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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25분 만에 귀순해 10년 만에 박사모 쓰다

탈북 청년 주승현의 고군분투 서울살이

  • 글·주승현 | 북한이탈주민·통일학 박사 joosy3050@naver.com 정리·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25분 만에 귀순해 10년 만에 박사모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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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분 만에 귀순해 10년 만에 박사모 쓰다

지난해 7월 18일 JSA 경비대대 대원들이 비무장지대(DMZ) 내 대성동마을 인근 밭에서 일하는 주민을 경호한다. 주승현 씨는 DMZ를 뚫고 25분 만에 탈북했다.

그러던 중 나는 ‘벼룩시장’의 구인광고를 통해 종로에 있는 일식당에 취직했다. 내가 맡은 업무는 배달과 주방 일이었는데 한국인이 8시간 일할 때 나는 12시간 일했다. 그럼에도 월급은 그들보다 적었다. 그때 처음으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유 사회에 온 것은 맞지만 이 사회를 배우지 않고서는 평생을 열등한 타자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던 듯하다. 나는 월급의 절반을 떼어내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에 있는 대입학원에 등록했고 일이 끝나면 학원으로 갔다.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탈북자가 무슨 대학이냐고 빈정댔지만 나는 하루 3시간을 자며 일하고 공부했고 마침내 그해 가을 대학시험을 치러 합격통지를 받았다.

나는 북한에서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었다. 직업군인이 꿈이었던 나는 어려서부터 국방체육을 전공했고 수업에 참가하는 날보다 경기 일정으로 학교와 집을 떠나 있는 날이 더 많았다. 학교를 졸업하던 열일곱 살 나이에 곧바로 군에 입대해 6년간 DMZ 안에서 근무하다 한국으로 왔으니 학업의 공백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공부해야만 했다. 고려대 경영학과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동시에 합격한 나는 최종 선택에서 거주지에서 가까운 고려대가 아닌 연세대를 골랐다. 그 이유는, 얼마 안 되는 한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내가 ‘분단의 사생아’임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경영학을 공부해 좋은 기업에 취직하는 목표도 가질 수 있었지만 정치학을 통해 설움 가득한 삶을 강요케 한 한반도의 분단 구조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첫 탈북자 통일학 박사

입학 전 들떴던 마음과 달리 대학 생활은 최악이었다. 남북한의 서로 다른 교육과정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공부에 대한 취미는커녕 요령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혈혈단신이다보니 얼마 안 되는 생계지원금으로 집세를 내고 나면 교통비나 밥값도 남지 않았다. 입학하자마자 경제적 어려움으로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첫 학기 성적은 말이 아니었다. 탈북 대학생의 경우 사립대학 등록금을 국가와 대학에서 절반씩 장학금으로 지급하는데,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거둬야 수업료를 지원받을 수 있다. 성적이 나빠 장학금을 지원받지 못한 나는 스스로 등록금을 해결해야 했다. 호프집 아르바이트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 일식당과 건설 현장으로 일을 다녔다. 수업 후 도서관으로 가는 친구들을 부럽게 바라보면서 일터로 가야 했던 대학 시절은 아직까지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있다.



교재를 살 돈도 없었지만 그래도 공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도서관이나 대형서점에서 선 채로 책을 읽으면서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부교재를 빌려보려고 6개의 도서관을 다닌 적도 있다. 책을 찾아 돌아다니면서 닳고닳은 신발 밑창 값이 교재 값보다 더 많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시험기간에는 일주일이나 열흘씩 아예 도서관 의자에서 자면서 공부했는데 군 시절에 체득한 인내심이 큰 도움이 됐다.

그렇게 두 학기 등록금을 직접 내고서야 성적이 올라 장학금을 받았고 그제야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친구를 사귀는 것만큼은 어려움이 없었던 나는 여러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캠퍼스의 낭만도 만끽했다. 대학 3학년 때는 산악동아리를 맡아 이끌었고 학교 친구들과 민속문화반을 결성해 방방곡곡 돌아다녔다.

생활은 어려웠지만 휴학하지 않고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대학을 졸업한 탈북 학생을 심심찮게 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대학에 입학하고도 실제로 졸업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특히 한 번도 휴학하지 않고 졸업한 사례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 졸업 후 나는 국회(국회의원 보좌관)와 두 곳의 대기업에 다니며 대학원에 진학했고 대학원에서도 한 번의 휴학 없이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22세 때 귀순해 10년 만에 탈북자 최초로 통일학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다.

아웃사이더의 정체성 찾기

나는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던 듯하다. 앞서 밝힌 것처럼 군인 가정에서 태어나 DMZ에서 군인으로 근무하다 온 나에게 한국은 머리나 가슴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냉정한 자본주의 경쟁 사회였다. 나는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다. 어떤 사람들은 군인 출신이어서 국가적 대우나 보상이 더 많았을 것이라고 하는데, 2000년 이후 군 귀순자에 대한 배려와 대우는 소멸됐고 오히려 군 출신 귀순자는 춥고 어두운 동면을 강요당했다. 첨언하자면 가지고 온 무기의 보로금(報勞金·반국가 단체나 그 관련 구성원으로부터 금품을 취득해 수사기관이나 정보기관에 제공했을 경우 금품 가격에 따라 국가가 지급하는 돈)조차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는데, 관계자의 말을 빌리면 내가 가지고 온 무기(AK자동소총)는 동대문시장에서 25만 원이면 구입할 수 있을 만큼 가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또 언젠가 나는 탈북 학생들이 안보 강연이나 특정 재단의 지원으로 생활비와 등록금을 충당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정작 군인 출신인 나에게는 그러한 기회조차 없었다. 게다가 어린 나이에 혼자 지내다보니 탈북자 사회에서도 상대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있어 내적 모순과 외적 도전을 함께 이겨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비록 아웃사이더의 위치일지라도 그 위치가 품은 다양한 면을 건전하게 고찰하고 정신적 인내를 배운다면 훨씬 더 많은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탈북자에 대한 고리타분한 편견이 사회적 주홍글씨로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국회의 별정직 공무원과 대기업 사원으로 일한 것은 귀순자에 대한 푸대접에 낙담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대학 진학과 관련한 비웃음에도 개의치 않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인내심을 갖고 위기를 기회로, 단점을 강점으로 바꾸려고 힘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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