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이 7월 10일 국회에서 열린 세월호 침몰사고의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청와대 대통령실 기관보고에 출석했다.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가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에게 물었다.
“대통령이 처음 서면보고를 받은 (세월호 참사) 당일 오전 10시, 대통령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그 위치에 대해서는 제가 알지 못합니다.”
김 비서실장의 이 한마디 답변이 논란의 단서가 됐다. 대통령이 비서실장도 모르게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마침 그 즈음 증권가 정보지(지라시)에는 박 대통령과 정윤회 씨의 사적인 관계에 대한 루머가 퍼졌다.
정씨는 박 대통령이 국회의원이던 1997~2004년 비서실장 격으로 활동했다. 그는 박 대통령이 퍼스트레이디 시절 각별했던 고(故) 최태민 목사의 사위였다. 7월 14일 정씨가 부인과 이혼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됐다. ‘결혼 생활에 대해 발설하지 않는다’는 등 흔치 않은 이혼 조건이 알려지면서 세간의 입방아는 더욱 거세졌다. 김 비서실장이 세월호 침몰 당일 대통령의 행적을 몰랐던 것이 사생활, 혹시 정씨와 관련된 때문 아니냐는 억측이 제기됐다.
7월 18일자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의 ‘대통령을 둘러싼 풍문’이라는 제목의 칼럼은 논란을 더욱 키웠고, 그 논란에 기름을 부은 건 생뚱맞게도 일본 산케이신문이었다. 산케이신문은 8월 3일자 ‘박근혜 대통령 여객선 침몰 당일 실종, 누구와 만났을까?’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박 대통령과 정씨가 사적인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도했다. 산케이신문은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 신문으로 최근 유흥수 주일대사 내정 엠바고(보도 유예)를 고의로 어겨 청와대 출입 등록이 말소된 상태였다.
조윤선 정무수석비서관과 윤두현 홍보수석비서관은 나흘 뒤인 8월 7일 청와대 기자실을 찾아와 이례적으로 “산케이신문에 대해 민형사상 책임을 묻겠다”고 강력 대응을 천명했다. 그리고 다음 날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당일 청와대 경내에 있었다”고 해명했다. 논란이 시작된 지 한 달 동안 쉬쉬하다 뒤늦게 청와대가 해명에 나섰지만 한번 불붙은 논란의 불길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들은 박 대통령은 4월 16일 하루 종일 청와대 경내에 있었고 정씨와 만난 일도 없다고 얘기한다. 그동안 대통령의 행적이 논란이 된 적은 거의 없다. 경호상 대통령 동선(動線)은 공식 일정 외에는 밝히지 않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 그러나 이번에 예외적으로 대통령의 동선이 관심을 받게 된 건 정권이 자초한 면이 크다.
5시간의 잘못된 보고
가장 큰 원인은 대통령이 당일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5시간 넘게 잘못된 보고를 받았다는 데 있다. 박 대통령은 오전 10시 김장수 당시 국가안보실장으로부터 세월호 사고가 발생했다는 첫 번째 서면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15분 뒤 박 대통령은 김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자세한 상황을 확인한 뒤 해양경찰청장에게 내릴 지시를 전달한다.
김 실장은 해경청장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헬기를 타고 있던 터라 통화가 되지 않았다. 이에 국가안보실은 해경에 “단 한 명도 인명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 여객선 내의 객실, 엔진실 등을 포함해 철저히 확인해 누락되는 인원이 없도록 하라”는 대통령의 지시를 전달했다. 그리고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10시 30분 관련 내용을 기자들에게 브리핑했다. ‘단 한 명의 인명피해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린 시각은 300여 명의 탑승객이 배와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뒤였다. 그 이후 거의 30분 단위로 국가안보실과 비서실은 박 대통령에게 서면 및 구두 보고를 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해경, 안전행정부 등 곳곳에서 보고를 받았는데 그 보고 내용이 조금씩 달랐다고 한다. 한동안 해경의 보고는 탑승객 370명이 모두 구조됐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 핵심 라인은 세월호 당일 점심식사를 하면서 “그나마 천만다행”이라며 안심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구조자가 172명뿐이고 300명이 넘는 인원이 배 안에 남아 있었다는 건 당시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