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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민의 리걸 에세이

디케의 저울

  • 정재민 전 판사·소설가

디케의 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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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여신상이라고 하면 천으로 눈을 가린 채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서 있는 여신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형상은 하나가 아니다. 눈가리개 없이 두 눈을 뜨고 있거나 서지 않고 앉아 있는 여신도 있고, 칼만 들고 있거나 반대로 저울만 들고 있는 여신도 있다.

정의의 여신 원조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디케다. 제우스는 율법의 여신테미스와 사이에 세 여신을 낳았다. 그들이 각각 디케(정의의 여신), 에우노미아(질서의 여신), 에이레네(평화의 여신)이다. 디케가 로마 신화에서는 ‘유스티티아(Justitia)’로 바뀌었다. 유스티티아가 영어 ‘Justice(정의)’의 어원이된다. 

초기 디케 상은 저울 없이 긴 칼만 들고 있었다. 디케는 정의를 훼손하는 무리에게 재앙을 내렸는데 긴 칼이 바로 그 응징의 상징이다. 그러다 유스티티아의 상에 이르면 칼과 함께 저울도 들게 된다. 그 이후에는 아예 칼 없이 저울만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나라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도 한 손에는 저울을, 한 손에는 칼이 아닌 법전을 들고 있다. 

정의의 여신상 소품을 보면 정의의 핵심이 칼에서 저울로 이동해왔음을 알수 있다. 오늘날 가장 널리 통용되는 정의(正義)의 정의(定義)도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로서 칼보다 저울에 방점을 찍고 있다. 저울은 형평을 따지는 일을 상징한다. 여기서 말하는 형평이란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법질서 사이에서, 구체적 타당성과 법적 안정성 사이에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다. 

정의의 핵심이 응징에서 형평으로 이동한 지 오래됐음에도 여전히 정의를 저울이 아니라 칼로만 이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정의의 핵심을 칼이라고 보게 되면 ‘정의’의 개념을 ‘불의’의 반대말로만 이해하고, ‘불의’의 편에 선 사람을 칼로 베는 것만 중시하게 된다. 이 경우 저울질은 불필요해지고 결국 우리 편은 ‘정의’,남의 편은 ‘불의’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저울 없는 칼질은 폭력일 뿐이다. 저울을 사용하더라도 기울어진 저울로 자의적·형식적으로 저울질하는 것은 정의를 사칭한 불의일 뿐이다. 저울에 올려놓기도 전에 칼부터 끄집어내 벨작정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양형이라는 저울

대법원의

대법원의'정의의 여신상'[동아DB]

형사재판에서 대표적인 저울질은 양형(量刑)이다. 양형은 피고인이 받을 형을 정하는 작업을 말한다. 피고인이 자백하는 사건이든 부인하는 사건이든 모든 사건에 대해서 판사는 양형 판단을 회피할 수 없다. 형사재판을 담당하는 판사들이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일도 양형이다. 자기가 선고한 형이 지나치게 무겁거나 지나치게 가벼울까봐 끊임없이 노심초사한다. 나도 출퇴근하는 차 안에서나 밤에 불을 끄고 누운 침대 위에서 조차 피고인을 실형에 처하는 것이 맞는지 집행유예에 처하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피고인을 징역 6월에 처하는 것이 맞는지 징역 8월에 처하는 것이 맞는지 번민해야 했다. 

현실의 법정에서 저울에 올라가는 문제는 굉장히 까다로운 것이 많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양형 기준을 정밀하게 세워두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겠지만 막상 기준을 세우려 시도하면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인간사의 복잡다단함 때문에 여러 가지 요소를 서로 비교해서 경중을 말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같은 것을 같게, 다른 것을 다르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겠지만 실제 문제를 놓고 무엇이 같고, 또 무엇이 다른지, 다르다면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를 판단하기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마이클 샌델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와 같은 책들을 보면 도움이 되지 않느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추상적논의는 실전에서 부딪치는 구체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제한된 총알을 지금 다 써야 할지  비축해야할지, 전진할지 후퇴할지 시시각각 판단해야 하는 지휘관에게 인류 평화를 위해 과연 무력이 필요한지에 대한 학계의 추상적 논의가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남을 때려서 전치 2주의 상해를 가한 사람보다 전치 4주의 상해를 가한 사람을, 필로폰 0.2g을 투약한 사람보다 0.4g을 투약한 사람을, 200만 원짜리 물건을 훔친 사람보다 400만 원짜리 물건을 훔친 사람을 각기 더 무겁게 처벌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한다. 그러나 이를 조금만 비틀어도 상당히 어려운 문제로 둔갑한다. 가령 필로폰 0.2g을 투약한 사람과, 타인에게 전치 2주의 상해를 가한 사람과, 남의 200만 원짜리 물건을 훔친 사람 중에 누구를 더 무겁게 처벌해야 하는가.

사과와 오렌지

‘사과와 오렌지(Apples and Oranges)’는 대체불가능한 대상을 지칭할 때 쓰는 영어숙어다.[Pixabay 제공]

‘사과와 오렌지(Apples and Oranges)’는 대체불가능한 대상을 지칭할 때 쓰는 영어숙어다.[Pixabay 제공]

현재 재판 실무상으로는 필로폰 0.2g을 투약한 사람이 가장 무거운 처벌을 받는다. 초범이라면 통상 징역형에 집행유예를 받겠지만 실형을 받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필로폰 투약자를 엄벌에 처해서 사회적으로 경각심을 일깨울 필요가 있고 필로폰 투약자 본인을 위해서라도 일정 기간 구금되어 있는 것이 중독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고려 때문이다. 

절도죄의 경우에는 초범이면 벌금형도 많지만 상습으로 인정되면 형이 무거워진다. 언론에 라면 한 박스 훔쳤다고 징역 몇 년에 처해졌다고 보도되는 것은 십중팔구 피고인에게 기존에 절도 전과가 여럿 있어서 상습성이 인정된 경우다. 상습성이 인정될 때 법은 최하 징역 3년의 징역형을 규정해놓았기 때문에 판사가 선처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한편 남을 때려서 전치 2주의 상해를 가한 경우에는 통상 100만 원 안팎의 벌금형에 처한다. 피해자와 합의하면 처벌이 더더욱 경미해진다. 상해진단서가 없는 단순 폭행죄는 이른바 반의사불벌죄라고 해서 피해자와 합의만 하면아예 처벌 자체가 불가능하다. 

영어 관용구 중에 “그것은 사과와 오렌지의 관계와 같다”는 표현이 있다. 사전에서는 ‘천양지차’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지만 내가 이해하기로 이 말은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데 방점이 있다. 사실 사과나 오렌지는 닮은 구석이 많다. 그러나 사과가 좋은지, 오렌지가 좋은지는 사람들 취향의 문제다. 취향이나 신앙은 논리적으로 논증할 수도 없고 실험을 통해서 판정할 수도 없다. 물론 사과와 오렌지의 시장가격이 형성되어 어느 쪽이 더 비쌀 수도 있지만 그 시장가격도 사람들의 선호를 반영할 뿐 본질적으로 어느 과일이 더 가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법철학에서는 법관의 역할에 대해 크게 2가지 시각이 존재한다. 하나는 법관은 이미 존재하는 법의 정신과 죄의 무게를 있는 그대로 발견해서 집행하는 것뿐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법규정이 추상적이고 모호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실상 법관이 자신의 취향과 가치관에 따라 법을 형성해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원래 전자의 시각이었으나 판사일을 하면 할수록 점점 후자의 시각으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재산죄, 폭력죄, 마약죄 중 어느 쪽이 더 무거운 죄인지에 대해서도 점차 그 불법성에 본질적인 서열 차이가 있다기보다는 마치 사과와 오렌지에 시장가격이 형성되듯이 그 시대 다수를 이루는 판사들의 취향과 가치관에 따라 죄의 경중이 형성된다는 인상을 받게 됐다.

참을 수 없는 폭력의 가벼움

나는 앞에서 제시한 3가지 범죄 중에서 남을 때려 전치 2주의 상해를 가한 범죄가 가장 무거운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로폰이 확산되는 것은 심각한 일이지만 그것은 필로폰을 매매하는 등 확산시키는 범죄를 엄하게 처벌하면 된다. 필로폰 투약은 적어도 그 자체로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

절도죄와 상해죄의 경중도 물론 기본적으로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인식될수 있다. 내가 갓 판사가 되었을 때 10년 선배 판사가 이런 조언을 해줬다. 사람이 맞아서 생긴 상해는 시간이 지나면 아무는 반면 도둑놈이 가져간 돈은 시간이 지나도 다시 생겨나지 않으므로 재산죄를 폭력보다 훨씬 더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이 말에 동의할 수가 없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돈 200만 원이 도난당한 것은 언젠가 잊힐 수 있지만 폭행당한 것은 잊기 어렵다.

나는 우리 사회에 폭력이 여전히 만연하다고 생각한다. 내 또래는 다들 학교 다닐 때부터 교사, 선배, 동기가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심심찮게목격하면서 자랐다. 시골 학교 다니던 나도 학창 시절에 교사가 교실에서 주먹질, 발길질을 하고 동기들끼리 무기를 휘두르며 조폭을 방불케 하는 살벌한 싸움을 하는 것을 심심찮게 지켜보면서 컸다. 군대에서 폭력을 겪은 사람은 셀 수도 없다. 회사에 들어가서도 군기 잡기용 폭력, 괴롭힘, 성희롱 등을당한 사람이 허다하다. 나는 심지어 사법연수원에서도 폭행을 당한 적이 있다. 들어가자마자 열린 회식자리에서 반(班) 총무가 군기 잡는다고 조(組) 총무인 나를 불러내 다짜고짜 내 정강이를 걷어찼다. 놀라고 황당해서 쳐다보았더니 폭력은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는 듯 “왜, O대 나왔다고 무시하는 거냐?”라는 말이 돌아왔다. 영화, 드라마, 시사 프로그램에서도 끔찍한 살인과 폭력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이런 사회이니 어린 학생들이 잔인하게 친구를때리는 일이 안 일어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이런 관행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폭력범죄를 지금보다 훨씬 더 엄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밀고 당기는 정도의 몸싸움은 몰라도 주먹질, 발길질을 하거나 물건을 집어 던지면 집행유예를 붙이더라도 원칙적으로 징역형에 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폭행죄의 반의사불벌죄 규정도 폐지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내가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폭력 범죄를 다른 판사들보다 엄벌에 처한 것은 아니다. 폭력범죄 수가 워낙 많아서 그 굵은 폭포수 같은 관행의 물줄기를 틀어볼 엄두가 나지 않을뿐더러 다른 판사를 만난 폭력범은 선처를 받는데 오직 나를 만난 사람만 엄벌 받는 것은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라는 정의의 원칙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디케의 저울을 통과하기 전에는 칼을 휘둘러선 안 되기 때문이다.

정재민

● 서울대 법대 졸업,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사법연수원 수료(32기)
● 前 판사, 舊유고유엔국제 형사재판소(ICTY) 재판연구관, 외교부 영토법률자문관
● 세계문학상, 매일신문 포항국제동해문학상 수상
● 저서 : ‘보헤미안랩소디’ ‘국제법과 함께 읽는 독도현대사’ ‘소설 이사부’ ‘독도 인 더 헤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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