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호

난임전문의 이성구의 수태이야기

“낳아놓으니 금방이야”

  • 이성구

    입력2018-01-14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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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해를 보내고, 또 한 해를 맞이하고… 나이가 드니 세월이 정말 빠르게 느껴진다. 사람이 태어나면 ‘세월’이라는 기차에 탑승해야 한다더니 기차의 속도가 나이와 비례하는지 30대에는 30km/h, 40대에는 40km/h, 50대에는 50km/h로 달리는 듯하다. 그래서 30대에 느끼는 1년과 50대에 느끼는 1년이 그토록 다른 것일까? 

    다행스러운 건 나이 든다는 게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거다. 인생의 참맛을 이제야 좀 알 것 같고 멋도 있어서다. 또 내게는 ‘내 젊은 날의 초상’을 닮은 분신(자식)이 있지 않은가. 비록 내 뜻대로 자라지 않았고, 부족한 것이 많고 갈 길이 멀지만, 존재 그 자체로 든든함이 느껴지는 것만은 사실이다. 자식이란 바로 이런 의미가 아닐까. 

    요즘 자식을 안 낳겠다는 딩크족 중에 고령 부부가 많다. 늦은 나이를 핑계로 무자식으로 살 궁리를 제대로 하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주변에 직업도 내세울 만하고 경제력도 탄탄한데 ‘이 나이에 자식을 낳아서 뭐하나’라며 노력도 하지 않고 포기하는 부부가 적지 않다. 사랑과 유흥을 즐길 때는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고 외치면서 자식을 낳으라니 나이 탓을 하다니…, 권리만 찾아 먹고 책임과 의무는 버리려는 모습으로 느껴진다. 

    물론 나이가 중요하다. 인간의 수태력이 나이에 자유롭지 못한 건 사실이므로. 손대면 톡 터질 것 같은 청춘일 때 생식력이야 생생하다 못해 비릿할 정도였다. 이부자리만 깔면 만리장성이 쌓아져서 예기치 못한 사고로 덜컥 임신이 되어 안절부절못한 기억, 떠올릴 자 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젊은 날에 흔하디흔했던 사고(임신)가 나이가 들어서는 노력해도 힘들어진다. 그것이 바로 나이 듦의 참담함이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갱년기가 온다. 리비도(성욕)가 예전 같지 않고 정자 상태도 비실댄다. 그래서 고령 부부들은 임신을 계획하다가도 포기해버리는지 모른다. 그러고선 이렇게 말한다. “이 나이에 무슨. 아이도 늙은 부모가 달갑지 않을 거야”라고. 

    자식 낳는 일을 포기한 고령의 부부들에게 묻고 싶다. “현재 한국의 최빈사망연령이 몇 살인지 아느냐”고. 최빈사망연령은 평균수명과 다른 개념이다. 가장 많은 수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연령이 바로 최빈사망연령이다.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81세지만, 최빈사망연령은 더 고령이다. 매년 수치가 상승해 90세에 가깝다. 한마디로 암(癌)과 혈관질환이 없는 이상 대부분의 노인이 90세 이상 살다가 사망할 것이라는 얘기다. 평균 은퇴연령을 감안했을 때 은퇴 후 40년을 더 살아야 한다. 



    그래. 좋다. 그 40년을 골골거리지 않고 팔팔하게 산다고 치자. 은퇴 후 40년을 아내 얼굴만 쳐다보며 늙을 수 있을까? 일가친척과 친구와 이웃사촌들이 내 곁에 마냥 같이 있어 줄까? 그러지 않을 공산이 크다. 제아무리 워커홀릭도, 친구를 가족보다 더 챙기던 가장도 황혼이 되면 느끼게 된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은 남일 뿐이라는 것을. 너도나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황혼의 시즌이 되는 것이다. 

    또 오래 살고 볼 일이 펼쳐진다. 말썽꾸러기였던 아들과 딸이 서른이 넘고 불혹이 되자 철이 들어 찾아와주고, 비로소 대화가 되어 세상일보다 가족이 훨씬 푸근하고 의미 있게 느껴지게 된다. “효도는 오래 살면 받는다”던 옛말이 달리 있었겠는가. 늙어야 알 수 있는 인생의 맛과 멋을 남이 아니라 내 자식에게 덕담으로 들려주며 자식으로부터 진심 어린 술 한잔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무자식으로 노년을 맞이한다? 쓸쓸함과 참담함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자식 낳기에 너무 늦었어요”라고 말할 고령 부부가 많을 것이다. 요즘 만혼(晩婚)과 재혼(再婚) 등으로 40대에 짝을 찾는 경우가 흔하다. 45세 이전이라면 부부가 포기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낳아서 키울 수 있고, 최빈사망연령을 계산하면 40대 초반에 낳아도 자식이 50이 되는 걸 보고 죽을 수 있다. 

    자식은 팍팍한 현실을 잊게 만드는 신비스러운 나의 분신이다. 고령 부부에게 자식이 있으면 경제적으로도 훨씬 덜 쓰게 되고 저축상품에 관심이 많아진다. 사회적으로 안정된 연령에 늦둥이가 생기면 경제적으로 오히려 득이 많다. 욕망의 부질없음을 잘 알고 있는 중년일수록 인내심과 절약 정신이 더 강하게 발휘된다. 무엇보다 건강하게 늙을 수 있다. 독신 남녀보다는 자식을 키우는 싱글 남녀가 훨씬 덜 늙고 면역력도 강하다는 건 새삼스럽지 않은 의학적 결론이다. 

    인간에게 가장 의미 있는 것은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아무리 명예가 드높고 명성이 있다고 해도 실제 삶은 고단함의 연속이다. 또한 좀 더 벌기 위해, 좀 더 출세하기 위해 발버둥 치며 달려간 곳이 다름 아닌 벼랑 끝인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 벼랑 끝에서 가족은, 피붙이는, 명백한 나의 편이다. 가족은 최고의 충전소다. 충전이 잘되었을 땐 두려움과 죽음까지 뛰어넘게 된다. 죽더라도 분신이 있으면 덜 외롭다. 

    필자의 환자 중에는 고령의 부부가 유독 많다. 눈물겹도록 힘겨운 도전을 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후회막급이라고 말한다. ‘왜 빨리 임신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을까?’ ‘왜 시험관아기 시술을 빨리 시작하지 않았을까?’ ‘왜 젊은 날에 자식이 없어도 된다고 호언장담을 했을까?’라며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을 한다. 

    “시작해봅시다. 임신할 수 있으니 걱정 마세요.” 

    이 말을 하루에 수십 번 반복한다. 40대라는 늦은 나이에 자식을 낳아보겠다고 함께 난임병원을 찾아온 부부들은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것이다. 

    지금까지 6만례 이상 시험관아기 시술을 행했다. 시내를 걷다 보면, 혹은 음식점에서 밥을 먹다 보면 누군가가 저벅저벅 걸어와서 꾸벅 인사를 한다. 누구지? 아, 생각났다. 당시 아내가 마흔이 넘었고, 남편이 쉰이 넘었는데 시험관아기 시술에 수차례 도전해서 겨우 임신에 성공했었지, ‘언제 키우나’ 내심 걱정했는데, 어느새 중학생의 모습으로 부모에게 등 떠밀려서 멋쩍은 인사를 해 온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거 참, 낳아놓으니 금방이야.”


    이성구
    ● 1961년 대구 출생
    ● 서울대 의대 졸업
    ● 서울대병원 산부인과 전공의
    ● 대구마리아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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