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재학 중인 남녀 대학생들이 유럽 각국을 돌며 ‘아두이노’라는 공학교육 콘텐츠를 활용하는 교육 및 산업 현장을 둘러봤다. 학생들은 이번의 체험을 토대로 국내 상황을 반영해 대중적 공학교육 커리큘럼을 개발하고 벤처기업 창업에 나설 계획이다.
‘아이프로’ 팀원들이 카를스루에 미디어 아트센터 ZKM을 방문해 전시된 애플리케이션을 직접 체험해 보고 있다.
다른 제품들도 마찬가지였다. 세탁기는 세탁 기능이 탁월하다는 점이 부각됐고, 자동차도 그저 잘 달리고 잘 멈춰야 좋은 차로 꼽혔다. 20세기에는 이처럼 제품의 본래 기능을 특화하고 전문화하는 데 역량이 집중됐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일대 혁신이 이뤄졌다. 혁신을 몰고 온 대표적인 제품이 스마트폰이다. 이름은 스마트폰이지만 ‘폰’이라는 전화 기능보다 ‘스마트’한 부가기능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게 현실이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주변을 한번 둘러보라. 스마트폰을 손에 든 이 가운데 통화를 하는 사람이 많은지 아니면 게임이나 TV 시청, 뉴스 검색,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접속하는 사람이 더 많은지.
스마트폰은 단순히 전화기와 컴퓨터의 결합 수준을 뛰어넘는다. 이제 소비자는 더 이상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소비하는 스마트 유저 수준에 만족하지 않는다. 자신의 구미에 맞는 기능과 성능을 가진 도구(tool)를 스스로 선택, 자기만의 기기로 만들어 직접 정보를 생산하고 심지어 정보 유통에 관여하는 ‘스마트메이커&유저’로 진화했다.
스마트폰이 온라인을 통해 스마트 유저를 뛰어넘어 스마트메이커 · 유저 수준에 이르게 했다면, 오프라인에서 자신이 원하는 공학 제품을 스스로 만들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아두이노’다. 카이스트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서석현 씨는 “지금 나와 있는 키트가 조립식 장난감 수준이라면 아두이노는 레고에 비유할 수 있다”며 “조립식 장난감이 하나의 완성품만 만들 수 있는 데 반해 아두이노는 제작자가 구상하는 구조에 맞게 부품을 조합하면 다양한 창작물로 얼마든지 변형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작은 컴퓨터 ‘아두이노’
아두이노는 한마디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세탁기, 전자레인지, 전광판, 게임기 등 전자제어가 필요한 모든 기기 속의 컴퓨터 CPU(중앙처리장치) 기능을 담당하는 작은 컴퓨터다. 모터를 돌리고 전구에 불을 켜고 센서로 다양한 값을 측정하는 데 아두이노가 사용된다. 기존 공학 제품과 아두이노가 다른 점은 다루기가 매우 쉽고 간단해서 누구나 스스로 원하는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기존 공학 제품은 공학 전공자들이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해 설정하고 회로를 납땜해 기능토록 하는 데 몇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아두이노를 활용하면 누구나 단 몇 분 만에 만들 수 있다. 이런 편리성 때문에 공학 개발자뿐 아니라 예술가, 학생, 교사 등 다양한 직업군에서 다양한 목적으로 아두이노를 사용하고 있다.
카이스트에서 산업디자인, 컴퓨터공학, 생명화학공학을 전공하는 4명의 대학생은 ‘아두이노를 활용한 공학교육 대중화 선도’에 의기투합했다. 이들은 한국장학재단의 후원으로 7월 21일부터 8월 3일까지 영국, 벨기에, 독일, 이탈리아 등을 돌며 아두이노를 활용하는 교육 및 산업 현장을 두루 살펴봤다. 한국장학재단은 ‘대학생들이 꿈과 열정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며 우리은행이 기부한 돈을 재원으로 방학 중에 대학생 해외탐방단(지구별꿈도전단)을 선발해 지원해왔다. 카이스트 학생들로 구성된 이번의 ‘아이프로’팀은 ‘아두이노를 활용한 유럽의 공학교육 대중화 현장 답사’를 주제로 응모해 선발됐다.
‘아이프로’팀은 첫 방문국인 영국에서 프로그래밍 교육을 위한 아두이노 기반 장난감을 개발하는 기업 ‘프리모’를 찾았다. 카이스트 김보람 씨(산업디자인)는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학위를 취득한 공동 창업자들로부터 유럽 프로그래밍 교육의 핵심과 비전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며 “기존의 일회성 장난감에 비해 프리모 제품에 어떤 차별성이 있는지, 어떤 방법으로 현재의 트렌드에 부합하고 있는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카이스트 이현송 씨(생명화학공학)는 “영국에서는 많은 사립학교가 차별화한 교육을 위해 새로운 교육 콘텐츠로 아두이노를 공학교육에 활용하고 있다”며 “조만간 한국에서도 이 같은 흐름이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21세기 교육의 핵심 키워드는 창의성과 융합이다.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창의적 융합 역량이 필수다. 그러나 우리 교육 현장의 현실은 융합과 거리가 멀다. 수학, 과학, 미술 등 제각기 별도 과목으로 다뤄져 따로 논다. 더욱이 공학교육은 제도권 교육의 관심 밖에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미디어 아트센터 ZKM
서석현 씨는 “외국에서는 소프트웨어를 바탕으로 한 융합교육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며 “세계 공용어인 영어교육만큼이나 소프트웨어에 대한 교육 비중이 높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 개발한 교육용 프로그램 ‘스크래치’는 동작, 제어, 형태 등 100여 개의 블록을 사용해 게임과 미디어아트, 간단한 애니메이션 등을 만들 수 있어 학생뿐 아니라 컴퓨터 언어 비전공자도 쉽게 배우고 따라 할 수 있다”며 “미국 영국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스크래치’가 커리큘럼에 포함돼 공학교육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다”고 전했다. 최근 개발돼 세계에 널리 알려지고 있는 아두이노 역시 어린 학생들에게 공학을 쉽게 가르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교육 커리큘럼에 포함되는 추세라고 한다.
아두이노는 단순히 공학교육 수준에 그치지 않고 학생이 이를 활용한 아이디어로 만든 제품으로 출시되기에 이르렀다. 화분에 있는 흙의 수분량을 스스로 측정해 물이 부족하면 화분 주인에게 물을 달라고 트위터 메시지를 보내는 식물은 대중화에 성공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실제로 선진국에서는 공학교육이 제품화로 이어질 정도로 아두이노를 활용한 교육법이 성행하고 있다. 런던의 유명 사립학교에서는 새로운 교육 콘텐츠로 아두이노를 선택해 이미 본격적인 관련 수업이 이뤄지고 있다.
대학도시로 일컬어지는 독일 카를스루에에는 예술가는 물론 학생들이 만든 작품도 전시하는 미디어 아트센터 ZKM이 있다. TV와 예술을 접목해 비디오아트라는 새 지평을 연 백남준처럼 아두이노도 초창기에는 주로 예술가들이 인터랙티브한 작품을 만드는 데 사용됐다. 그러나 이제는 예술가뿐 아니라 아두이노를 활용한 공학교육을 이수한 학생들이 자기 힘으로 작품을 만들어 전시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ZKM은 2개층에 걸쳐 인터랙티브한 예술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식물을 쓰다듬으면 화면에서 가상식물이 자라는 작품, 바코드를 찍으면 가상공간에 사물이 생기는 작품, 바닥에 물건을 놓으면 그 물건이 장애물이 돼 레이싱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고안된 컴퓨터 게임 등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이 많다.
카이스트 이혜인 씨(산업디자인)는 “ZKM에 전시된 작품들을 둘러보니 사람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요소가 많아 좀 더 친근하고 재미있는 아두이노 교육 콘텐츠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김보람 씨도 “이곳 작품들을 통해 아두이노를 활용하는 다양한 방법, 그리고 교육 콘텐츠를 만들 때 어떤 창작적 요소를 가미해야 이용자가 더 즐겁게 사용할 수 있을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공학교육 인프라 Fab Lab
유럽에서 아두이노가 교육 콘텐츠로 각광받으면서 아두이노를 활용한 공학교육은 물론 아두이노를 실제로 활용해 창작할 수 있는 팹랩(Fab Lab)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팹랩은 ‘제작 실험실(Fabrication Laboratory)’의 약자로 디지털 장비와 오픈소스 하드웨어 등을 활용하면 누구나 간단하게 시제품을 제작할 수 있는 공간이다.
‘아이프로’팀은 벨기에에 있는 팹랩 iMAL과 이탈리아의 토리노 팹랩을 방문했다. 1999년 설립된 벨기에 최초의 팹랩 iMAL은 아트센터이자 미디어랩으로 아티스트는 물론 엔지니어와 과학자, 학생과 일반인 등 아두이노에 관심 있는 모든 이의 창작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아두이노를 보급하는 데 크게 기여한 토리노 팹랩도 토리노에서 가장 큰 팹랩답게 회원들의 이용과 활동이 활발하다고 한다
이현송 씨는 “이탈리아와 벨기에 등 유럽 각국에서 벤처기업과 개인에게 장소를 제공해줌으로써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서로 만나 시너지 효과를 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며 “카이스트 교내에 ‘아이디어 팩토리’라는 팹랩과 비슷한 공간이 있는데, 벨기에 iMAL과 토리노 팹랩을 직접 둘러보니 한국에도 더 많은 커뮤니티 팹랩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