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짓밟아라. 더욱 꼿꼿이 일어설 것이다.”
묵사(默史) 류주현(1921∼1982)의 장편소설 ‘조선총독부’(전 3권·나남)가 8월 15일(광복절) 복간됐다.
일제강점기는 어느덧 기억과 망각의 경계에 서 있다. 오욕의 역사를 망각하면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일본은 7월 1일 집단자위권 행사가 합헌이라는 이른바 해석개헌을 통해 ‘전쟁 할 수 있는 나라’가 됐다. “야욕(野慾)이란 좀처럼 체념되지 않는 것. 흐르는 물줄기처럼 줄기찬 것”(‘조선총독부 1권 40쪽)이다.
아베 내각이 우경화, 역주행에 나서면서 한일관계가 위태롭다. 일제강점기는 한일 갈등의 뿌리다. 등장인물만 1700명에 달하는 ‘조선총독부’는 일제강점기 오욕의 역사에 돋보기를 들이댄 대하소설이다.
허허, 다 허사가 됐단 말인가. 단군 이래 연면(連綿) 몇 천 년인가. 조선조는 몇 백 년을 이었는가. 이제 왜인 총독 치하에서 살아야 하는가. 그 많은 백성이 그렇게 울부짖고, 그 많은 의인들이 그토록 아까운 목숨을 바쳤는데, 하늘은 저렇게 푸르고 산하는 저렇게 아름다운데, 이제 이 나라는 망했다는 것인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일인 총독이 저들을 위해서 한민을 다스리고, 저들을 위해서 이 강토를 개발하고, 저들을 위해서 ‘조선놈들’은 살 테면 살아보라는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 어디 이제부터 네 행적을 보자!
-1권 133쪽
1910년의 겨울은 춥고 술렁거리고 떨리기만 했다. 1945년의 봄, 강산에 꽃은 난만하게 피었어도 이해의 봄은 사뭇 음울했다. 조선총독부는 35년간 민족의 강토를 수탈했다.
“한쪽 눈꼬리로부터 광대뼈 위를 스쳐서 귀 아래까지 주욱 그어진 칼자국 상처를 훈장처럼 자랑스러워하는”(1권 169쪽) 경무총감실 고등과장 구나도모의 얼굴은 조선총독부의 그것에 다름 아니다.
“각하! 기생은 체온이 없는 한낱 노리개일 뿐입니다.” 여인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밤시중을 들면서 환상에 사로잡힌다. ‘내 체온만으로 호흡이 꽉 막히게 해서 싸늘한 시신을 만들어버릴 수 없을까.’(1권 117쪽)
“오는 봄을 흐느껴 울었다”
눈보라의 항구에도 봄은 찾아오게 마련이다. 빼앗긴 산천에도 해마다 봄은 왔지만 ‘춥고 술렁거리고 떨리기만’ 했다. 광화문이 헐리고 조선총독부가 섰다. 남자는 군인으로, 여자는 성노예로 끌려갔다. 나랏말은 학교에서 사라졌다.
1934년을 그린 3권 12절 ‘지금은 빼앗긴 땅’(3권 190쪽)에 실린 이상화의 시를 읽는 감흥이 교과서에서 실린 그것을 읽을 때와는 다르다. 1910년부터 조선총독부의 행적을 따라와서일 터.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는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으로 가듯 걸어만 간다.
(…)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닿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서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는 걷는다. 아마도 봄신명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