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호

신동아-미래연 연중기획 중·국·통

현대 중국정치 권위자 조영남 서울대 교수

“현대판 시황제는 언론이 만든 허상… 시진핑 권력 장쩌민 후기보다 약해”

  • 이문기 미래전략연구원 원장,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입력2017-12-31 09: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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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習는 거부권 없는 ‘동급자 중 일인자’일 뿐

    • 잘못된 분석은 ‘중국 때리기’ 프레임 탓

    • 개혁·개방은 덩샤오핑 아닌 화궈펑이 주도

    • 남순강화는 鄧이 사활 걸고 보수파와 싸운 것

    현대 중국정치 권위자 조영남 서울대 교수. [홍태식 객원기자]

    현대 중국정치 권위자 조영남 서울대 교수. [홍태식 객원기자]

    조영남(53)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저술한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3부작은 중국 개혁기 정치에 천착한 거시적 관점 연구다. 1368쪽에 달하는 거질(巨帙). 중국이라는 용(龍)이 용솟음친 배경을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이라는 거인의 틀로 들여다봤다. 1권 ‘개혁과 개방(1976~1982)’, 2권 ‘파벌과 투쟁(1983~1987)’, 3권 ‘톈안먼 사건(1988~1992)’으로 구성됐다. 

    덩샤오핑 3부작은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이 사망한 1976년부터 1992년 중국공산당 14차 당대회까지를 다룬다. 1권 ‘개혁과 개방’은 수많은 엘리트가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굵직한 사건이 꼬리를 문 베이징의 봄을 분석한다. 2권 ‘파벌과 투쟁’은 보수파·개혁파의 갈등과 후야오방(胡曜邦·1915~1989)의 실각, 3권 ‘톈안먼 사건’은 개혁·개방의 절정인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를 해부한다. 

    1,2,3권의 주인공 격 인물은 화궈펑(華國鋒·1921~2008), 후야오방, 덩샤오핑 순서다. 현재의 중국을 형성한 개혁기의 사건이 숨 가쁘게 펼쳐진다. 

    “중국의 부상이 가팔라지면서 베이징을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한국 사회의 요구가 증가합니다. 개혁기 전체를 포괄하는 정치사·외교사 연구가 부족했어요. 외국 학자 연구를 수입해 공백을 메울 수밖에 없었고요. 장기 계획으로 중국 정치사 전체를 포괄하는 연구를 완성하려고 합니다.”

    굵직한 저서만 14권

    [홍태식 객원기자]

    [홍태식 객원기자]


    조영남 교수는 중국 현대정치 연구 권위자다.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 베이징대 현대중국연구센터 객원연구원,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방문학자를 역임했다. ‘중국의 꿈’(2013), ‘용(龍)과 춤을 추자’(2012), ‘중국의 법치와 정치개혁’(2012), ‘21세기 중국이 가는 길’(2009), ‘후진타오 시대의 중국정치’(2006) 등 굵직한 저서만 열네 권이다. 



    그는 2002년 서울대에 임용돼 2008년 조기 테뉴어(정년 보장) 대상자가 됐다. 조교수 시절 중국학 전공자가 논문을 한 차례 올리기도 어렵다는 ‘China Quarterly’에 세 번(2003·2004·2006년)이나 논문을 실었으며 세계적 석학인 캐빈 오브라이언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교수와 피터 청 홍콩대 교수로부터 조기 테뉴어에 대한 추천서를 받았다. 

    한국의 중국 연구자 중 연구 활동이 가장 활발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10년 전에는 서울대에서 조기 테뉴어로 선정돼 화제를 모았고요. 탁월한 성과를 연거푸 내는 비결은…. 

    “연구 주제를 하나 선정하면 10년씩 공부합니다. 중국 의회제도(전국인민대표대회)를 10년간 들여다보면서 사례 연구로 책 3권을 냈습니다. 그다음으로 연구한 게 중국의 법치, 즉 정치의 제도화입니다. 개혁기 중국의 정치제도가 어떻게 변했는지 탐구했습니다. 17년 동안 중국에서 100회 넘는 인터뷰를 진행했어요. 정치제도 변화 연구로도 책을 세 권 냈습니다. 그러곤 거시적 관점의 평생 연구로 넘어왔습니다. 한국 사회의 요구에 부응해 엘리트 정치에 초점을 맞춥니다. 정년 때까지 매달릴 작정인데 세 갈래 시리즈로 나뉘어요. 우선 덩샤오핑 3부작에 이어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을 두 권으로 다룹니다. 다섯 권으로 개혁기 중국 정치사를 일단락하는 겁니다. 둘째는 3권으로 구성되는 시리즈인데 ‘중국은 어떻게 움직이나’(권력구조와 운영), ‘누가 통치하나’(중국 엘리트 정치), ‘중국은 무슨 생각을 하나’(통치 이데올로기)가 각각의 주제예요. 끝으로 ‘동아시아 맥락 속에서 중국’을 살펴봅니다. 동아시아 사회주의 비교연구(북한·중국·베트남)를 진행하고, 한국·중국·대만의 발전국가 모델이 어떻게 다른지, 한·중·일 민족주의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들여다봅니다. 주제별로 하나씩 집중해 책을 순서대로 내놓는 게 아니라 동시에 진행합니다.”

    “혁명가면서 권모술수의 달인”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3부작,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3부작,

    개혁·개방기를 다룬 덩샤오핑 3부작은 대작입니다. 중국 연구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도 들었고요. ‘개혁·개방의 총 설계사’ 덩샤오핑이 중국에 남긴 족적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시진핑(習近平)이 2017년 10월 19차 당대회에서 잘 정리했습니다. ‘마오쩌둥이 중국을 떨쳐 일어나게(站起來·잔치라이) 했고, 덩샤오핑이 부유하게(富起來·푸치라이) 이끌었고, 자신이 중국을 강하게(强起來·창치라이) 만들겠다’는 게 시진핑 발언의 골자입니다.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했다면 덩샤오핑은 나라를 잘살게 했습니다. 덩샤오핑의 최대 업적은 인민이 잘 먹고 잘사는 게 혁명의 원래 의지라는 점을 정확히 깨달아 그것을 실천했다는 점입니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충격 속에서 물꼬를 확 틀어버렸습니다. 사회주의 재해석을 말로만 한 게 아니라 정책으로 실천했습니다.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덩샤오핑은 1989년 6·4 톈안먼 시위를 무력 진압해 사상자를 낸 비극의 책임자이기도 합니다. 

    “덩샤오핑의 삶에서 최대 오점입니다. 동유럽 사회주의가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보수 원로들의 진압 요청도 있었습니다. 약간의 양보를 하면 군대를 동원하지 않아도 됐는데 국내외 조건이 맞물리면서 그렇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초기 시장화, 개방된 중국을 설정하고 정책을 수립했을까요. 아니면 모색, 실험의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의 중국이 등장한 것일까요. 

    “미래에 대한 비전은 명확했으나 구체적·계획적 방법론은 없었다가 답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장경제 도입, 개방, 사적 소유 허용 등의 방향성은 확고했습니다. 1979년부터 덩샤오핑이 시장경제를 얘기합니다만 구체적 실현 방식은 정확하게 몰랐을 겁니다. 사회주의 국가의 점진적 시장화는 세계에서 누구도 해본 적 없는 실험이었습니다. 프랑스 유학 경험이 덩샤오핑의 결심에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사적 소유를 무시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뼈저리게 느꼈을 테고요. 

    덩샤오핑의 리더십은 원칙을 분명하게 세우면서도 방법론에서는 융통성이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정책에 확신이 서지 않을 때는 방법론을 다양화합니다. 시행착오도 두려워하지 않고요. 특구, 농촌, 도시에서 다양한 실험이 진행됩니다. 21개 조사단을 51개 국가에 파견해 시장경제를 학습한 것도 주목할만한 일입니다. 

    덩샤오핑은 국제 정세의 흐름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능력, 파악한 정세를 바탕으로 내부를 설득하는 능력,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능력, 집요하게 싸워서 마침내 이기는 능력을 갖췄습니다. 이론가면서 전략가, 혁명가면서 권모술수의 달인입니다. 덩샤오핑의 진면목은 1989~1992년 사이에 나타납니다.”

    덩샤오핑에 항복한 장쩌민

    남순강화(南巡講話)를 말씀하는군요. 

    남순강화는 1992년 1월 말~2월 초 덩샤오핑이 톈안먼 사건 후 중국 지도부의 보수적 분위기를 타파하고자 상하이(上海)·선전(深圳)·주하이(珠海) 등 남방 경제특구를 순시하면서 개혁과 개방을 더욱 확대할 것을 주장한 담화를 가리킨다. 

    “1977년(그는 1978년이 아닌 1977년을 개혁·개방의 시점으로 본다) 시작한 개혁·개방은 화궈펑이 주도한 겁니다. 덩샤오핑은 화궈펑에게 얹혀 갔고요. 반면 1989~1992년 개혁·개방을 다시 살리고 불붙이고 추진한 것은 덩샤오핑 혼자 한 것입니다. 시장경제에 대한 확신은 덩샤오핑에게 권모술수나 권력 장악 수단이 아닌 신념이었습니다.” 

    1989년 톈안먼 사건 무력 진압 후 중국은 서방의 경제제재를 받습니다. 보수파가 득세하면서 개혁·개방이 후퇴했고요. 

    “톈안먼 사건 전후로 덩샤오핑이 힘들었던 것은 참모이자 실천자를 잘라낼 수밖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처음엔 후야오방 세력, 그다음은 자오쯔양(趙紫陽) 세력이 실각해 사라집니다. 덩샤오핑으로서는 개혁·개방의 수족이 없어져버린 것이었습니다. 덩샤오핑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서도 물러나 백의(白衣) 상태였습니다. 방비책으로 심복인 양상쿤(楊尙昆) 등을 남겨놓았으나 이전과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또한 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진 것은 중국에 쓰나미가 몰려온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보수파 물결이 거셀 수밖에 없었죠. 공산당 지도부가 보수 일색으로 재편됩니다. 게다가 1989년 공산당 총서기에 오른 장쩌민(江澤民)은 덩샤오핑이 추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덩샤오핑은 장쩌민 굳히기에 나섭니다. 핵심이라는 지위까지 줘버리고 측근들에게 장쩌민과 다투지 말라, 지원하라고 지시합니다. 지도부가 바로 서는 일을 철저하게 지원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장쩌민 등에게 개혁·개방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보수파 핵심이던 리펑(李鵬)과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길은 두 갈래로 나 있었습니다. 개혁·개방 쪽으로 정책을 바꾸는 게 하나, 그것이 안 되면 지도부를 바꾸는 게 다른 하나였습니다. 1992년 남순강화에 돌입하기 이전인 1991년 2~5월 덩샤오핑은 상하이로 가서 1차로 시위를 합니다. 정책을 바꾸기 위한 일종의 선전 작업에 나선 것이죠. 그런데 씨도 안 먹힙니다. 2단계로 모든 것을 걸고 한 게 남순강화예요. 남순강화 때 중앙군사위원회의 제1부주석이던 양상쿤을 대동합니다. ‘말 안 들으면 장쩌민도 내가 자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엔 장쩌민이 항복하는 스토리고요.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는 중국 당국이 선전하듯 남부 지방을 순회하면서 새로운 비전을 알린 게 아니라 사활을 걸고 싸운 겁니다. 톈안먼 유혈 진압 최종 책임자가 아니라 개혁·개방의 창시자면서 완성자로 죽어야 한다는 개인적 욕망도 작용했다고 봅니다.”

    “100년간 동요하지 말라”

    학계의 기존 인식과 다르게 덩샤오핑의 1978년 전후 결단보다 남순강화를 더 높게 평가하는군요.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 말 개혁·개방은 화궈펑이 한 겁니다. 중국공산당은 문화대혁명(1966~1976)이 시작된 1966년부터 1978년 11기 3중전회까지의 공식 자료를 일절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문화대혁명 시기 자료는 민감해 숨겨놓았다면 1977년, 1978년 자료는 왜 공개하지 않을까요? 화궈펑의 업적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개혁·개방은 1977년 11차 당대회 때 화궈펑이 시작한 거예요. 덩샤오핑의 리더십이 빛나는 것은 1989년 톈안먼 사건에서 1992년 14차 당대회까지입니다. 놀라운 것은 덩샤오핑이 88세 때 남순강화에 나섰다는 점입니다. 알츠하이머 초기로 잘 걷지도 못하고 말도 어눌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평생의 신념인 개혁·개방을 밀어붙인 겁니다.” 

    덩샤오핑은 1992년 남순강화를 통해 개혁·개방 의지를 다진 후 한국과 수교도 결정했다. 그는 남순강화 때 “당의 기본 노선(개혁·개방)은 100년간 동요하지 말고 견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89~1992년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했는데도 중국공산당은 지금껏 건재합니다. 중국은 시장화, 개방화에 성공하면서 강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시장경제와 공산당 1당 독재는 모순(矛盾)처럼 느껴집니다. 중국공산당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요. 

    “첫째, 리더십입니다. 개혁기에 덩샤오핑의 정확한 판단이 없었다면 현재의 중국 모습은 달랐을 것입니다. 둘째, 국가 운영의 제도화가 이뤄졌다는 점입니다. 중국 정치는 민주화가 아니라 제도화 차원에서 들여다봐야 합니다. 셋째는 전략과 정책의 올바른 수립입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덩샤오핑 이후 장쩌민, 후진타오(胡錦濤), 시진핑까지 제대로 된 리더십이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40년간 최고지도부를 형성한 리더십이 이렇듯 연속적으로 유능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중국 경제 발전 과정에 ‘개발독재’라는 표현을 붙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대목에서 한국, 중국, 대만, 나아가 일본까지 묶을 수 있습니다. 시장경제와 권위주의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권위주의가 인간 삶의 가치, 자유, 인권, 평등을 보장해주지는 못하더라도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따라 물질적 복리 증진엔 기여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발독재라는 표현보다는 ‘발전국가’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중국 발전 모델과 새마을운동

    권위주의적 발전 모델이 유독 동아시아에서 성과를 거뒀습니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발전국가로서 성공할 특수한 조건을 갖췄다고 봅니다. 한국·대만·싱가포르 등은 절박했습니다. 패망한 일본은 다시 올라서야 한다는 열망이 거셌고요. 한국은 6·25전쟁으로 폐허가 됐으며 대만은 대륙에서 쫓겨났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 쫓겨나듯 독립한 싱가포르는 말할 것도 없고요. 한국은 북한, 대만은 대륙과 경쟁했습니다. 동아시아 국가들에는 생존의 절박함에 덧붙여 정치문화로서의 집단주의도 있었습니다. 권위의 존중과 수용은 정치문화로밖에 설명이 안 돼요. 덧붙여 능력주의 교육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는 교육받은 사람에 대한 인정이 존재했습니다. 한국의 교육열도 그런 전통에서 비롯했고요. 중국 또한 절박함, 집단주의, 능력주의 등 발전국가로서 성공할 요소를 두루 갖췄습니다. 남미, 아프리카는 물론이고 태국, 필리핀 같은 나라와 다른 점입니다.” 

    경제 발전이 심화하면 사회 다원성과 참여에 대한 욕구가 증가해 정치 민주화를 촉진한다는 게 정치학의 일반적 견해입니다만 한국·대만 등은 독재를 거친 후 일정 시점에서 민주화가 이뤄졌으나 중국은 민주화, 다당제를 거부하고 일당제를 지속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현재 싱가포르의 1당 우위 모델을 염두에 두고 정치제도 변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정치 발전은 앞서 언급했듯 민주화가 아니라 제도화의 틀로 들여다봐야 합니다.” 

    중국은 ‘차이나 모델’을 세계로 퍼뜨려 인류 사회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의지도 밝힙니다. 중국식 발전 모델의 세계화라고 할까요. 실현 가능한 얘기라고 봅니까. 

    “한국도 똑같이 한 일로 거창하게만 볼 사안은 아닙니다. 새마을운동을 해외에 수출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원조 격으로는 리콴유(李光耀·1923~2015) 싱가포르 전 총리의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가 있습니다. 물론 중국 모델의 수출은 리콴유와 마하티르 모하마드(93) 전 말레이시아 총리가 ‘아시아적 가치’를 얘기할 때보다는 파급력이 훨씬 크다고 하겠습니다. 중국은 덩치가 큰데다가 천문학적 자금이 함께 갑니다만 원조를 받고 중국의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은 개발도상국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기존의 보편적 가치를 추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얘기예요. 일례로 한국이 중국 모델을 받아들일 까닭이 있습니까? 중국 모델의 세계화는 북미, 유럽, 아시아의 잘사는 나라에는 설득력이 전혀 없습니다. 아프리카, 남미, 동남아 일부에나 영향을 미치겠지요. 국방력이나 경제력 등 하드파워를 갖춘 후 소프트파워를 강화하려는 것이 보편적 현상입니다. 한국도 김대중 정부 때부터 비슷한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중국 때리기’ 프레임

    2017년 10월 19차 당대회 이후 시진핑 1인 권력이 강화되면서 집단지도체제가 무너졌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일각에선 시진핑의 정치이념을 ‘사상’으로 표현한 것을 두고 덩샤오핑을 넘어 마오쩌둥 반열의 지도자로 인정받았다고 분석합니다. 한국과 서구 언론에 ‘현대판 시황제’라는 표현도 등장했습니다. 1인체제 등장으로 인해 중국 엘리트 정치의 불안정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언론의 잘못된 분석이 심각한 수준입니다. 중국 현대 정치에 무지한 데다 ‘중국 때리기’ 프레임을 짜놓고 베이징을 들여다보니 오보가 이어지는 겁니다. 시진핑이 절대 권력을 확보했으며 1인체제를 구축했다는 것은 중국 때리기 프레임에서 비롯한 잘못된 분석일 뿐입니다. ‘시(習)황제론’은 2014년께 서구 언론에서 가장 먼저 거론됐습니다. 시황제론은 ‘중국이 불안하다’ ‘오래 못 간다’는 논의로 이어집니다.” 

    2017년 10월 24일 끝난 중국공산당 19차 당대회에서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이 지도이념으로 당장(黨章)에 추가됐다. 장쩌민,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은 당장에 각각 이름이 포함되지 않은 ‘3개 대표론’ ‘과학발전관’을 포함하는 데 그쳤다. 

    “19차 당대회를 다룬 한국 언론이 가장 많이 사용한 표현이 ‘절대 권력’ ‘1인체제’입니다. 당대회를 거치면서 시진핑이 절대 권력을 획득했고, 집단지도체제가 1인체제로 변모했으며 2022년 20차 당대회에서 시진핑이 권력을 연장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게 골자입니다. 시진핑 사상이 당장에 삽입되면서 그의 권위가 덩샤오핑을 능가해 마오쩌둥에 버금가게 됐다는 잘못된 분석도 나왔습니다. 덩샤오핑의 통치이념은 ‘덩샤오핑 이론’이라고 하지만, 시진핑의 그것은 ‘마오쩌둥 사상’처럼 ‘시진핑 사상’으로 부르기에 그렇다는 것인데 잘못된 접근입니다.”

    개인 권력 vs 직무 권력

    왜 잘못된 분석입니까. 

    “중국 엘리트 정치에서 최고지도자가 권력을 획득하고 행사하는 기제(mechanism)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은 혁명과 국가 건설 과정을 통해 명성을 얻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당·정·군을 망라하는 조직과 전국 각지에 두터운 인적 관계망을 구축했습니다. 마오쩌둥의 표현을 빌리면 ‘당·정·군·민간·학교(黨政軍民學) 등 모든 분야와 동·서·남·북·중앙(東西南北中) 등 모든 곳에’ 동료와 부하가 포진해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막강한 권력을 획득하고 행사한 것입니다. ‘개인 권력’ ‘카리스마적 권력’인 것이지요. 

    반면 덩샤오핑 이후 시기의 지도자(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등)는 공산당 총서기나 국무원 총리와 같은 공식 직위를 통해서만 권력을 획득하는 데다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이 가진 전설적 명성이나 인적 관계망이 없습니다. 또한 법률과 당규(黨規)가 정한 절차에 따라 권력을 행사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공식 제도와 절차를 무시하고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또한 이들은 다른 정치 세력(파벌)과 경쟁 속에서 타협하고 대립하면서 권력을 행사합니다. 다시 말해 ‘제도 권력’ ‘직무 권력’이란 얘기입니다. 

    정리하면 시진핑은 장쩌민과 후진타오처럼 제한적 권력을 행사하고, 엘리트 정치도 집단지도체제가 유지되고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다만 시진핑은 출발부터 권력 기반이 전임자보다 훨씬 견실했으며 부패 척결과 정풍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해 일반 당원과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획득했기에 전임자보다 강력한 권위를 누렸습니다. 또한 이런 업적을 인정받아 2016년에는 ‘핵심(核心)’ 지위를 획득했고, 2017년 당대회에서는 ‘시진핑 사상’이 당장에 게재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한마디로 시진핑은 집단지도체제 속에서 전임 총서기인 후진타오보다는 더 커다란 조종자(coordinator)로서의 권력을 행사하지만, 아직은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처럼 최종결정자 혹은 거부권(veto)을 행사하지는 못하는 ‘동급자 중 일인자’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파벌 간 견제와 균형”

    시진핑이 2022년 당대회 때 집권을 연장하거나 후계자를 지명한 후 막후실세로 장기집권하리라는 분석도 있습니다만…. 

    “시진핑 1인체제로 갈 수 없다고 봅니다. 연령 규정을 바꾸면서까지 직을 유지하지 못할 겁니다. 그 정도까지 능력이 안 됩니다. 덩샤오핑의 전례처럼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어렵다고 봅니다. 장쩌민처럼 공산당 총서기와 국가주석은 후임자에게 넘겨주고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직함만 갖고 군 개혁만 하겠다는 정도는 생각해볼 수 있으나 그런 경우에도 시진핑 1인 체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시진핑의 권한이 강화된 것과 1인체제로 가는 것은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거듭 강조하건대 중국 정치의 제도화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된 분석이 나오는 것입니다.” 

    ‘시진핑 1인 우위 체제’라는 표현에도 동의하지 않습니까. 

    “말장난일 뿐입니다. 장쩌민 후기보다 시진핑 권력이 강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물론 후진타오 때보다는 훨씬 강하고요. 장쩌민 후기에는 원로들이 얘기하는 것에 총서기가 콧방귀도 뀌지 않습니다. 시진핑이 그 정도 권력까지 갖지는 못할 것으로 봅니다. 제도화 과정을 거치면서 파벌 간 견제와 균형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됐습니다. 특정 세력이 장기 집권하지 못하는 게 중국 엘리트 정치가 만들어놓은 집단지도체제의 장점입니다. 시진핑 장기집권 운운은 중국 때리기 프레임이 만든 허상일 뿐입니다.” 

    중국이 동아시아·서태평양에서 패권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세계 패권을 두고 미국과 경쟁할까요. 

    “중국 공산당이 소련의 패망을 지켜본 후 각종 회의에서 학습할 때마다 강조한 게 있습니다. 첫째, 민주화는 안 된다. 둘째, 미군과 군사적 패권 경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중국이 망한다는 얘기입니다. 19차 당대회에서 세계 패권에 대한 도전을 선언했다는 것은 과장된 분석입니다. 2050년까지 슈퍼파워가 되겠다는 선언은 새로운 것이지만 미국의 패권을 대체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국의 구매력지수 GDP(국내총생산)가 2014년 미국을 넘어섰습니다. 명목 GDP는 2025~2030년 미국을 추월하리라는 분석이 많습니다. 2050년 미국에 견줄만한 강대국이 되겠다는 시진핑의 얘기는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미국은 GDP에서 영국을 추월한 뒤 70년 만에 패권국이 됐습니다. GDP에서 미국을 추월한 후 20~30년 만에 슈퍼파워가 되겠다는 것은 합리적 목표 설정입니다. 그렇더라도 미국과의 패권 경쟁이, 중국이 슈퍼파워가 되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전면적 충돌 방식의 패권 도전이 아닐지언정 중국 특유의 장기적 관점에서 끈기와 인내를 갖고 추진하겠지요.
     
    “부상한 강국 중 세계 패권 도전에 뜻을 두지 않은 국가가 과거에 있었을까요. 독일·일본·프랑스는 어땠습니까. 중국도 똑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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