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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사물들

  •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사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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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에서 숨결을 듣다

타자기는 컴퓨터에게 모든 영광을 내주기 전까지 근대를 열었던 문호들의 책상에서 그들과 함께 창작의 산고를 겪은 동반자였다. 헤밍웨이, 제임스 조이스, 조지 오웰의 사진을 떠올릴 때 그들의 배경 속에는 늘 타자기가 있다.

-‘시인의 사물들’ 중에서



시인들의 사물에 얽힌 추억을 엿보며 나는 문득 아련한 향수에 빠져들었다. 어린 시절 나보다 더 나를 잘 알던 사물은 우리 집의 낡은 피아노였다. 친구에게 상처받았을 때도,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야단맞았을 때도, 피아노는 사람보다 더 따뜻한 벗이 돼주었다.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피아노를 친 건 아니었다. 그냥 피아노가 좋아서 쳤다. 어린 시절의 내가 지금보다 훨씬 훌륭한 점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진 노동의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 일 자체에 흠뻑 빠져든 적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는 것. 지금보다 훨씬 서툴고 어리바리했지만 지금보다 훨씬 순수하게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 현재의 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예전의 나다.



아주 친한 사람들에게는 서툴지만 내 피아노 소리를 들려주기도 했다. 내 마음 속에서 어린 시절과 어른이 된 이후의 시절을 구분해주는 경계선이 바로 피아노였던 것 같다. 누가 뭐라든 피아노를 열심히 치던 나, 감정의 해일이 밀려올 때마다 혼자 피아노를 치며 마음을 달래던 시절의 나는 아직 순수했던 것 같다.

내가 피아노를 치지 않게 된 것은 대학을 졸업한 이후였다. 늘 만나던 선후배들과 급작스럽게 멀어졌고, 친구들도 하루가 다르게 취직과 결혼과 유학과 이민으로 흩어져갔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음악을 들려줄 만한 여유, 나 자신의 마음을 음악으로 달랠 수 있는 소박한 마음가짐을 잃어버렸다. 항상 영혼의 허기를 느꼈고,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점점 잊어버렸다. 글쓰기조차 음악을 대체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편안한 에세이를 써도 최소한의 논리와 구조의 그물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음악은 논리도, 자기검열도, 타인의 시선도 벗어난 그 자리에 있었다. 피아노가 없었다면 초중고교 시절은 물론 대학 시절까지 상처받기 쉬운 내 영혼이 어떻게 견뎠을까 싶을 정도로, 피아노는 내게 최고의 친구였다.

언제부턴가 나는 내 피아노를 그저 단순한 ‘마음의 울림’이 아닌 ‘평가의 대상’으로 삼게 됐다. 언제부턴가 나는 내가 피아노를 잘 못 친다는 생각 때문에, 나보다 잘 치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생각 때문에 피아노를 놓아버렸다.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그저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사실 자체에 더없이 만족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나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은 컴퓨터, 휴대전화 같은 것이 돼버린 것은 아닐까. 만약 내가 이런 것들을 잃어버리면 내 정보를 있는 대로 긁어모아 통째로 온갖 적에게 떠넘겨주는 결과가 돼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예쁜 수첩을 하나 샀다. 휴대전화란 차가운 기계 위에 내 영혼의 흔적을 집약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나는 오늘도 온갖 사물에서 잃어버린 내 자신의 영혼을 찾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사물에서 인간이 아닌 사물 자체의 열망과 한숨을 듣는 사람이 되고 싶다.



찌톱에 케미라이트를 꽂아 불을 밝힌다. 파란 찌불은 수면에 별처럼 떠서 깜빡거린다. 이제 머잖아 어신이 올 것이다. 아니 어쩌면 밤새도록 한 번도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쁜 애인을 보듯 찌를 본다. 어, 그런데 어쩐 일인가? 거기 유체이탈이라도 한 듯 내가 당신이 세상을 살아가는 온갖 것들이 서 있는 게 아닌가? 나날이 힘겨워지는 밥벌이며 보살펴야 할 가족이며 의무들을 추처럼 달고 사는 훨훨 어디 다른 곳으로 다른 것이 되어 날아가고 싶은 욕망을 팽팽히 견디면서는 깊디깊은 제각기의 삶 속에 줄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절대 무너질 수 없는 직립의 자세로.

-‘시인의 사물들’ 중에서

신동아 2014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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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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