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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장편소설

둔주곡(遁走曲) 80년대

제1부 / 제국에 비끼는 노을, 6화. 불만의 겨울

  • 이문열

둔주곡(遁走曲) 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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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용인]

[일러스트·박용인]

1.
일찍 퇴근해 돌아가니 아이 둘과 함께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아내가 황급히 일어나 그를 맞아주었다. 어린이 방송이 시작된 지 한참 지난 듯 아이들은 부리부리 박사에 취해 사람이 오고 가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늘 웬 일이에요? 일찍 돌아오셨네요.” 

아이들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아내가 가만히 거실로 나오며 물었다. 그도 시끄러운 안방보다는 거실이 나을 것 같아 가까운 소파에 털썩 앉으며 덤덤하게 아내의 말을 받았다. 

“밤에 당직이잖아. 연말연시 특별 당직. 옷 좀 편하게 갈아입고 일찌감치 저녁이나 얻어먹고 가려고.” 

“아, 참 그랬죠. 10·26이다, 12·12다, 안팎으로 뒤숭숭하긴 하지만 그래도 금년은 유별나네. 아무리 올해 마지막 한 주일이라지만 전에 없이 야간 당직이라니.” 



“이전에도 유신 직후 얼마까지는 우리 신문사에도 당직이 있었다더군. 언론이 위축되면서 호외 같은 거 찍는 일도 뜸해지자 당직도 흐지부지 된 것 같다는 거야. 그러다가 10·26 나고 다시 호외를 찍기 시작하면서 신문사에도 비상 걸렸다고 보면 되지 뭐. 그것도 올해 마지막 한 주일 동안이야. 편집국 내근 부서마다 하나씩 나와 서는 당직으로.” 

“어쨌든 알았어요. 월등히 좋아진 전기밥솥 덕분에 밥상은 언제든 차리면 되니까 나가기 10분 전에만 말해주세요.” 

아내가 그렇게 대답해놓고 전에 없이 자신도 맞은편 소파로 가 앉았다. 부부가 정색하고 그렇게 마주 앉는 게 그리 흔치 않은 일이라, 그가 탁자에 놓인 그날치 우편물을 자기 앞으로 쓸어 당기다 말고 아내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나한테 무슨 할 말 있어?” 

“아뇨, 그건 아니고.” 

아내가 살풋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가, 금세 마음속에서 무슨 큰 용기라도 낸 사람처럼 물었다. 

“그런데…, 저 아프칸이라는 나라가 어디 있어요?” 

현대 세계지리에 어두운 것이 무슨 대단한 흠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는 아내를 보고 그는 짐짓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아프칸이 아니라 아프간이겠지. 아프가니스탄 말이야. 거 왜 파키스탄 옆에.” 

“그런데 거기 사람들 이름이 왜 그래요? 대통령이 아민이고, 또 뭐라고 하드라, 타라키라던가. 거기다가 쿠데타 어쩌고 하니까 저 멀리 아프리카 어디쯤에 있는 줄 알았는데.” 

“헷갈릴 수도 있지 뭐. 워낙 별 볼일 없는 나라니까. 그거 좀 헷갈렸다고 분해할 거 없어. 근데 우리 마님이 왜 갑자기 아프가니스탄에 관심을 가지게 됐지?” 

“관심이 아니라 괜히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요. 아까 뉴스 시간에 ‘아프간의 소녀’라는 예쁜 여자아이 사진이 한 장 떴는데, 그 눈빛이 어찌나 애처롭게 보이던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부다페스트의 소녀’를 다시 본다는 느낌까지 들더군요. 그런데 그 나라 어떤 나라였어요? 그리고 이제 그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글쎄. 그 나라 역사 별로 기억나는 건 없고, 예전에 호라즘이라고 불릴 적에 칭기즈칸을 잘못 건드려 터도 망도 없이 망한 적이 있지. 인구의 절반 이상이 몰살되고, 왕은 물론 왕자들까지 수천 수만 리 세상 끝까지 몽고군에게 쫓겨 다니다 결국은 모두 참혹하게 죽었을 걸. 근래에는 영국이 그 나라를 두고 러시아와 일진일퇴하다가, 냉전 체제에 들어가면서 미국과 소련 사이에 끼게 됐지만, 제3세계라는 이슬람 비동맹국가군(群)에 남아 있었는데, 근래 소련군이 침공해 공산주의 위성국가로 넘어갈 판인가봐.” 

그는 참을성 섞인 성의를 내어 생각나는 대로 아내에게 설명해주었다. 그 성의가 통했는지 아내가 뭔가 끼고 듣는 기색 없이 받았다. 

“아, 그래서 ‘부다페스트의 소녀’가 생각났구나. 거 왜 헝가리 사태, 소련군 탱크가 부다페스트까지 막 밀고 들어가고.” 

“아직 그런 소문은 없지만, 그 비슷한 꼬락서니가 날 것 같아 서방 언론이 그리 호들갑을 떠는 거야. 그건 그렇고, 꼭 저물기를 기다릴 것 없이 되는 대로 밥 한술 줘. 이만 공장에 나가보게.”


[일러스트·박용인]

[일러스트·박용인]

“애비는 또 어디 갈라꼬? 나가디라도 오늘 밤에는 지발 술 좀 먹지 마래이. 요새 사흘도리로 억병이 되어 취해 댕기이, 내 참말로 걱정이고 또 걱정이따.” 

이른 저녁상을 건성으로 받은 뒤 집을 나서는데 마침 밖에 나갔다 돌아오던 어머니가 현관문을 가로막고 서서 술 단속부터 했다. 그러고 보니 그 주일이 그해 마지막 주일이라 그런지 이래저래 술자리가 잦았다. 그러나 고분고분 받아들였다가는 현관문 앞에서 한동안 잔소리에 시달려야 할 것 같아 얼른 공적인 방패막이를 내밀었다. 

“아니, 술이라니요? 오늘은 야간 당직 서러 나갑니다. 아시잖아요? 이번 연말에 신문사 비상 당직이 일주일 철야로 있다는 거.” 

“아, 글나? 당직이라카믄 술 걱정은 안 해도 될따마는 우짜든지 조심해라. 세상이 하도 수상시러부이. 밖에 뭔 일 있으믄 바로바로 집에 전화하고. 나도 이따가 신문사로 전화 한번 해볼 끼다.” 

하지만 그건 엄포였다. 이럭저럭 세상에 나와 일을 한 지 어느새 6년이 다 돼가지만 어머니가 일터로 전화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전화할 일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는 아내를 시켜 용건만 전했다. 신문사로 옮긴 뒤에는 더했다. 당신은 말할 것도 없고 아내가 함부로 그의 일터에 전화하는 것까지 못마땅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뒤따라 나오던 아내가 어머니의 그런 엉뚱한 엄포에 가만히 웃음 짓다가, 할끔 눈치를 보더니 갑자기 어머니를 거들고 나섰다. 

“저도 이따가 전화해볼 거예요. 편집부 당신 자리 전화벨이 울리면 제 전화인 줄 아세요.” 

실은 야간 특별당직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집을 나가 자정 무렵까지 있어야 할 곳은 신문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편집국을 비우게 되더라도 그렇게 벼르는 아내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아내는 정말로 긴급하지 않은데도 오직 부재 증명을 위해 직장에 대고 전화해댈 위인은 아니었다.

그날은 특집판도 지방판도 없어 야간 특별당직을 핑계로 일찍 퇴근하려는데, 역시 일찍 외근에서 돌아오던 문화부 김경수 시인이 길을 막듯 일부러 다가와 말했다. 

“그러잖아도 이형한테 할 말이 있어 서둘러 돌아왔는데, 너무 늦지 않아 다행이네. 이형, 오늘 저녁에 무슨 특별한 약속이라도 있어요?” 

김 시인은 문단 등단뿐만 아니라 신문사 기수로도 그보다 4년이 빨랐다. 그러나 나이는 한 살 위라 이래저래 응대(應待)에 신경 쓰였지만, 문단과 신문사에 걸친 이중의 인연이 옴니암니 따져볼 것도 없이 김 시인을 누구보다 가까이 지내야 할 직장동료로 만들었다. 기자 수습이 끝나고 그에게 자신이 가고 싶은 부서를 밝힐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그가 문화부를 오히려 기피 부서로 밝힌 것은 김 시인이 거기 자리 잡고 있어 왠지 거북해질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또 그가 그해 초 늦은 등단을 했을 때 마침 차장으로 승진한 김 시인이 그를 문화부로 끌어와야 한다고 우겨, 그가 사양하느라 진땀을 뺀 것도 어쩌면 자신이 바로 그 밑에 들어가 일하다가 서로 어색해지는 상황에 빠지게 되는 게 싫어서였을 것이다. 

“특별한 약속 같은 건 없습니다. 있다면 오늘밤 편집국 야간 당직이죠. 그 때문에 집에 잠깐 들렀다 오기 위해 조금 일찍 퇴근하려는 겁니다.” 

그가 그렇게 대답하자 김 차장이 차라리 잘됐다는 듯 그 특유의, 억양은 사투리지만 어휘는 반듯한 표준말로 말했다. 

“그럼, 오늘밤에 있을 여기 촌 문학 동네 망년회에 좀 나와주쇼. 아니 꼭 나왔으면 해요. 이따가 7시에 향촌동 귀퉁이 부용장(芙蓉莊) 알지요? 우리 ‘비가비’ 동인(同人)에다 연간(年刊) ‘팔공산’ 편집동인과 문협(文協) 지부 어른 몇 분 보태 한 여남은 명 될 거요. 모두 이형 보고 싶어 특별히 나한테 초대를 부탁했으니 빠질 생각은 마시오. 안 가면 중앙 문단에서 끗발 날린다고 유세 떤다는 소릴 들을 뿐만 아니라, 별 볼일 없지만 신문사에서는 하늘 같은 선배기자 부탁까지 무시한다고 모두 입이 벌겋게 씹어댈 거요.” 

그런 김 차장의 말투는 오랜 문학담당 기자로서뿐만 아니라, 그의 든든한 문단 배경이 되어주기도 하는 중앙의 문학지들을 찾아보는 일로 서울 나들이가 잦아, 절로 입에 익게 된 것이라는 추정도 있었다. 

“그게 아니라 오늘밤 편집부 특별당직이 내 차례라….” 

그가 망년회에 가기 싫다는 핑계로 둘러대는 말이 아님을 밝히려고 다시 한 번 더 그렇게 되풀이하자 시인에다 선배기자가 이제는 대놓고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받았다. 

“그거라면 괜찮소. 보자…, 오늘 밤 이형과 함께 당직을 서는 다른 내근부서 기자는 국제부 외신담당 정형서 씨지요? 신문사 한구석에서 국어사전이나 뒤적거릴 교정교열부 윤 차장이나 밖에서 어슬렁거리며 전화로 바람이나 잡는 외근 부서 고참 두엇 말고는. 그런데 우리 망년회 어차피 밤샘할 거 아니고 통금 전에는 끝날 술자리요. 12시까지만 정 기자가 내근 부서 당직 혼자서 좀 처리해달라고 하지 뭐. 무슨 큰일이야 있을까만, 부용장 전화번호 미리 일러주어 선을 이어놓고 있으면 별 탈 없을 거요. 정 기자가 이형보다 나이는 한 살 적어도 기수가 하나 빨라 말하기 뭣하면 내가 대신해줄까요?” 

일이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그에게도 지역 문인들과의 만남이 굳이 피하고 싶은 자리는 아니었다. 억지로 벌주를 받기보다는 청해서 선선히 받는 잔이 낫겠다는 기분으로 그는 짐짓 흔쾌한 목소리를 지었다. 

“아, 그 일은 제가 정 선배한테 직접 부탁해보지요. 어쨌든 늦어도 7시까지는 부용장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2.
집을 나서 보니 아직 오후 6시가 되기 전인데도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왔다. 버스를 타고 신문사에 앞에 내렸을 때는 벌써 가로등이며 상가 간판과 형광등 광고 문구에까지 불이 밝혀져 중앙통 양쪽 거리가 축제 전날 밤처럼이나 번쩍거렸다. 그제야 그는 동지가 지나간 지 며칠 안 되는 연말임을 떠올리며 깊어가는 겨울을 실감했다. 그러고 보니 집을 나설 때 무심코 받아 걸치고 나온 파카점퍼도 방한 내피가 두툼한 한겨울 옷이었다. 

불 꺼진 수위실을 지나 편집국으로 올라가니 휑한 사무실에 정 기자가 벌써 와 있었다. 평소 같으면 그 시각에도 무슨 일인가로 늑장을 부리며 편집국에서 빈들거리는 이가 몇은 있을법 한데, 정 기자 말고는 비로 쓴 듯 편집국에 아무도 없는 게 연말이 가까움을 한 번 더 실감하게 했다. 연말연시는 가족과 함께…. 

“정 선배. 일찍 나오셨군요. 집에 가서 저녁이나 먹고 나온다는 게 그만 좀 늦었습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멀리서 그렇게 인사를 건네자 자기 자리에서 무언가를 읽고 있던 정 기자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예절 바른 어투로 받았다. 

“나는 집이 앞산 쪽이라, 퇴근 않고 그대로 공장에 눌러앉아 있었어요. 도시락도 아침에 나올 때 아예 하나 더 싸온 게 있고.” 

그러고는 문득 벽시계를 바라보더니 한층 더 사양하는 어조가 되어 말했다. 

“뭐, 시간도 이제 겨우 6시 반이네요. 당직 근무를 시작하기에 결코 늦은 시간은 아닌 듯하고.” 

듣기로 정 기자는 원주에서 나고 자랐는데 대학교는 서울에서 나온 사람이었다. 일찍부터 품은 뜻이 있어 외국어학부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하고, 유학으로 박사학위를 따 전문성을 키운 뒤 돌아와 세상에 크게 쓰이기를 바랐다. 그런데 막상 학부를 마친 뒤 유학을 떠나려고 보니, 그때만 해도 냉전 시절이라 러시아문학으로 박사를 따기 위해서도 미국밖에 갈 데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미국 유학을 준비하며 영어 공부에 열을 올리다가 그만 요란한 연애 사건이 터져 어, 어 하는 사이에 두 아들을 둔 아버지로 취업 연령 데드라인에 걸리고 말았다. 그 바람에 시카고대학 러시아학과도, 박사학위 취득 후 소련 전문가로서 조국을 위한 봉사도 다 뒤로 물리고, 잠시 취업 전선에서 허둥거리다가 몸담게 된 곳이 이웃 도(道) 지방 신문사였다고 한다. 

무엇에든 열심이기는 하지만 답답하리만큼 고지식한 그를 빈정거려 엮은 그 이력 말고 좀 더 희화적인 사내(社內) 풍문으로는, 근래 들어 그가 기약 없는 미국 유학 대신 차라리 소련이 개혁으로 개방되기를 느긋이 기다리기로 했다는 것도 있었다.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같은 강경파들이 득세하는 1970년대 말의 소련을 두고. 그리고 그 무렵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사흘이 멀다 하고 국제 통신사들이 긴급한 외신을 각국에 쏟아내게 하는 소비에트사회주의국가연방을 두고. 

“그래도 군대 고참보다 훨씬 끗발이 높다는 신문사 선배를 먼저 와 기다리게 만들었으니 죄가 가볍지 않습니다. 듣자니 요 근래에도 어떤 뉴욕타임스 기자 하나가 바쁜 김에 함부로 선배기자 의자에 앉아 기사를 작성했다가 결국 그 신문사에서 쫓겨났다고 하던데요.” 

정 기자가 인사치레 말을 하도 정색하고 하는 바람에 그가 조금은 농담조로 그렇게 받아보았다. 그래도 정 기자는 읽던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여전히 고지식한 응답을 이어갔다. 그제야 정 기자가 읽고 있는 게 무엇인지 궁금해 그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보니 같은 건물에 있는 통신사에서 넘어온 외신 텔레타이프 유인물 뭉치 같았다. 

“그런데 선배, 뭐가 그래 열심이요? 뭐. 호외라도 띄워야 할 중대한 단신이라도 넘어온 게 있어요?” 

“조금 전에 옆 공장에서 오늘치 마지막 외신을 넘겨주고 간 건데, 흔한 AP, UPI 단신 같지만 종합해 손보면 제법 국제판 3,4단 기사는 될 만한 토픽이 여럿 되는데요.” 

“예? 어떤 게 그렇습니까?” 

“이를테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군 대병력이 드디어 카불까지 들어갔다는 단신 같은 것. 그 속보 중에는 어젯밤 소련군 특수부대가 대통령궁을 기습해 대통령 아민을 사살했다는 미확인 보도까지 있어요.” 

정 기자가 그제야 읽고 있던 텔레타이프 용지에서 눈을 떼며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그렇게 받았다. 

아직은 그에게도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가 그리 절실한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아침저녁 쏟아지는 외국 통신사 단신 속에 근래 무언가 이건 알아두어야겠다 싶은 것이 있었는데, 정 기자 말을 듣자 퍼뜩 기억나는 게 있었다. 자세한 이유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공산주의자 군부의 쿠데타로 집권한 친소(親蘇) 정권의 대통령 타라키가 전통적인 이슬람 반정부세력의 반란에 견디다 못해 소련군의 개입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대통령 아민이라니. 

“그 모퉁이 언제부터인가 어수선하더니 기어이 일이 났군요. 스탈린 때 시작된 소련의 제국주의적 행태는 프라하의 봄을 마지막으로 끝난 줄 알았는데 아프가니스탄이 10년 만에 다시 불러낸 것 같네요. 그런데 웬 아민입니까. 우간다 아민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숨어 사는 걸로 알고 있는데, 무슨 아민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라니.”

“이형, 요즘 외신 잘 안 보는 모양이네. 우간다의 이디 아민 말고, 아프간의 하피줄란 아민이요. 그 아민이 전임 무함마드 타라키를 죽이고 대통령이 된 지 하마 언젠데. 내 기억에는 벌써 석 달도 넘었을 거요.” 

정 기자가 조금 설명조가 되어 그의 성의 없는 국제뉴스 감각을 바로잡아주었다. 그 딴에는 눈여겨본다고 보았지만, 의식 속에 완강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정치적인 무관심과 둔감은 그의 이해와 기억에 어쩔 수 없는 흠결을 남기고는 했다. 

“실은 취급하는 정보량이 갑자기 늘어나서 그런지, 무엇이든 건성으로 보고, 강렬한 인상이나 자극이 없으면 기억으로 저장하지 못하는 게 점점 습성처럼 되어가는 느낌입니다.” 

그가 그렇게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을 하고 조심스레 퇴근 전 문화부 김경수 차장과의 논의를 조심스러운 제안 형태로 꺼냈다. 아무 대꾸 없이 그가 한 말을 다 듣고 난 정 기자가 생각 밖으로 선선하게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깐깐함인지 고지식함인지 모를 다짐 한마디는 잊지 않았다. 

“하지만 특별점검이 있거나 해서 이형이 간 곳을 밝혀야 할 경우가 있으면, 빠질 수 없는 문단 행사가 있어 잠시 나갔다는 사유를 바로 알려주기로 하지요.”

3.
부용장이라면 그 지역 문단 사람들이 좋은 물주가 나설 때나 중앙 문단의 중요 인사가 내려와 접대할 때 한 번씩 몰려가 호기를 부리는 허름한 요정이었다. 향촌동 끄트머리 동인동 쪽 이면도로에 들어앉은 디귿자 한옥이었는데 예전 도청이 향촌동에 있을 때는 요정 축에도 끼지 못하는 변두리 색싯집이었지만, 그때는 직할시 승격을 앞둔 대구시청의 후광을 입어 부용이란 꽃 이름에 장(莊)자까지 붙인 요정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행랑채까지 있어 좀 규모가 커 보이는 한옥을 적당하게 칸살 지은 방 대여섯에 산전수전 다 겪은 중년 마담이 일본식 호칭으로 ‘쓰미꼬미’라고 하는 색시 서넛을 데리고 술을 팔았다. 그러나 손님이 많아 몰릴 때는 따로 ‘가요’라고 하는 시간제 또는 비상근 아가씨를 불러, 색시 모자라 시비 걸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등단 전에 한 번, 등단 뒤에 한 번, 해서 부용장에 두 번 가본 적이 있는데, 두 번 모두 김경수 시인과 함께였다. 신문사 입사 후, 어떤 기회에 그가 늙은 문청(文靑)이라는 걸 안 김 시인이 등단 전이지만 먼저 인사나 하고 지내라면서 지역 문인 몇이 모인 자리에 불러준 것이 그 한 번이었고, 다른 한 번은 그가 요란하게 등단한 뒤에 김 시인이 나서 직접 알 만한 지역 문인들을 불러 모은 축하 술자리였다. 거기서 중등학교 교과서에 현대시가 실린 원로 시인 한 분과 역시 교과서에 나와 그도 외우는 시조를 쓴 시조시인 한 분을 만난 기억이 있다. 

신문사 앞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부용장으로 들어가는 이면도로 입구에 내리면서 시계를 보니 시간은 어느새 저녁 7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술꾼들이 흔히 ‘방우’라고 부르는 요정 마당의 허드레 일꾼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를 대청 왼편 두 칸 장방으로 안내했다. 안에는 셋씩 마주 앉게 되어 있는 교자상 셋을 나란히 붙여놓고 상 모퉁이 두 곳에 상석(上席)을 더 만들어 스무 명이 앉을 술자리를 마련해놓았는데, 길게 이어둔 상을 백지로 덮어 그 위에 몇 가지 밑 안주와 술병을 곁들여 놓은 게 제법 질펀한 연회 분위기를 예감하게 했다.
 
아직 아가씨들은 나와 있지 않고 중년의 마담만 나와 자주 드나드는 나이 든 문인들과 우스갯소리를 떠들썩하게 주고받고 있는데, 그래도 긴 술상을 따라 놓아둔 방석은 벌써 반 넘게 임자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가 열린 방문으로 들어서자 용케 그를 기억하고 있는 마담이 과장된 목소리로 반겼다. 그 소리에 곁에 있는 여류 시인과 무언가 얘기를 주고받던 김경수 시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원로 문인들에게로 데려갔다. 

그가 김경수 시인이 시키는 대로 인사를 드린 지방 문단 원로급은 60대 대여섯이었는데 그중 서넛은 그가 이미 아는 이들이었다. 그 가운데 세 사람은 반갑게 인사를 받으며 그의 손까지 잡아주었다. 중등학교 교과서에 시나 시조가 나오는 두 사람과 그 가을 중앙의 유수한 출판사에서 벌써 세 번째로 시집을 낸 지방 국립대 교수였다.
 
나머지 하나는 대구 지역에서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가 무게 있는 소설가로 알아주지만, 중앙 문단에서는 소설집 한 권 이렇다 할 출판사에서 낸 바가 없고, 잡지사나 신문사의 잡문 청탁도 일찍부터 끊어지면서 40대가 되기 전에 벌써 분개형(憤慨型)으로 비뚤어져버린 문필가였다. 50대가 되면서부터는 스스로 문단의 향원(鄕愿·이웃의 눈치를 살펴 처신해 자기 마을에서는 덕이 있다고 칭송받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사람)임을 공언하면서도, 그야말로 ‘세상을 흰자위 허연 눈으로 흘겨보며(白眼視)’ 살아왔는데, 그런 그에게 중앙 문단에서 출세한다는 것은 썩은 세상에 아부하는 매문도배(賣文徒輩)가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비뚤어진 향원이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자네 필명 불휴는 어불경인 사불휴(語不驚人 死不休·말을 하고도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쉬지 못하리. 또는 그만두지 못하리)의 그 불휴인가?” 

“실은 아닐 불(不)이 아닌 불(弗)을 씁니다. 글자는 다릅니다만 뜻은 같습니다.” 

그는 묻는 말투가 심상찮아 짐짓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예상대로 향원의 차가운 빈정거림이 이어졌다. 

“도저한 자부(自負)로세. 아니면 참혹한 오해거나.” 

“또 제 이름은 쉴 휴 밑에 불화 변에 해당되는 점 넷이 있는 ‘경사로울 휴(烋)’였습니다. 제 문중 항렬이 화항(火行)이라 외자 이름을 쓸 때는 다른 동항(同行)들처럼 글자 밑에 점 넷을 깔았지요. 그런데 그 휴 자에는 달리 ‘뽐내다’는 뜻도 있어 필명으로 쓰면서는 점 넷을 뺐습니다. 마침 두보의 그런 좋은 구절도 있고.”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줄 아니, 잘하면 그 하는 말이 사람을 놀라게 할 수도 있겠네. 오랜만에 문자 알아듣는 젊은이를 보았네.” 

향원이 목소리는 차가워도 그렇게 뭔가를 인정해주는 듯한 말을 했다. 그러자 곁에 앉았던 시조시인이 물색없이 기뻐하며 그를 추어주었다. 

“영남 제일 깽까돌이(사투리 속어로, 떼쓰고 행패 부리는 사람)도 알아보고 슬쩍 봐주는 사람이 있네. 역시 천하의 이불휴라 할 만하구먼.” 

그때 다시 바깥이 떠들썩하며 김경수 시인의 ‘비가비’ 동인 아홉 가운데 대여섯이 문인협회 지부장과 장르별 분과 위원장 서넛과 함께 들어왔다. 

“어른들이 벌써 와 계시는데 새파란 친구들이 뭐야. 반 시간이나 늦었네.” 

김 시인이 그렇게 동인들을 나무라자 그중 하나가 넉살 좋게 받았다. 

“그카지 마라. 우리는 하마 6시에 만났다. 바로 이리 올라 카이 너무 일러 한 잔쓱 걸치고 오다 보이 쪼매 늦은 거 아이가.” 

고등학교 교편을 잡고 있다는 키 큰 시인인데 그래놓고는 원로들한테 너부죽이 절이라도 할 듯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깊이 숙이며 빌었다. 

“아이고, 선생님들. 어른 분네들. 미안합니데이.” 

그러자 그들 동인의 이름이 왜 비가비인지 새삼 궁금해졌다. 노자류(流)의 말장난 비가비(非可非)인지 남도 말의 비가비(非甲)인지 김 시인에게 한번 물어본다는 게, 정작 만나면 잊고 지나가 그때껏 그 어원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들과 함께 묻어와 건들거리던 ‘하마 목이 팍 뿔라진(부러진)’ 양복점 주인이 상석에 앉은 원로들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마담을 보고 소리부터 질러댔다. 

“사람이 이마이(이만큼) 모옜는데 꽃은 어예(어째) 한 송이도 안 보이노. 어이, 거기 마담. 어른들하고 앉아 너불거리지 말고 가스나들 좀 불러 들라라. 둘 사이에 하나씩은 앉아 술을 따라야 안 되겠나? 쓰미꼬미가 모자라믄 얼른 전화해 가요라도 몇 더 부르고.” 

초저녁부터 목이 왼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어지고 혀끝이 말린 그 별난 이력의 시인은 그 무렵 지역 문단의 가장 ‘기마에’ 좋은 물주가 되어 있었다. 별난 이력이란 1960년대 말 한국이 처음으로 기능올림픽에 참가하던 무렵에 양복 부문 첫 금메달을 딴 것과 그러고도 다시 독일에 양복 디자인으로 유학을 다녀온 일이었다. 그리고 중앙통에 양복점을 차렸는데, 거기서 제대로 된 양복 한 벌을 맞춰 입으려면 미리 약속을 하고 가도 가봉(假縫)은 따로 차례를 기다려야 할 만큼 인기가 좋았다. 

그가 부리는 호기의 재원은 바로 그렇게 성업 중인 양복점인 듯했다. 그 무렵 부근 요정 마담들에게는 그가 초저녁에 취해 ‘목이 팍 뿔라지는’ 걸 보면 사흘 영업은 그대로 노가 난다는 말이 있었다. 그날 동인이 아니면서도 ‘비가비’ 동인들에 묻어올 수 있게 된 것은 유학 갔던 도시 이름에서 따온 시집 ‘슈바빈 거리’가 출판된 것과 무관하지 않은 성싶었다. 그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호기롭게 색시부터 찾는 게 벌써 그 어느 때보다 화끈한 물주 노릇을 각오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 이제 자리에 앉읍시다. 시간도 벌써 8시에 가깝고.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이만큼 모여 지역 문단 이름 걸고 망년회를 하는데, 최소한의 식순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국기에 대한 경례나 애국가 제창까지는 않는다 해도 상견례 정도의 의식은 치라야지. 이 중에는 서로 처음 보는 회원도 있을 낀데.” 

그때까지 별말 없이 원로들 자리에 끼어 있던 중등학교 교장 출신의 격식 따지기 좋아하는 원로 시인 하나가 갑자기 손뼉을 쳐 주의를 끈 뒤에 그렇게 말하고는 김경수 시인을 건너보았다. 중학교 은사이기도 한 그 원로 시인의 지긋한 눈길을 받자마자 김 시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제가 자리를 한번 정리해보지요. 오늘은 우리 문협 지부 이름을 걸고 하는 1979년도 송년회지만 공식적인 행사는 아닙니다. 회원 중에서 대구에 거주하시는 문인들을 중심으로 조촐한 상견례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고 보시는 게 옳습니다. 특히 지역의 권위 있는 문화상, 문학상 수상자 분들과 훈 포상 수훈자 및 달구벌 문학정신의 결실인 시집 소설집 희곡집 등을 중앙 문단의 권위 있는 출판사에서 내신 분들을 중심으로 모아본 자리로, 원래는 지난번 경대(慶大)에 강연 오신 동리(東里) 선생님을 모시는 환영회와 겸하려 했던 행삽니다. 그러나 12·12 사태로 사회 분위기가 어수선해 쓸데없이 규모를 키우기 부담스러워 차일피일 미루다가 오늘 우리끼리 모여 망년회 겸 조촐하게 술 한잔하고 회포나 푸는 자리로 바꿨습니다. 지역 원로 선생님들과 영광의 수상자 수훈자 분들을 중심으로 소감이나 듣고 오랜만에 서로 정분을 나누는 자리로….” 

김 시인이 미리 준비해온 것 같지 않은 데도 길고 조리 있는 개회사로 그렇게 자리를 펴나갔다.

4.
5년째 대구에 살면서 그는 중앙 문단에 등단하기 전에도 지방 문단 사람들을 더러 만난 적이 있다. 그러다 등단 뒤에는 그들과의 만남이 더욱 잦아져 피한다고 피해도 한 달에 한 번은 이런저런 행사나 문단 연줄로 지역 문인들을 만나야 했다. 그것도 대부분은 이취(泥醉)로 끝나게 되는 술자리에서였다. 

등단 전에 그들을 만날 때는 배움 혹은 훈습(薰習)에의 기대로, 지역에서 활동하지만 그래도 중앙 문단 또는 권위중심으로부터 문화생산자로 그 전문성을 인정받은 사람들을 주로 만났다. 등단 뒤에도 그는 되도록 그런 기준을 지켰지만, 다가오는 상대는 달랐다. 그들은 이제 마지못해 만나주는 선배 원로로서가 아니라, 중앙문단 권위중심으로부터 새로 화려하게 공인받은 그의 전문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스스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가 길지 않은 대학 시절을 통해 먼저 접촉한 것은, 하급이고 피상적일 수도 있지만 서울을 중심으로 생산되고 유통되는 중앙문화였고,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것도 그곳에 있는 권위중심이었다. 지식 오퍼상들의 번역을 통한 독점적 수입을 강단을 통해 주입받은 경우가 많은 대로 그 문화를 이끌어가는 정신도 대개는 당대의 권위중심에 가까웠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그의 문화 경험에는 별로 없는 문화적 지역주의 또는 뒤틀린 변방의식을 보면서 그는 묘한 곤혹에 빠졌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 때문에 그는 그 두 상이한 문화의 특질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자주 비교하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그 두 문화를 중심으로 두 개의 상반된 지역주의, 변방 문화의 행태를 추출해내게 되었다. 그 하나는 중앙과 지방, 중심과 주변의 구분 불가능을 주장하는 논의였다. 한마디로 우리가 바로 중앙이다, 우리가 권위중심이다, 라는 주장인데 그것은 1970년대 말인 그때까지도 지역 문단 일각에서 억지스러운 믿음처럼 유지되고 있었다. 그 근원은 무엇보다도 1950년의 ‘낙동강 방어선’과 ‘대구 사수론(死守論)’이 계기가 된 듯했다. 방금 그날 망년회의 서두를 장식하는 원로들의 방담 두 번째는 바로 그 계기를 구수한 입담으로 엮어가고 있었다.

“그때 우리 문단의 중심은 누가 뭐래도 우리 대구였지. 납북이나 월북이나 그게 그거지만, 춘원을 비롯해 박태원 이태준 백석 정지용 등등 북으로 간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죽거나 죽을 뻔한 사람들과 나중에 부역죄로 용수를 쓴 사람들 빼면 우리 문단은 몽땅 대구로 내려온 거나 다름없었다꼬. 고향이 영남이라도 청마(靑馬)나 지훈(芝薰)같이 문총(文總)구국대로 전선을 떠돌거나, 대구도 겁이 나 부산까지 내걸은(달아난) 사람들 빼면, 그들은 우리와 함께 이 새로운 중앙에서 문화를 창조하고 문학을 지켜나갔지. 그들이 서울로 복귀한 뒤에도 우리는 중앙문화, 권위중심으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지켜왔다. 우리는 여기 살면서도 서울에서와 다름없이 문학 생산과 소비 모두에서 중앙과 중심으로서의 지위를 잃지 않았어….” 

이미 30년이 가까워오는 고색창연한 시절의 추억에 기댄 입론(立論)이지만, 고등학교 교과서에 그가 쓴 현대시가 나오고, 시업(詩業)만으로 대학교 학장까지 지낸 칠순 노인의 회고라 그런지 다시 들어도 희미한 감동 같은 여운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수필집에서 수필 한 편을 골라 읽고 스스로 감동하는 그다음 발언자에 이어, 차례를 얻은 자칭 향원의 지방주의, 변방문화론은 또 다른 여운을 남겼다. 

“영남은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세도정치 200년에 정치적으로 조선의 변방이 되었고, 문화도 지역성에 갇혀버렸소. 낙동강 방어선과 대구사수론의 영광이 길어야 몇 달이었겠소? 대구로 몰려들었던 놀란 혼들은 1·4후퇴를 겪기도 전에 모두 부산으로 몰려 내려가고, 미당(未堂) 같은 사람은 부산으로 내려가서도 불안해 양광(佯狂)을 했다지 않소? 인민군이 부산까지 밀고 내려오면 미친 척해서라도 살아남기 위해서였는지 모르지만. 대구의 중앙문화론, 권위중심 주장은 신라 삼국통일 뒤로 끈질기게 이어온 영남패권주의에 바탕을 둔 허구에 지나지 않소. 

조반석죽(早飯夕粥)이지만 그래도 지역에 기반이 있는 이곳 사람들은 천리 길을 맨몸으로 빠져 나오다시피 한 피난 문인들에게는 열 부자가 안 부러운 사람들로 보였을 것이오. 그들이 내주는 문간방의 하룻밤은 고맙기 짝이 없고, 정성 들여 차려내온 나물 전 탁주잔은 감격스럽기까지 했을 것이오. 그래놓고 자신이 젊은 날에 끄적거려본 싯줄이나 습작이라고 적어놓은 잡기장을 내밀면 그게 아무리 하찮은 글이라도 차마 못 본 체할 수는 없었을 것. 웬만하면 쓸 만한 습작으로 보아주고, 쓸 만하면 가작이나 대작으로 추어주었을 것이오. 그것도 서울에서 내려온 중앙문화, 중심권위의 평가로. 하지만 그들이 서울로 돌아간 뒤는 기대와 달랐소. 그들이 가작이라고 평해준 원고들을 중앙의 여러 현상문예나 문학지 추천 모집에 응모해보아도 예심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퇴짜를 맞고, 오직 선택받은 몇몇 소수만 문단에 편입되어 중앙문화, 권위중심의 환상을 유지할 수 있었을 뿐이오.”

그 뒤로도 지방 문단, 문화 분권에 대한 논의가 몇 있었으나 처음부터 그 방 몫으로 기다리던 그 집의 쓰미꼬미 셋에 양복점 주인의 재촉으로 마담이 다시 전화로 부른 가요 셋이 더 와서 술을 따르는 바람에 차츰 술판으로 무르익어갔다. 그러다가 이내 문학이나 문단을 주제로 하는 정색의 논의를 벗어나 한 해를 보내는 지방 문인들의 격식 없는 방담으로 시끌벅적해졌다. 

술은 원래 맥주를 기본으로 시작했는데, 한사코 막걸리를 고집하는 원로가 있어 막걸리가 한 주전자 곁들여지고, 기어이 안동소주가 술이라고 노래해대는 중견 시인이 있어 안동소주가 또 한 병 들어왔다. 거기다가 9시 넘어서는 주최 측에서 준비한 귀한 양주가 두 병 더 나와, 술은 저마다의 취향대로 어느 한 주종으로 일관되게 마시기도 하고, 이술 저술 번갈아 마시기도 하고, 마실 때 아예 섞어 마시기도 하면서, 한 시간 가까이 흥겨운 술자리가 이어졌다. 

서로를 물밑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지내는 지방 문인들은 점차 대담해지는 방담으로 끼리끼리 취해갔다. 어떤 상 모퉁이는 시작 때의 앞뒤 없는 방담이 차츰 방향성을 지닌 시국담으로 바뀌어 종당에는 근래의 12·12사태를 그들 나름의 추리로 재구성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들과 함께 허리띠 풀어놓고 취할 처지가 못 되었다. 무슨 엄중한 경계가 필요한 사태가 벌어진 것도 아니고, 계엄사령부의 특별 지시나 신문사 경영진의 어떤 위기의식이 작용한 야간 당직도 아니지만, 어쨌거나 당직 날 자리를 비우고 나와 술에 취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소속 없는 사람처럼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며 그들의 방담을 듣는 걸로 술잔을 피하고 있는데, 한군데 상 모퉁이에서 나지막하지만 격한 목소리가 그의 주의를 끌었다. 

“전두환이도 그래는 게 아이라. 박정희가 소장으로 5·16 해가주고 나라를 들어먹었으이 지도 어예 되지 싶으지마는 택도 없다. 지금은 시대가 다르다 카이. 박정희가 장도영이 잡았드키(듯이) 지도 계엄사령관 정승화 잡아 였다꼬(넣었다고) 바로 이 나라가 지꺼(제 것) 되는 거는 아이라꼬.” 

그가 거기까지 들으며 으스스해하는데, 언제 왔는지 김경수 시인이 와서 차가운 목소리로 그의 말허리를 끊었다. 


[일러스트·박용인]

[일러스트·박용인]

“최형, 여기 오기 전에 전두환 합수부장 만나고 왔소? 아니, 언제 합수부장이 쿠데타하겠다고 그럽디까? 아니면 군복 벗고 대통령 나온다고 신문에 공고라도 했어요?” 

“그거는 아이지만, 일을 보이 딱 안 글나(그렇나)?” 

“봐요. 최형. 정말로 언론 좀 조심하쇼. 데이지도 않았소? 그래서 또 한 번 험하게 걸려들면 이번에는 전처럼 그렇게 일 없이 풀려나오기는 어려울 거요.”

 김 시인이 여전히 새초롬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자 그 최씨 성 쓰는 ‘비가비’ 동인도 조금 풀이 죽어 받았다. 

그러고 보니 함부로 들이켠 술로 풀려 있던 눈길이 조금 바로잡히는 듯도 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기분 상한 듯 한참을 불콰하게 김 시인을 바라보다가 불퉁거리며 자리를 떴다. 

“뭐 내가 어디 누구 고발을 믹있나(먹였나)? 신문 방송에 나가 되고말고 들고 떠들었나? 김형은 사람 만만해 빈다꼬(보인다고) 아무 데서나 사람 그래 틱틱 머티(핀잔)주고 너무 왈개(몰아부쳐)대지 마소.” 

하지만 아주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 같지는 않고, 화장실이라도 가는 듯했다. 그래도 김 시인은 찬바람 도는 얼굴로 그 눈길을 받을 뿐 조금도 미안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걱정이 되어 물었다. 

“같이 시 하는 동인끼리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그러나 김 시인은 나지막하지만 가시 돋친 목소리에 잘 쓰지 않는 사투리까지 섞어 내뱉듯 말했다. 

“에이, 괜찮에요. 어디서 주사가 들어도 괴상하게 들어가주고는.”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저는 김 선배가 최 시인을 같은 동인 중에서도 높이 치시는 걸로 알았는데.” 

그는 참지 못하고 그렇게 자신의 궁금함을 드러냈다. 그러자 김 시인이 그를 무엇 때문인지 사람들이 좀 듬성듬성 앉은 곁에 있는 술상으로 끌어다 앉히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 12일 자정 무렵인데, 동부서(東部署)에서 급한 전화가 왔더군요. 전화를 받으니 저 친구가 곤드레가 되어 횡설수설 나를 찾고 있더라고요. 나를 우리 공장 정치부 차장으로 부서까지 이동시켜서 말이요. 집 가까운 죄로 할 수 없어 나가보니 유치장 앞이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습디다. 술집에서 초저녁부터 술을 마시다가 무슨 일로 지갑이 털리고 일행을 잃어버렸는지, 무전취식에 기물손괴, 영업방해, 세 가지 혐의로 신고를 당해 경찰서로 넘어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내게 전화를 하고는 또 무엇 때문에 기세가 올랐는지 이번에는 신분 확인하는 경찰에게 덤벼들어 멱살잡이를 하며 유치장 앞을 뒹굴다가 입초 서던 순경에게 카빈 총대로 정신 차리라고 가볍게 한 대 맞은 모양입디다. 내가 도착하니 저 친구는 웃통까지 벗어붙이고 그러다가 맞아 멍든 곳을 내게 훈장처럼 내보이며 다시 당직 경찰에게 덤벼들다가, 이미 화가 잔뜩 나 있는 그들에게 따귀 한 대 더 맞았지요. 그런데 그때부터 저 친구는 반체제 인사에 저항시인이 되어 뒤늦은 유신 반대를 외쳐대는 겁니다. 참 황당합디다. 말려도 안 되고 달래도 안 되고. 그날 정말 저 친구 빼내오는 데 힘들었어요. 오죽 하면 이미 잠들어 한밤중인 법조 출입 오 선배한테까지 전화 올렸겠습니까.” 

“고생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최 시인은 뭐라 그럽디까?” 

“그게 더 고약합니다. 그때부터는 어디 가도 정색을 하고 자신은 반체제 인사고 저항시인이며 유신을 반대한다나요. 그리고 술만 취하면 거리낌 없이 그걸 자부하고 다닌다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내게도 자신은 이만 ‘비가비’ 동인에서 나갈 것이라고 하더군요. ‘비(非)라고 할 수 있는 비(非)’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아님’ 같은 말장난은 더 이상 자기 언어의 본령일 수가 없다는 겁니다.” 

김 시인은 거기까지 말해놓고 저만치 화장실에서 돌아오는 최씨 성 동인을 보았던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데데한 지방방송 그만하고 이제부터는 풍악을 울리자고 외쳐대는 다른 상머리로 갔다.

5.
술자리는 통금 예비 사이렌이 울리고서야 끝났다. 남아서 밤을 새울 사람들은 술상을 몰아 작은 방으로 옮겨 앉고, 집으로 돌아갈 사람들은 저마다 차편을 찾아 거리로 나서는 것을 보고 그는 걸어서 신문사로 향했다. 초저녁 혼잡한 중앙통에서 택시로 10분 거리면 걸어서 20분을 넘지 않으리란 예상으로 그랬지만, 혹시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그날 밤은 좀 걸으면서 술로 얼얼한 머리를 식히고 당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다가 첫 번째 만난 버스 정류장에서 원대(苑臺)까지 가는 버스로는 막차인 성싶은 버스가 군데군데 빈 좌석을 보이며 차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거리는 한산했다. 그는 거리를 따라 걸으면서 거기서 이제 20분도 안 남은 1979년 12월 28일 밤을 인상 지을 그 무엇을 찾아내려는 듯 차분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날 그 시각을 특별하게 기억나게 해줄 어떤 새로운 것도 낯선 것도 별난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아무래도 취했나보구나. 아니면, 그 난데없는 저항시인 최 아무개 때문인가. 그의 이상한 커밍아웃이…. 그전까지는 아무런 징후가 없다가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날부터 ‘그놈의 사진부터 밑씻개로 쓰자’는 시로 저항시인을 시작한 아무개처럼, 경찰서에서 술주정을 부리다가 유신경찰에게 따귀를 맞는 순간부터 반체제 시인이 된…. 도대체 통금 다 돼 점점 더 컴컴해지는 길거리에서 보기는 뭘 보고 찾기는 뭘 찾아?’ 

그러면서 두리번거리기를 그만두고 편집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재촉하는데, 이번에는 그날 낮에 무슨 우스개처럼 그와 일종의 시국담을 나눈 편집차장이 불쑥 떠올랐다. 그는 편집국 소속의 다른 기자들처럼 부서를 옮겨 다니는 법 없이 편집부에서만 10년을 근무해 차장이 되고, 다시 차장이 되어 8년째 근무하고 있었는데, 사람이 좋고 농담을 잘해 그날 아침에도 편집부 사람들을 한바탕 웃기고 근무를 시작했다. 그가 평소보다 한 30분 늦어 출근하는 걸 보고 옆자리에 사회면 담당이 까닭을 묻자 그는 편집국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을 만큼 큰소리로 말했다. 

“아이구, 이 사람아 말도 말게. 오늘 아침에 꼭 죽는 줄 알았네. 늦잠 때매 급하게 밥 한술 뜨고 출근하려고 구두를 신는데 초등학교 댕기는 막냉이가 마루 끝에 쪼르르 달려 나오더니, 아부지, 아부지 어무이 다 죽어가요, 안 카나? 아침에 큰딸아(딸애)가 상 채리(차려)주면서 그 사람 감기가 도져 머리 싸매고 웃방에 누었다 카는 소리 듣고도 출근이 바빠 딜따(들여다)보지 못하고 나오는 게 찜찜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감기에 뭐 어떨라(어떻겠나) 싶어 한마디 툭 한다는 게 ‘에이구, 내 복에’였네. 그리고 대문께로 몇 발작 내디디기도 전에, 와장창 카미(하며) 웃방 문이 자빠지고 운동회 청군같이 머리에 퍼런 띠를 맨 안사람이 뛰나오는데, 눈에 불이 철철 흐르더라 카이. 내 죽는 게 이녁한테는 그래(그리) 복이 되나. 오냐 내 죽어주께…. 그래이 어예노? 쥐야, 발이야, 빌어 겨우 주저안춨고(주저앉히고) 구두 바닥에 불이 일도록 뛰오는 게 이거 가지따(모두다).” 

그런데 그날 낮에 점심을 먹고 돌아오니 아직 아무도 돌아오지 않은 편집부 데스크 쪽에 차장만 앉아 편집국 한쪽 구석에 놓인 흑백텔레비전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대통령 시해사건 합동수사본부장이 정시 뉴스인지 임시 브리핑인지 모를 내용을 낭독조로 말하고 있었다. 

“전시(前示) 정승화는 대통령 시해 당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초청을 받아 궁정동 안가에서 만찬을 하며….”
 
대강 그렇게 시작하는 내용인데, 결론이 어떻게 다른지 모르지만 그 부분은 이미 여러 번 되풀이 들은 내용이었다. 그 발표의 중요 내용은 그날로 벌써 두 달 보름 넘게 되풀이 들어 거의 대부분 식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에게는 오히려 대통령 시해사건의 진행 과정이 자세하게 밝혀지면 밝혀질수록 앞으로 전개될 정국의 변화는 더욱 점쳐보기 막막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무성한 억측과 가설, 예단이 오히려 냉정한 추리와 분석을 가로막는 듯했다. 

“이거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정말 모르겠네요.” 

함께 텔레비전을 보던 그가 자신도 모르게 솔직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뭘?” 

“그때 그 사람은 갔지만 그 비슷한 사람이 다시 오는가. 아니면 20세기 한국의 테니스코트 서약이 있고, 새로운 국민공회가 앙시앙 레짐을 대체하게 되는가. 그리고 그 국민공회에도 18세기 프랑스처럼 푸셰나 탈레랑 같은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끼어들 수 있겠는가. 또 이미 간 사람 비슷한 새 사람이 오고 있다면 그는 지금 어디까지 왔는가. 살인마는 엘바 섬을 탈출하기는 했는가. 황제는 언제 루브르 궁으로 돌아올 것인가. 혹은 여기도 나폴레옹이나 루이 18세가 복고(復古)될 것인가.” 

“왜 자꾸 그래 어렵게, 어지럽게 물어쌓노? 이 기자, 너무 많은 거 알라 카지 마라. 딱 하나만 알믄 된다. 저기 저 대머리 번쩍거리는 사람 있제? 다음 대통령은 바로 저 사람이 될 꺼라꼬. 그게 기다리는 그때 그 사람이라면 너무 늦지는 않게 도착할 꺼라꼬.” 

그때는 그저 허허거리고 말았지만 그에게는 뒷날 생각할수록 신통하던 그의 안목이었다.

그날 피한다고 피했지만 적지 아니 받아 마신 술로 얼얼해진 머리 탓인지, 그날 부용장에서 편집국까지 걸어오는 사이 그는 이것저것 많은 것을 두서없이 떠올리며 왔다. 신문사 건물로 들어서는데 머지않은 경찰서에서 내는 통금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층계참 옆면의 벽시계를 보니 시침과 분침이 거의 일치한 밤 12시였다. 

그는 그 순간까지 몰두해 있던 상념에서 퍼뜩 깨어나며 그동안 혼자서 편집국 당직을 도맡았던 정 기자를 떠올렸다. 편집국 문을 열고 들어서며 보니 정 기자는 그가 떠날 때 본 자세 그대로 자신의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정 선배님, 별일 없었습니까?” 

“아, 왔어요? 그러고 보니 딱 12시네.” 

정 기자가 자정을 넘기고서야 돌아온 그를 슬쩍 비꼬는 듯 그렇게 받고는 이내 덤덤한 어조로 돌아가 덧붙였다.

“별일이 뭐 따로 있겠어요? 올해 정치적으로 하도 요란한 사건이 자주 터지니까 직장마다 급수 한번 올려본 거지 뭐. 옆 동네도 특별 당직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당직 같은 게 있었는지 조금 전에 또 오늘 마지막이라면서 외신 한 뭉치 더 넘겨주고 갔어요. 보니 별건 없고 아프간 사태 미확인 보도 몇 개 더 있더군요.” 

“어떤 겁니까?” 

그가 아직도 남은 멋쩍은 기분을 감추며 다시 슬쩍 물었다. 

“어제 거 왜 아민 피살 보도 속보 격인데. 아프간 대통령궁 공격에 동원된 소련군 부대가 그냥 특수부대가 아니고 여기저기서 차출한 대규모의 혼성 특수군 전단(戰團)이라나요. 그들이 대통령 경호부대를 기습해 전멸하고 아민까지 총살했다는 겁니다. 여전히 미확인 꼬리를 달고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 동네 일이 나기는 단단히 난 거 맞군요. 에이그, 안이나 밖이나.” 

그가 그렇게 대답을 해놓고, 신문사로 돌아오기 전 마지막 블록에서 갑작스러운 몰두로 상기한 일종의 구닥다리 체제론 분석틀을 떠올리고, 정 기자 곁 빈 의자에 자리 잡고 앉으며 그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리로 돌아오면서 예전에, 그러니까 대학을 떠나기 전 초년생 시절에 열을 올렸던 일종의 체제론이자 사회분석틀 같은 것을 떠올렸는데….” 

그가 그렇게 갑작스러운 열기로 앞뒤 없이 화제를 그쪽으로 끌고 가자 정 기자가 그의 술주정을 의심하는 눈치로 가만히 그를 살폈다. 

“이 기자 혹시 취한 거 아뇨? 이 자정을 넘긴 시간에 무슨 거창한 체제론에 사회분석틀이라니.” 

그러면서 읽고 있던 외신 뭉치를 덮었다. 그러잖아도 다 읽어가던 텔레타이프 묶음 같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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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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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주곡(遁走曲) 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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