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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한국식 대국숭배 뿌리와 송의 멸망

  • 백범흠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한국식 대국숭배 뿌리와 송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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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나라 수도 포위한 몽골軍

남송은 1206년 재상 한탁주(韓侂冑) 주도로 동부 화이허와 서부 산시(陝西) 2개 전선으로 북벌을 감행했다. 산시 방향으로 북진하던 오희(吳曦)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금나라군에 항복했다. 금나라는 화이허 방면에 군사력을 집중해 남송군을 창장 유역으로 밀어붙였다. 금나라는 칭기즈칸의 대두로 위협을 받았으며 산둥에서 민란의 움직임도 포착돼 조속한 화평을 바랐다. 남송도 금나라군이 창장 유역으로 접근해오자 위협을 느꼈다. 양국은 1207년 남송의 조공 액수를 조금 올리는 선에서 타협했다. 칭기즈칸 군대의 말발굽소리가 국경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금나라가 남송 내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 유리한 상황에서 전쟁을 마무리한 것이다. 

몽골고원에는 유연(柔然) 이후 투르크계와 몽골계 민족이 함께 거주했으나 9세기 위구르족을 포함한 투르크계는 신장으로 서천(西遷)했다. 투르크계가 서쪽으로 옮겨간 후 북만주를 원주지로 하는 북선비(北鮮卑) 실위몽올(室韋蒙兀)이 몽골고원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후 몽골고원은 ‘몽골의 땅’으로 불렸다. 몽골고원은 한랭·건조해 생산성이 낮다. 몽골고원 전체가 부양할 수 있는 인구는 120만에 불과해 칭기즈칸이 초창기 거느린 몽골 병사 수는 10만 명을 넘지 못했다. 

금나라는 우문선비 계통 거란족으로 하여금 몽골족을 방어케 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활용했으며 몽골 부족 내 분열과 대립을 이용해 몽골고원을 통제해왔으나 칭기즈칸이 순식간에 몽골고원을 통합하면서 금나라가 쳐놓은 촘촘한 통제의 그물을 벗어던졌다. 칭기즈칸은 위구르 문자를 채용했으며 행정조직과 군사조직을 겸하는 십호·백호·천호·만호제를 도입했다. 칭기즈칸은 1205년, 1206년, 1209년 3차례에 걸쳐 서하(西夏)를 침공했으며 1211년부터 금나라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산시와 허베이가 주요 공격 루트였다. 

칭기즈칸이 금나라를 공격하자 북만주 싱안링(興安嶺) 산록(山麓)의 거란족은 금나라 통치에 반대해 야율유가(耶律留哥) 지휘 아래 봉기했다. 만주 전역이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병권을 장악한 흘석렬집중(紇石烈執中)은 무능하다는 이유로 위소왕 완안영제를 살해했다. 몽골군은 이 같은 금나라의 병란을 틈타 산둥까지 유린했다.
 
1214년 칭기즈칸과 그의 아들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 동생 카사르와 카치운(哈眞), 부하 무카리와 제베, 보르추 등이 지휘한 몽골군이 산시와 허베이를 유린하고, 금나라의 수도 연경을 포위할 태세를 취했다. 금나라의 간청으로 화의가 성립돼 몽골군은 일단 회군했다. 몽골군에 겁먹은 금나라는 황허 이남 카이펑(開封) 천도를 결정했다. 군호(軍戶) 가족 100만여 명도 허난으로 이주시켰다. 허베이, 산시 등 황허 이북이 공황 상태에 빠졌다.


망한 나라 君主의 자결

금나라 조정이 카이펑으로 도주하자 칭기즈칸은 다시 남진했으며, 1215년 연경을 점령했다. 금나라는 남천(南遷)하기 전 포선만노(蒲鮮萬奴)를 만주로 파견해 본거지 북만주를 확보하게 했다. 포선만노는 야율유가가 이끄는 거란 봉기군 제압에 실패하자 1217년 아직 몽골의 힘이 미치지 않던 두만강 하류에 동진국(東眞國)을 세웠다. 칭기즈칸은 연경에서 금나라 관리로 일하던 야율초재(1190~1244)라는 거란족 출신 천재를 얻었다. 칭기즈칸은 친형제나 다름없이 신임하던 무카리를 왕으로 봉해 연경을 다스리게 했다. 무카리는 연경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사방으로 군대를 보냈다. 결국 황허 이북은 모두 몽골군에게 점령당했다. 



금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남송은 조공을 중단했다. 서하도 금나라로부터 이탈해 남송과 손을 잡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칭기즈칸은 중앙아시아의 카라키타이, 호레즘, 호라산(아프가니스탄) 원정을 떠났다. 서하와 금나라, 고려 등 동아시아 국가에 잠깐이나마 숨 쉴 틈이 주어진 것이다. 

서하는 이안전(李安全) 시기에 몽골에 복속됐다가 칭기즈칸의 서정(西征) 참가를 거부해 1226년 다시 몽골의 침공을 받아 1227년 멸망했다. 서하 멸망 후 많은 수의 주민이 몽골군에게 살해됐으며, 일부만 오르도스에 남고, 대부분은 남쪽의 윈난, 미얀마, 부탄, 동쪽의 허베이, 서쪽의 티베트 등 사방으로 흩어졌다. 1232년 몽골군은 남송으로부터 길을 빌려 금나라 수도 카이펑으로 쳐들어갔다. 금나라는 남송에 사신을 보내 금나라가 멸망하고 나면 다음 차례는 남송이니 지원해달라고 애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금나라 애종(哀宗)은 남쪽 차이저우(蔡州)로 달아나고, 카이펑은 함락됐다. 

남송은 금나라의 애원과 다수 신료의 반대에도 맹공(孟珙)에게 2만 명의 병사를 줘 몽골군과 함께 차이저우를 포위하게 했다. 남송은 몽골에 군량도 제공했다. 1234년 1월 몽골군과 남송군의 합동 공격으로 성은 함락되고 애종은 자결했다. 애종의 죽음은 나라의 군주로서 부끄럽지 않은 최후였다. 조선의 인조와 고종을 필두로 고구려 보장왕, 백제 의자왕, 신라 경순왕 등이 망국의 책임을 지고 자결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애종은 망한 나라의 군주로서 최소한의 책임을 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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