, 사물이 인간을 소유하는 것에 비하면 우리의 소유는 참으로 나약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우스푸어가 되어 ‘집’이라 불리는 거대한 등짐을 진 채 빚을 갚으며 살아가는 현대인은 ‘집’이라는 사물에 포획돼버린다. 사물에 집착하고 의존하는 순간, 사물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받으려 하는 순간, 우리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이 표현하는 환상적 가치의 그물에 포획당한다. 하지만 어떤 사물은 매우 행복하게, 매우 조화롭게 그 사물의 주인과 따스한 네트워크를 맺는다.
내 어릴 적 별명은 국숫집 막내아들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누구나 나를 그렇게 불렀다. 내 몸도 국수처럼 가늘고 길었다. 학교에서 별명도 국수였다. 난 그렇게 불리는 게 싫었다. 그러나 나는 국수를 사랑했다. 형들은 국수를 가난의 상징처럼 여겼지만 나는 국수가 말라가는 마당에서 보는 파란 하늘을 미친 듯이 좋아했다. 그래서 절대로 국수를 싫어할 수 없었다. 마당에서 국수가 흔들리며 마르는 동안 나는 그 밑에서 졸았고 그 밑에서 키가 컸다. 어쩌면 생각도 키만큼 자라지 않았을까 싶다.
-‘시인의 사물들’ 중에서
흔적에서 숨결을 듣다
타자기는 컴퓨터에게 모든 영광을 내주기 전까지 근대를 열었던 문호들의 책상에서 그들과 함께 창작의 산고를 겪은 동반자였다. 헤밍웨이, 제임스 조이스, 조지 오웰의 사진을 떠올릴 때 그들의 배경 속에는 늘 타자기가 있다.
-‘시인의 사물들’ 중에서
시인들의 사물에 얽힌 추억을 엿보며 나는 문득 아련한 향수에 빠져들었다. 어린 시절 나보다 더 나를 잘 알던 사물은 우리 집의 낡은 피아노였다. 친구에게 상처받았을 때도,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야단맞았을 때도, 피아노는 사람보다 더 따뜻한 벗이 돼주었다.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피아노를 친 건 아니었다. 그냥 피아노가 좋아서 쳤다. 어린 시절의 내가 지금보다 훨씬 훌륭한 점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진 노동의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 일 자체에 흠뻑 빠져든 적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는 것. 지금보다 훨씬 서툴고 어리바리했지만 지금보다 훨씬 순수하게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 현재의 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예전의 나다.
아주 친한 사람들에게는 서툴지만 내 피아노 소리를 들려주기도 했다. 내 마음 속에서 어린 시절과 어른이 된 이후의 시절을 구분해주는 경계선이 바로 피아노였던 것 같다. 누가 뭐라든 피아노를 열심히 치던 나, 감정의 해일이 밀려올 때마다 혼자 피아노를 치며 마음을 달래던 시절의 나는 아직 순수했던 것 같다.
내가 피아노를 치지 않게 된 것은 대학을 졸업한 이후였다. 늘 만나던 선후배들과 급작스럽게 멀어졌고, 친구들도 하루가 다르게 취직과 결혼과 유학과 이민으로 흩어져갔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음악을 들려줄 만한 여유, 나 자신의 마음을 음악으로 달랠 수 있는 소박한 마음가짐을 잃어버렸다. 항상 영혼의 허기를 느꼈고,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점점 잊어버렸다. 글쓰기조차 음악을 대체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편안한 에세이를 써도 최소한의 논리와 구조의 그물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음악은 논리도, 자기검열도, 타인의 시선도 벗어난 그 자리에 있었다. 피아노가 없었다면 초중고교 시절은 물론 대학 시절까지 상처받기 쉬운 내 영혼이 어떻게 견뎠을까 싶을 정도로, 피아노는 내게 최고의 친구였다.
언제부턴가 나는 내 피아노를 그저 단순한 ‘마음의 울림’이 아닌 ‘평가의 대상’으로 삼게 됐다. 언제부턴가 나는 내가 피아노를 잘 못 친다는 생각 때문에, 나보다 잘 치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생각 때문에 피아노를 놓아버렸다.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그저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사실 자체에 더없이 만족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나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은 컴퓨터, 휴대전화 같은 것이 돼버린 것은 아닐까. 만약 내가 이런 것들을 잃어버리면 내 정보를 있는 대로 긁어모아 통째로 온갖 적에게 떠넘겨주는 결과가 돼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예쁜 수첩을 하나 샀다. 휴대전화란 차가운 기계 위에 내 영혼의 흔적을 집약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나는 오늘도 온갖 사물에서 잃어버린 내 자신의 영혼을 찾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사물에서 인간이 아닌 사물 자체의 열망과 한숨을 듣는 사람이 되고 싶다.
찌톱에 케미라이트를 꽂아 불을 밝힌다. 파란 찌불은 수면에 별처럼 떠서 깜빡거린다. 이제 머잖아 어신이 올 것이다. 아니 어쩌면 밤새도록 한 번도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쁜 애인을 보듯 찌를 본다. 어, 그런데 어쩐 일인가? 거기 유체이탈이라도 한 듯 내가 당신이 세상을 살아가는 온갖 것들이 서 있는 게 아닌가? 나날이 힘겨워지는 밥벌이며 보살펴야 할 가족이며 의무들을 추처럼 달고 사는 훨훨 어디 다른 곳으로 다른 것이 되어 날아가고 싶은 욕망을 팽팽히 견디면서는 깊디깊은 제각기의 삶 속에 줄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절대 무너질 수 없는 직립의 자세로.
-‘시인의 사물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