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호

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한국식 대국숭배 뿌리와 송의 멸망

  • 입력2017-12-10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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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이, 송익필, 김장생, 김상헌과 삼학사(윤집, 오달제, 홍익한), 송시열 등 조선 중기 이후 서인·노론 사대부는 주자학 교조주의자였다. 광해군의 실각(失脚), 김상헌과 삼학사의 청나라에 대한 무조건적 저항은 주자학적 신념에 기초했다.  주자학적 중화 숭배 인식체계를 고수한 이들의 숭배 대상은 명(明)에서 개화에 성공한 일본으로 바뀌었으며, 1945년 광복 이후 한국에선 미국, 북한에선 소련으로 다시 바뀌었다. 

    • 이러한 인식체계는 21세기인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북송(北宋)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가 시작해 남송(南宋) 주희(1130~1200)가 완성한 성리학(性理學)은 우주 만물이 기(氣)라는 물질로 구성됐다고 본다. 주희는 인간 본성은 본디 맑으나 끝없는 욕망으로 인해 뒤틀리므로 학문을 통해 본성, 즉 이(理)를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성리학(주자학)은 선불교(禪佛敎)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대국 숭배 인식과 성리학

    몽골고원. 송(宋)은 몽골고원에서 흥기한 몽골에 의해 멸망한다.

    몽골고원. 송(宋)은 몽골고원에서 흥기한 몽골에 의해 멸망한다.

    성리학은 한족(북송·남송)이 거란(요), 여진(금), 티베트계 탕구트(서하), 몽골(원) 등 새외민족에 시달려 위축됐을 때 등장한 한족 중심 보수적 철학체계다. 성리학에 따르면 우주 질서는 이(理)에 따라 정해진다. 이는 삼강오륜(三綱五倫), 예(禮) 등으로 나타난다. 절대선의 우주 질서인 이를 어지럽히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성리학에서 명분을 숭상하는 것은 이렇듯 보수적 철학에 기반을 뒀기 때문이다. 성리학은 기존 질서를 존중하고 그것을 절대시하는 학문이므로 권력자에 의해 종종 관학(官學)으로 채택됐다. 성리학은 절개(節槪)가 강한 이를 문명인으로 봤으며 중원 밖 오랑캐는 멸시받아야 마땅한 존재로 여겼다. 성리학은 중국 중심 화이론(華夷論)의 기초다. 

    주희는 금나라와 화평을 맺는 것을 반대했다. 오랑캐인 여진족이 세운 나라는 우주 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라고 봤기 때문이다. 몽골 또한 예(禮)와는 거리가 먼 오랑캐이므로 대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주희의 이론을 심화한 이이, 송익필, 김장생, 김상헌과 삼학사(윤집, 오달제, 홍익한), 송시열 등 조선 중기 이후 서인·노론 사대부는 주자학 교조주의자였다. 광해군의 실각(失脚), 김상헌과 삼학사의 청나라에 대한 무조건적 저항과 예송(禮訟)을 둘러싼 당쟁은 주자학적 신념에 기초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丁若鏞)마저 일본 주자학자의 글을 읽고 “이제 왜인(倭人)도 성인의 길을 배우니 다시는 난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평했다.
     
    주자학적 중화 숭배 인식체계를 고수한 이들의 숭배 대상은 명(明)에서 개화에 성공한 일본으로 바뀌었으며, 1945년 광복 이후 한국에선 미국, 북한에선 소련으로 다시 바뀌었다. 2016년 말~2017년 현재까지 성조기(星條旗)를 동원한 일부 시위에서 보듯 이러한 인식체계는 지금도 변함없이 유지된다.

    金나라 수도 포위한 몽골軍

    남송은 1206년 재상 한탁주(韓侂冑) 주도로 동부 화이허와 서부 산시(陝西) 2개 전선으로 북벌을 감행했다. 산시 방향으로 북진하던 오희(吳曦)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금나라군에 항복했다. 금나라는 화이허 방면에 군사력을 집중해 남송군을 창장 유역으로 밀어붙였다. 금나라는 칭기즈칸의 대두로 위협을 받았으며 산둥에서 민란의 움직임도 포착돼 조속한 화평을 바랐다. 남송도 금나라군이 창장 유역으로 접근해오자 위협을 느꼈다. 양국은 1207년 남송의 조공 액수를 조금 올리는 선에서 타협했다. 칭기즈칸 군대의 말발굽소리가 국경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금나라가 남송 내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 유리한 상황에서 전쟁을 마무리한 것이다. 



    몽골고원에는 유연(柔然) 이후 투르크계와 몽골계 민족이 함께 거주했으나 9세기 위구르족을 포함한 투르크계는 신장으로 서천(西遷)했다. 투르크계가 서쪽으로 옮겨간 후 북만주를 원주지로 하는 북선비(北鮮卑) 실위몽올(室韋蒙兀)이 몽골고원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후 몽골고원은 ‘몽골의 땅’으로 불렸다. 몽골고원은 한랭·건조해 생산성이 낮다. 몽골고원 전체가 부양할 수 있는 인구는 120만에 불과해 칭기즈칸이 초창기 거느린 몽골 병사 수는 10만 명을 넘지 못했다. 

    금나라는 우문선비 계통 거란족으로 하여금 몽골족을 방어케 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활용했으며 몽골 부족 내 분열과 대립을 이용해 몽골고원을 통제해왔으나 칭기즈칸이 순식간에 몽골고원을 통합하면서 금나라가 쳐놓은 촘촘한 통제의 그물을 벗어던졌다. 칭기즈칸은 위구르 문자를 채용했으며 행정조직과 군사조직을 겸하는 십호·백호·천호·만호제를 도입했다. 칭기즈칸은 1205년, 1206년, 1209년 3차례에 걸쳐 서하(西夏)를 침공했으며 1211년부터 금나라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산시와 허베이가 주요 공격 루트였다. 

    칭기즈칸이 금나라를 공격하자 북만주 싱안링(興安嶺) 산록(山麓)의 거란족은 금나라 통치에 반대해 야율유가(耶律留哥) 지휘 아래 봉기했다. 만주 전역이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병권을 장악한 흘석렬집중(紇石烈執中)은 무능하다는 이유로 위소왕 완안영제를 살해했다. 몽골군은 이 같은 금나라의 병란을 틈타 산둥까지 유린했다.
     
    1214년 칭기즈칸과 그의 아들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 동생 카사르와 카치운(哈眞), 부하 무카리와 제베, 보르추 등이 지휘한 몽골군이 산시와 허베이를 유린하고, 금나라의 수도 연경을 포위할 태세를 취했다. 금나라의 간청으로 화의가 성립돼 몽골군은 일단 회군했다. 몽골군에 겁먹은 금나라는 황허 이남 카이펑(開封) 천도를 결정했다. 군호(軍戶) 가족 100만여 명도 허난으로 이주시켰다. 허베이, 산시 등 황허 이북이 공황 상태에 빠졌다.

    망한 나라 君主의 자결

    금나라 조정이 카이펑으로 도주하자 칭기즈칸은 다시 남진했으며, 1215년 연경을 점령했다. 금나라는 남천(南遷)하기 전 포선만노(蒲鮮萬奴)를 만주로 파견해 본거지 북만주를 확보하게 했다. 포선만노는 야율유가가 이끄는 거란 봉기군 제압에 실패하자 1217년 아직 몽골의 힘이 미치지 않던 두만강 하류에 동진국(東眞國)을 세웠다. 칭기즈칸은 연경에서 금나라 관리로 일하던 야율초재(1190~1244)라는 거란족 출신 천재를 얻었다. 칭기즈칸은 친형제나 다름없이 신임하던 무카리를 왕으로 봉해 연경을 다스리게 했다. 무카리는 연경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사방으로 군대를 보냈다. 결국 황허 이북은 모두 몽골군에게 점령당했다. 

    금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남송은 조공을 중단했다. 서하도 금나라로부터 이탈해 남송과 손을 잡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칭기즈칸은 중앙아시아의 카라키타이, 호레즘, 호라산(아프가니스탄) 원정을 떠났다. 서하와 금나라, 고려 등 동아시아 국가에 잠깐이나마 숨 쉴 틈이 주어진 것이다. 

    서하는 이안전(李安全) 시기에 몽골에 복속됐다가 칭기즈칸의 서정(西征) 참가를 거부해 1226년 다시 몽골의 침공을 받아 1227년 멸망했다. 서하 멸망 후 많은 수의 주민이 몽골군에게 살해됐으며, 일부만 오르도스에 남고, 대부분은 남쪽의 윈난, 미얀마, 부탄, 동쪽의 허베이, 서쪽의 티베트 등 사방으로 흩어졌다. 1232년 몽골군은 남송으로부터 길을 빌려 금나라 수도 카이펑으로 쳐들어갔다. 금나라는 남송에 사신을 보내 금나라가 멸망하고 나면 다음 차례는 남송이니 지원해달라고 애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금나라 애종(哀宗)은 남쪽 차이저우(蔡州)로 달아나고, 카이펑은 함락됐다. 

    남송은 금나라의 애원과 다수 신료의 반대에도 맹공(孟珙)에게 2만 명의 병사를 줘 몽골군과 함께 차이저우를 포위하게 했다. 남송은 몽골에 군량도 제공했다. 1234년 1월 몽골군과 남송군의 합동 공격으로 성은 함락되고 애종은 자결했다. 애종의 죽음은 나라의 군주로서 부끄럽지 않은 최후였다. 조선의 인조와 고종을 필두로 고구려 보장왕, 백제 의자왕, 신라 경순왕 등이 망국의 책임을 지고 자결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애종은 망한 나라의 군주로서 최소한의 책임을 다한 것이다.

    무뇌아(無腦兒)·무책략(無策略)

    쿠빌라이 칸.

    쿠빌라이 칸.

    금나라 멸망 과정에서 재상 사숭지(史嵩之)를 비롯한 남송 지도부의 무책략(無策略)은 눈뜨고 볼 수 없을(目不忍見) 정도였다. 남송은 조상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자국 내 길을 빌려주면서까지 몽골을 도와 금나라를 멸망시켰다. 서하가 망하자 금나라도 망했으며, 금나라 다음은 남송 차례가 될 게 명명백백한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상황인데도 금나라 지도부는 무뇌아(無腦兒)와 같은 결정을 내렸다. 

    금나라가 망하자 남송 조정에는 고도(古都) 카이펑과 뤄양을 수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비등했다. 재상인 정청지(鄭淸之)가 조범(趙范)·조규(趙葵) 형제의 출병론을 지지하면서 20만 명의 남송군이 북진해 허난으로 들어갔다. 북진은 매우 순조로웠다. 남송군은 폐허 상태의 카이펑과 뤄양을 손쉽게 점령했다. 뤄양성 안에는 수십 가구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몽골군은 남송군의 북진 소식을 접하자 북부와 서부에서 밀물과 같이 공격해왔다. 남송군은 상호 연락도 취하지 못하고 무질서하게 남쪽으로 패주했다. 이듬해인 1235년에도 몽골군이 대거 남하했다. 2만 명의 훈련 잘된 가병(家兵)을 거느린 맹공의 활약으로 몽골군의 남하를 일단 저지했다. 고승(高僧)과 같은 풍모를 지녔다는 맹공은 장군으로서, 그리고 정치가로서도 탁월한 인물이었다. 맹공은 1239년 고향이자 군사 요충지인 샹양(襄陽)을 몽골군으로부터 탈환했다. 

    이런 가운데 친형 몽케 대칸(大汗)에 의해 중원 총독으로 임명된 쿠빌라이는 러허(熱河) 금련천에 성곽을 쌓고, 유병충·요추·허형·사천택 등 화북 한인(漢人)을 대거 기용해 허베이와 산둥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1252년 몽케는 쿠빌라이에게 윈난(雲南)의 대리(大理) 정벌을 명했다. 남송 포위책의 일환이었다. 쿠빌라이는 대리를 정복한 후 티베트까지 진출했다. 쿠빌라이의 부장 우량하타이(우량하에서 오랑캐라는 말이 기원했다)는 쿠빌라이와 별도로 북베트남 홍하 유역으로 진격했다. 

    성리학에 경도된 남송 이종(理宗)은 금나라가 멸망한 1234년 사대부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던 위료옹(魏了翁), 진덕수(眞德秀) 같은 성리학자를 중용했다. 그들은 현실 정치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해 감행된 조범·조규 형제의 허난 출병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이종은 출병 실패 이후 가사도(賈似道)라는 정반대 성격을 가진 현실주의자를 기용했다.

    이성계와 몽골의 막내 상속

    전쟁기념관이 소장한 처인성전투 기록화. 2002년 그린 것이다. 1232년 몽골의 제2차 침입 때 처인성(지금의 용인)에서 승장 김윤후가 적장 사르타크(살례탑)를 맞아 싸운 전투를 담은 기록화다.[문화컨텐츠닷컴 제공]

    전쟁기념관이 소장한 처인성전투 기록화. 2002년 그린 것이다. 1232년 몽골의 제2차 침입 때 처인성(지금의 용인)에서 승장 김윤후가 적장 사르타크(살례탑)를 맞아 싸운 전투를 담은 기록화다.[문화컨텐츠닷컴 제공]

    대칸 몽케의 몽골군은 서쪽과 남쪽으로 우회해 남송을 공략하는 전략을 수립했다. 몽케는 본대(本隊)를 이끌고 산시(陝西)와 쓰촨을 거쳐 창장의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진격하고, 쿠빌라이는 연경 북방에서 출발해 허베이와 허난을 거쳐 창장의 북쪽 지류 한장(漢江)을 따라 남하하고, 부장 우량하타이는 광시에서 후난을 거쳐 북상한 후 창장 중류 위에저우(鄂州)에서 3대가 합류해 남송의 수도 린안(항저우)을 공격한다는 계획이었다. 

    우창(武昌)은 위에저우의 중심도시로 삼국시대 오나라 초기 수도이자 동진(東晋)의 2대 군사요충지 중 하나인 서부(西府)가 위치한 곳이기도 했다. 몽케의 본대가 선택한 진격로는 위나라 종회(鍾會)의 촉한 공격 루트와 거의 같았으며, 쿠빌라이가 선택한 루트는 조조가 유비·손권 연합군을 치기 위해 남하한 길이었다. 

    1257년 몽케는 대군을 이끌고 수도 카라코룸(몽골고원에 위치)을 출발해 산시와 한중을 거쳐 쓰촨분지로 들어갔다. 몽케는 충칭(重慶)을 공격하다가 조어산(釣魚山)에서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몽케의 후계 자리를 놓고 둘째 쿠빌라이와 수도 카라코룸에서 감국(監國)을 맡고 있던 막내 아리크부가 사이에 긴장이 조성됐다. 몽케와 쿠빌라이, 아리크부가는 모두 칭기즈칸의 막내 툴루이의 아들이며, 몽골족 등 유목민은 일반적으로 막내 상속을 원칙으로 했다. 몽골 군벌 출신 조선 태조 이성계가 막내 이방석을 후계자로 정한 것도 몽골 전통에 따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쿠빌라이는 포위하고 있던 우창으로부터 철군해 대칸 지위를 다퉈야 했으나 북베트남에서 출발해 북상하던 부장 우량하타이로 인해 우창을 떠날 수 없었다. 우량하타이가 후난을 거쳐 본대에 합류하자 쿠빌라이는 후퇴를 결정했다. 전황은 몹시 불리했다. 쿠빌라이군은 남송의 우창 주둔군과 한장(漢江) 상류 샹양(襄陽) 주둔군 양쪽으로부터 합동 공격을 받을 공산이 컸다. 더구나 우창에는 남송군 총사령관 가사도가 증원 부대를 이끌고 도착해 있었다. 쿠빌라이는 동진의 화가 고개지(顧愷之)의 여사잠도(女史箴圖) 등 그동안 모아왔던 진귀한 예술품으로 가사도를 매수해 난국을 풀어냈다고 한다. 쿠빌라이군과 우량하타이군은 남송군을 눈앞에 두고 창장의 한 지점인 대도하(大渡河)에 부교를 설치해 큰 손실을 입지 않고 후퇴했다. 그로부터 600년 후 청나라 말기에 일어난 태평천국군의 익왕(翼王) 석달개와 옌안장정(延安長征) 때 홍군이 양자강을 건넌 지점도 쿠빌라이군이 건넌 지점(대도하)과 같다.

    삼별초, 가마쿠라 막부와 통교

    일본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그린 일본을 침략한 몽골 병사 모습.

    일본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그린 일본을 침략한 몽골 병사 모습.

    중국 대륙이 요동치던 그때 최씨 무신정권 주도로 40여 년간 몽골의 침공에 대항하던 고려가 쿠빌라이에게 항복했다. 고려왕 고종 왕철이 파견한 세자 왕전이 금련천으로 후퇴하던 쿠빌라이를 샹양에서 만나 고개를 숙였다. 왕이 된 왕전이 1270년 개경 환도(還都)를 단행하자 최씨 정권의 사병 삼별초군은 환도를 반대하고 난을 일으켜 진도로 남하했다. 삼별초군은 일본 가마쿠라 막부와 통교했다. 쿠빌라이는 1272년 8월 고려에 사신을 보내 진도를 빼앗기고 제주도로 옮겨가 있던 삼별초군 처리를 촉구했다. 1273년 2월 1만 명으로 증강된 고려·몽골 연합군은 제주도를 공격해 김통정이 이끌던 삼별초군을 전멸시켰다. 

    금련천으로 회군한 쿠빌라이는 화북(漢地)에서 육성한 대군을 동원해 4년간의 치열한 내전 끝에 만주를 근거로 한 테무게 옷치긴(칭기즈칸의 막내 동생으로 ‘불씨를 지키는 자’라는 뜻) 가문의 지지를 확보해 아리크부가를 굴복시켰다. 쿠빌라이는 1271년 대도(베이징)로 근거지를 옮기고 국명을 원(元)이라 했다. 

    금나라가 멸망하면서 몽골과 직접 국경을 접한 남송은 전쟁이 일상사가 됐다. 전쟁 비용으로 인해 남송의 경제 상황은 날로 악화됐으며, 농민 반란이 일어날 조짐을 보였다. 우창에서 몽골군을 격퇴한 것으로 알려진 남송 장수 가사도는 수도 린안에 귀환해 재상에 임명됐다. 가사도는 농민에게 과도한 부담으로 작용한 쌀의 저가(低價) 강제매입 제도를 철폐하고 공전법(公田法)을 실시해 재정난을 타개했다. 그 결과 가사도는 대지주와 관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됐다. 대지주와 관료들에게는 눈앞의 이익이 더 중요했다. 

    쿠빌라이는 한장(漢江)의 흐름을 따라 남송 정벌에 나섰다. 남송의 최대 요충지는 후베이성 샹양과 판청(樊城)이 될 수밖에 없었다. 몽골군은 1268년 초 샹양과 판청을 포위했다. 샹양과 판청은 한장을 마주 보고 있는 후베이 최대 성시(城市)들로 관우와 조인이 각각 촉한과 위나라의 운명을 걸고 싸운 곳이다. 남송(南宋)도 샹양을 사활의 땅으로 인식해 하귀(夏貴) 등이 이끄는 수군을 통해 전력을 다해 샹양 수비군을 지원했다. 

    남송군의 5년에 걸친 저항은 신무기 사라센 대포(回回砲)로 말미암아 끝장났다. 원(元)의 위구르인 지휘관 아리하이야는 1272년 3월 일한국(汗國)이 파견한 이스마일이 제작한 사라센 대포를 사용해 5년간이나 버텨오던 판청과 샹양의 성벽을 부수는 데 성공했다. 사령관 여문환(呂文煥)은 원나라에 항복하기 전 구원군을 기다리느라 수도 항저우가 있는 동남쪽만 바라보았다. 샹양이 함락됨으로써 남송의 명운은 경각을 다투게 됐다. 한장을 거쳐 창장을 따라 내려가면 남송의 요지를 쉽게 공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미카제(神風)의 유래

    원은 일본을 정복하려는 의도로 1268년부터 고려를 통해 3차례에 걸쳐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다. 가마쿠라 막부의 실력자 호조씨(北條氏)는 몽골 사신을 추방하고, 1271년 몽골 침공에 대비해 고케닌(무사 계급)에게 규슈의 하카타만(博多灣) 방위를 명령했다. ‘조큐(承久)의 난’ 이후 50년이 지난 이즈음 대다수 고케닌은 전쟁을 제대로 할 줄 몰랐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 

    샹양 함락 후인 1274년 10월 원나라는 일본 침공을 시작했다. 고려군 5600명을 포함한 3만여 명의 병력과 900여 척의 함선을 동원한 원나라군은 쓰시마와 이키(壹岐)를 점령하고, 하카타에 상륙했다. 일본군은 여·몽 연합군을 맞아 선전했지만 여·몽 연합군의 집단전법과 화약을 이용한 신병기 때문에 고전했다. 일본군은 다자이후(大宰府)까지 후퇴했다. 그런데 다음 날 하카타만에 정박해 있던 여·몽 연합군 함선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태풍 때문에 대다수 함선이 침몰하고 살아남은 이들은 고려로 퇴각한 것이다. 

    몽골이 일본을 점령하려 한 것은 남송 정벌에 일본군을 동원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고려군이 규슈를 침공한 것에 분노한 호조 가문은 1276년 고려 침공 계획을 세웠다. 가마쿠라 막부는 몽골의 재침에 대비해 규슈의 고케닌들로 하여금 하카타만 해안선을 따라 석축을 쌓고, 병력도 증강케 했다. 

    원나라는 1279년 남송을 멸망시킨 후 일본 원정을 다시 계획해 1281년 김방경(金方慶)이 이끄는 고려군 4만 명과 남송의 항장(降將) 범문호(范文虎)가 지휘하는 강남군 10만 명 등 총 14만 명의 대병력을 4400여 척의 함선에 나눠 태우고 2차 일본 침공을 감행했다. 일본군은 방벽에 의지하며 2개월간 공방전을 계속했는데, 연합군은 이번에도 상륙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태풍을 만나 괴멸적 타격을 입고 퇴각했다. 14만 명의 병사 중 11만~12만 명이 규슈 바다에 빠져 죽었다. 원나라가 2차 일본 정벌전에 남송군을 대거 동원한 것은 반란을 일으킬만한 남송의 군사 자원을 처분하려는 목적도 갖고 있었다. 쿠빌라이는 이후에도 수차 일본 정벌을 추진했으나, 광둥과 푸젠, 참파(베트남 중남부 오스트로아시아계 민족 국가) 지역 반란으로 인해 중단했다.

    몽골, 유라시아를 관통하다

    개성 만월대 출토 유물 남북 공동 전시회 개막식 및 학술회의가 2015년 10월 15일 개성 고려성균관에서 열렸다. 개성 만월대는 고려 왕궁터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개성 만월대 출토 유물 남북 공동 전시회 개막식 및 학술회의가 2015년 10월 15일 개성 고려성균관에서 열렸다. 개성 만월대는 고려 왕궁터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원의 1차 일본 침공 이듬해인 1275년 샹양에 이어 커다란 희생 끝에 우창을 점령한 원나라군은 창장의 흐름을 타고 동진하다가 반격을 가해온 가사도의 남송군 10만 명을 난징 근처 우후(蕪湖)에서 대파했다. 바얀이 지휘하는 원나라군은 속공작전을 취해 바로 난징을 점령하고, 곧이어 린안(항저우)으로 향했다. 1276년 린안이 함락되고, 남송은 멸망했다. 

    문천상(文天祥), 장세걸(張世傑), 육수부(陸秀夫) 등이 마지막까지 충절을 다해 조시(趙是), 조병(趙昺) 등 소년 황제와 함께 저항했다. 원나라군은 이들을 추격해 1279년 마카오 서쪽 애산도(厓山島)에서 따라잡았다. 남송 망명정부군은 처절한 전투 끝에 패하고, 조병과 장세걸, 육수부 등 주요 인물 모두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흉노(匈奴) 저(氐) 선비(鮮卑) 등 새외민족은 화북을 장악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강남으로 내려오지는 못했다. 새외민족들이 강남까지 지배한 것은 한화(漢化)된 선비족 왕조 수(隋)·당(唐)대에 이르러서였다. 5대 10국 시대에 활약한 사타돌궐도 화북만 지배했으며, 거란(요)과 탕구트(서하)는 중원에 발만 담그는 데 그쳤다. 여진이 화이허(淮河) 이북을 지배한 데 이어 몽골은 중국과 주변부를 모두 장악했다. 몽골제국의 유라시아 지배를 통해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중동, 유럽 간 교류가 촉진됐다. 주치·바투·훌라구·야율초재와 같은 동아시아인이 중앙아시아와 그 너머로도 가고, 마르코 폴로·사두라(薩都剌)·알라딘·이스마일·정학년과 같은 유럽인 또는 중동인이 중국으로 왔다. 몽골제국의 재상 야율초재는 1222년 우즈베키스탄으로 추정되는 하중(河中)에서 임오서역하중유춘(壬午西域河中游春)이라는 긴 제목의 시(詩)를 지었다. 하중은 중앙아시아 2대 하천인 아무다리야와 시르다리야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다리야는 투르크어로 강을 의미한다.

    異域春郊草又青 (타향 땅 봄, 교외에 나오니 풀이 푸른 데)
    故圓東望遠千程 (고향 그리워 저 멀리 동쪽을 바라보니 아득한 천리)
    臨池嫩柳千絲碧 (연못가 버드나무 가지마다 푸르고)
    倚檻妖桃幾點明 (난간에 기대니 흐드러진 복사꽃 아름답기도 해라)
    丹杏笑風眞有意 (살구나무는 살며시 미소 짓는데 무슨 뜻으로 그러는지)
    白雲送雨大無情 (비 내리는 흰 구름 무정도 해라)
    歸來不識河中道 (내린 비 강을 이룬 우즈베키스탄 길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
    春水潺潺滿路平 (봄비가 길을 덮어 겉으로는 평탄해 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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