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어로 하니 깊이 얕아져”
- “질문도 토론도 없다”
- “아시아에선 수준 높은 편”
대학 영어 강의에 대한 외국인 학생 응답자의 답변 내용.
2013년 한 언론사의 대학 평가에 따르면 전체 강의에서 영어 강의가 차지하는 비율 1위 대학이 84.8%, 10위 대학이 36.7%였다. 대학 평가는 대학에 대한 평판이나 정부로부터의 지원에 영향을 준다. 대학 평가에서 영어 강의 비율이 중요한 지표로 사용되자 대학들이 앞다퉈 영어 강의를 늘리는 추세다.
하지만 수업의 질이나 만족도와 관련해선 논란이 지속된다. 우리는 서울시내 이른바 중상위권 17개 대학에 다니는 외국인 교환학생·유학생과 한국인 재학생을 대상으로 영어 강의 만족도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카카오톡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설문조사 링크를 배포해 답변을 수거하는 방식으로 조사를 진행했는데, 외국인 교환학생·유학생 31명과 재학생 117명이 답변을 해왔다. 이어 답변자들 중 일부와 대면 인터뷰를 실시했다.
“사례 설명 빠뜨려”
조사 결과, 서울 지역 대학의 재학생과 외국인 교환학생·유학생 상당수는 “영어 강의의 질이나 만족도가 충분치 않다”고 답했다. 또 “수강생의 수업에 대한 참여도와 이해도도 낮은 편”이라며 “수강생이 수업시간에 말문을 닫아버린다”고 했다.
이들의 답변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면, 응답자의 45%는 “영어 강의에서 교수의 의사소통 능력이 유지된다”고 긍정적으로 답했다. 그러나 31%는 “의사소통 능력이 유지되지 못한다”고 했다. 또한 응답자의 51%는 “교수가 한국어로 강의할 때 강의 내용이 훨씬 좋아진다”고 답했다.
미국에서 온 라이젤리 마디리(21) 씨는 “몇몇 교수는 매우 자신 없는 톤으로 강의를 진행한다. 영어 강의임에도 가끔 부분적으로 한국어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럴 땐 수강하는 몇몇 외국인 학생은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프랑스 국적의 크리스토프 페로이드 씨도 “일부 교수는 어떤 내용을 영어로 설명할 수 없어 한국어로 설명한다. 그런데 영어로 번역을 해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 출신 이멜다 찬드라 씨도 이런 지적에 동의하면서 “교수들이 훨씬 쉬운 영어 단어로 설명해 준다는 장점도 있다”라고 덧붙였다.
김모(23· S대 수학과) 씨는 “영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하는 교수님은 많지 않다. 한국어를 더 잘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영어로 수업할 때 너무 버벅대면 문제가 된다. 전달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K대 재학생들은 몇몇 영어 강의에 대해 “교수가 말하는 영어를 알아듣기 힘들다”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영어 강의의 질이 다소 낮다”와 같은 비판적인 글을 교내 강의 평가 사이트에 올렸다. 이 대학의 한 교수는 영어 강의를 진행하는 게 무리라고 판단해 원래 영어로 진행하던 수업을 최근 우리말 강의로 바꿨다.
응답자들은 대면 인터뷰에서도 “교수가 강의를 영어로 진행할 때와 한국어로 진행할 때 내용의 깊이가 달라진다”고 지적했다. 아래는 장모(22· K대 경제학과) 씨의 설명이다.
“2학년 때 들은 전공 수업은 각각 영어와 한국어로 개설됐다. 학기말에 두 강의를 들은 수강생들이 비교해봤는데 언어에 따라 수준 차이가 났다. 영어 강의가 같은 진도를 나갈 때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이 때문에 내용을 얕게 훑었다. 영어강의에선 경제 개념을 찬찬히, 깊이 있게 파고들지 않았다. 한국어 강의와 달리 개념에 관한 사례를 거의 설명해주지 않았다. ‘이쯤 하면 됐다’는 식으로 넘어갔다. 영어 강의 수강생은 추상적 지식만 얻은 채 종강을 맞았다.”
“수강생 한두 명만 교수와 소통”
응답자의 37%는 “나의 영어 강의 이해도가 한국어 강의 이해도보다 떨어진다”고 답했다. 42%는 “영어로 시험 답안이나 과제를 작성하는 게 부담이 됐다”고 했다. 56%는 “교수가 영어 강의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한 대책을 전혀 내놓지 않았다”고 했다. 이에 따르면 학생들은 한국어 강의에 비해 영어 강의에서 실질적으로 얻어가는 지식이 더 적은 것으로 보인다.
이모(21·Y대 심리학과) 씨는 “일반적으로 학생들의 이해도가 영어 강의에서 더딘 편이다. 그렇지만 교수는 딱 강의만 할 뿐이다. 보충 자료를 올려주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말했다.
강모(24· H대 경영학과) 씨는 “지난 해 들은 영어 강의는 교수가 강의시간엔 영어로 강의하되 강의 직후 5분간 희망자들에 한해 한국어로 핵심 내용을 정리해줬다. 이런 방법이 인기가 있었다. 학기말이 될수록 희망자가 늘었다”고 말했다.
영의 강의에서 ‘이해도 저하’ 못지않게 우려스러운 점은 ‘참여도 저하’였다. 응답자의 49%는 “영어 강의에서는 수강생의 질문, 토론, 발표가 현저하게 감소한다”고 답했다. 박모(23· E대 경영학과) 씨는 “내 영어 실력이 좋지 못해 질의시간에 가만히 있는 편”이라고 말했다. 이어 “수강생의 영어 실력 차이가 학점 차이로 그대로 이어진다. 발표나 과제 때 영어실력이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되도록이면 영어 강의를 안 들으려 한다”고 했다.
대면 인터뷰에 응한 상당수 응답자는 “영어 강의에선 수강생 30~80여 명 중 한두 명만 교수와 제대로 소통한다”고 말했다.
“영어 강의의 증가로 꼭 익혀야 할 전공 지식을 충분히 익히지 못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이들은 듣고 싶은 강의가 있어도 대부분 영어 강의라 망설이게 된다고 말했다. 이모(22·Y대) 씨는 “전공 필수 수업이 영어로만 개설돼 불편하다. 완전하게 이해해 기초를 다져야 하는 수업이 전공 필수 수업인데 영어로 진행되니 그러지 못한다. 전공 필수 수업은 한국어로도 개설돼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대학생의 영어 실력이 과거에 비해 향상됐지만 아직 상당수가 영어로 듣고 말하고 쓰기엔 능통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대학생들의 평균적 영어 능력과 영어 강좌 증가 간에 괴리가 발생한다는 이야기다. 미국에서 온 마리아 스트라우코프(20) 씨는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어로 된 강의가 부족하다는 점을 느낀다”고 말했다.
대학 사회의 딜레마
그러나 외국인 교환학생·유학생 중 다수는 서울지역 대학들의 영어 수준에 대해 “영어가 비공용어인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인 교환학생 마리아(20·K대 경영대) 씨는 “한국이 영어 공용어 국가가 아님에도 상당수 영어 강의는 수강생들이 집중할 수 있게 한다. 이는 놀라운 일”이라고 말했다.
특히 중국인 유학생의 78%는 “영어강의 수준이 높고 영어 실력 향상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긍정적으로 답했다. 다음은 중국인 유학생 장모(22·K대 미디어학부) 씨의 말이다.
“한국어 강의와 영어 강의 중 영어 강의의 이해도가 훨씬 높다. 한국어 강의에선 과제를 할 때마다 힘들었고,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지 못해 좋은 점수를 받지못 했다. 그래서 영어 강의 위주로 수업을 듣는다. 단어 뜻 하나하나에 집중하지 않아도 전체 강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돼 얻는 것도 더 많아졌다.”
영어 강의 확충이 재학생의 영어 실력을 향상시킨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강모(24·H대학 경영학과) 씨는 2014년도 1학기 전공 강의 중 한 과목을 영어 강의로 들었다. 한 학기 동안 강씨는 영어로 과제물을 네 번 냈고 수업 중 한 번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이를 위해 밤늦게까지 어휘와 문법을 공부했다고 한다.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발음 연습도 했다고 한다. 강씨는 “영어 실력이 자연스럽게 늘어 토익 스피킹 시험 준비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이모(22·Y대 응용통계학과) 씨는 “학술논문 같은 추가 자료는 대부분 영어로 돼 있다. 전공 수업을 영어로 들어두는 게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김모(23·S대 수학과) 씨도 “영어는 세계 공용어이기 때문에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영어로도 자신의 전공을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했다.
대학 영어 강의. 분명 문제점이 많고, 상당수 학생이 학업에서 비효율과 스트레스를 감수하는 형편이다. 그렇다고 영어 강의가 거의 없던 과거로 돌아가기도 어렵다. △대학 평가에 목매는 관행 △영어를 아주 잘하지도 영 못하지도 않는 현실 △언어적 주체성이 국제화 논리에 지속적으로 밀리는 풍토가 낳은 한국 대학사회의 딜레마다.
※ 이 기사는 고려대 미디어학부 ‘미디어글쓰기’ 과목 수강생들이 취재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