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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있는 풍경

피란 행렬 보며 떠올린 분단의 아픔, 아버지의 슬픔

박시춘 ‘굳세어라 금순아’

  • 글·김동률 |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권태균 | 사진작가

피란 행렬 보며 떠올린 분단의 아픔, 아버지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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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한겨울에 찾은 40계단은 을씨년스럽다. 뻥튀기 기구 등 피란시절 삶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거리는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칼날 바람에 얼어붙었다. 원래 부산은 이곳까지이고, 지금의 부산역과 항구는 인공 매립지라고 전한다. 사실 대부분의 부산 거리는 전쟁의 비극적인 상처와 교직한다. 그래서 ‘고향에 가더라도 잊지를 말고 한두 자 봄소식을 전해달라’는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 정거장’도 증거가 된다. 전쟁이 끝나 ‘서울로 돌아가는 12열차에 기대앉은 젊은 나그네들’은 이제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 영감처럼 늙고 야위어 간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 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아, 그리고 또 있다. 감천동 비석마을이 또 다른 무대가 된다. 국제시장, 자갈치시장으로 대변되는 번잡성, 일제강점기 영향을 받은 왜색풍 등의 이미지에 서민풍을 더하는 곳이 감천동 비석마을이다. 전쟁 당시 몰려든 피란민들이 살 곳을 찾다가 결국은 감천동 산꼭대기 공동묘지에 주목하게 된다. 묘지에 가득한 비석을 기둥으로 삼아 천막을 치고 움막을 짓고 산 게 감천동 비석마을의 시작이다.

부산의 중심, 광복동, 남포동 뒷산을 가파르게 넘어 가면 제법 커다란 야산이 보이고, 그 비탈진 사면에 알록달록하게 조그만 집들이 성냥갑처럼 달린 모습을 보게 된다. 심장이 약한 사람은 자동차를 운전해 오르기 어려울 정도로 가파른 길 막바지에 상석을 주춧돌로 삼은 마을이 어렵사리 버티고 있는 것이다. 겨울밤 감천 비석마을은 싸늘한 바람에 적요하다. 누군가는 말했다. 마을은 이탈리아 산토리니의 절벽마을 소렌토 풍광과 닮았다고. 그러나 그것은 호사가들의 언설일 뿐, 겨울 밤 잠든 달동네의 인생은 그리 화려하지 않다. 아니, 남루하기까지 하다.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는 영도다리는 노래의 중요한 테제가 된다. 갈 곳 없는 실향민은 다리 밑에 움막을 짓고 몰려 살았다. 길이 214.63m, 너비 18.3m, 높이 7.2m인 영도다리는 일제강점기인 1934년 11월 23일 준공됐다. 부산시 중심에서 영도의 북서단을 연결하는 국내 최초의 연륙교이자 다리가 들려 올려지는 유일한 도개교다. 1935년 다리 위에 전차궤도가 설치돼 전차가 다녔으며 하루 6회씩 다리의 한쪽을 들어 선박이 지나가게 하는 광경을 연출하며 부산의 명물이 됐다. 다리 난간은 불현듯 할머니 손을 잡고 영도다리를 구경하러 온 다섯 살의 그 시절로 나를 데려간다.

한국 현대사의 슬픔

나는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명물다리는 인구 증가로 인해 1966년 9월 도개를 중단했다. 전차궤도도 철거됐다. 그러나 운 좋게 한국 근현대사의 상징적 건축물로 평가되면서 2007년 대규모 복원 공사 끝에 2013년 7월 도개 기능도 다시 살아났다. 다리 입구에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인다. 연신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셔터 누르기에 열심이다. 황동색으로 칠해진 가수 현인의 동상이다. ‘굳세어라 금순아’ 등 현인의 노래가 연이어 흘러나온다.

영도는 가수 현인(본명 현동주. 1919~2002)의 고향이기도 하다. 동상 현판에는 그에 관한 이력이 빼꼭하다. 현인은 일제강점기에 부산 영도에서 영국 스탠더드 석유회사에 다니는 아버지와 신여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다. 1938년 경성 제2고보(경복고)를 졸업한 후, 1942년 일본 우에노 음악학교(도쿄예술대) 성악과를 졸업한, 당시로서는 모든 것을 갖춘 인재였다.

처음엔 순수음악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대중가요 부르기를 망설였으나 가요계의 대부 격인 작곡가 박시춘의 권유로 1947년 ‘신라의 달밤’을 녹음한 것을 계기로 가요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비 내리는 고모령’ ‘고향만리’ ‘전우야 잘 자라’ ‘서울야곡’ ‘인도의 향불’ 등 수많은 히트곡을 불렀다. 하지만 대표곡을 꼽자면 역시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시절 실향민의 향수와 힘든 삶을 이어가는 서민의 아픔을 달래주었던 ‘굳세어라 금순아’라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서 울었다고 한다. 나는 그 울음 뒤에 있는, 귀에 익은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를 더 주목하고자 한다. 노래에는 한국 현대사의 슬픔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래서 영도다리, 국제시장 등 노래의 무대를 찾으면서 나는 아버지 세대의 슬픔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모진 세파 모진 설움 받고 산 이 땅의 아버지들, 그래서 ‘아버지의 술잔에는 눈물이 절반’이라고 일찍이 어느 시인은 말하지 않았던가.

피란 행렬 보며 떠올린 분단의 아픔, 아버지의 슬픔

감천 비석마을의 겨울밤 풍경, 1·4후퇴 때 몰려온 피란민들이 산꼭대기 공동묘지 비석에 거적을 두르고 살기 시작한 것이 천막촌의 유래다.



신동아 2015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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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동률 |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권태균 |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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