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월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 숨진 서울대생 박종철의 아버지(김종수)가 아들의 유해를 얼어붙은 임진강변에 뿌리며 오열하는 장면. ‘철아, 잘 가 그래이, 이 아버지는 할 말이 없데이’라는 그의 말은 동아일보 황열헌 기자의 단독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그런 장 감독의 세 번째 영화가 1987년 6월항쟁의 역사를 담은 시대극이 될 거라 했을 때 기대와 우려가 교차했다. 한국사의 굵직한 사건을 다룬 영화가 역사의 무게에 짓눌린 범작이 되거나 최루성 가득한 ‘국뽕영화’가 되는 경우를 숱하게 보아왔다. 그래서 ‘장준환이 만들면 뭔가 다를 거야’ 하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거기 참여한 배우들 명단을 보고 기겁했다. 김윤석·설경구·하정우·유해진·박희순·이희준·강동원·여진구·김태리…. ‘고작 2편의 영화를 만든 감독이 저 기라성 같은 배우들을 데리고 어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비주류적 감수성에 충실한 ‘장준환 표 영화’가 될 경우 흥행 실패작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교차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부터 집회 도중 최루탄을 맞고 숨진 이한열 사건을 거쳐 ‘호헌 철폐’를 외친 넥타이부대에 얽힌 비화는 무수한 언론 보도로 알려진 익숙한 사건 아닌가. 그렇게 속속들이 알려진 사건을 통해 극적 재미와 예술적 감동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까.
모자이크로 완성한 ‘그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은폐조작 사실을 추적하는 동아일보 윤상삼 기자 역의 이희준. 이 사건이 물고문에 의한 것임을 특종 보도한 윤상삼 기자를 포함해 당시 동아일보 기자 여럿의 모습이 녹아있다(왼쪽).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은폐조작한 박처원 대공수사처장 역의 김윤석은 일당백의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을 연기한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영등포교도소의 교도관으로 고문치사사건의 주범이 따로 있음을 알리기 위한 ‘비둘기’(메신저) 역할을 수행한 한병용 역의 유해진(왼쪽). 영화의 주요 인물 중 유일한 가공인물 연희 역의 김태리. 교도관 한병용의 조카이자 이한열의 대학 후배로서 민주화운동의 방관자에서 ‘6월 항쟁’의 주역으로 변신한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고문치사로 의심되는 시신의 화장동의서에 서명하라는 압력에 저항한 공안검사, 사인을 심장마비로 발표하라는 회유를 거부한 부검의,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라는 보도지침에 저항한 기자, 가두고 지키는 일에 충실하기 위해 조작된 범죄 사실을 외부에 알리는 교도관….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의 불꽃이 꺼지려 할 때마다 점화자의 역할을 한 이들의 공통점은 무얼까. 정권에 미운털이 박히는 한이 있더라도 저마다 직업윤리를 배신하지 않으려 한 ‘양심의 인간’이었다. 바깥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없지만 ‘내가 관장하는 영역’에서 벌어지는 불의와 악행에 침묵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영화 ‘1987’의 미덕은 여기서 발견된다. 그들의 연결고리가 되어준 학생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 종교인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흔히 소시민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통해 ‘진실을 결코 감옥에 가둘 수 없다’는 메시지를 담아낸 점이다.
영화 속 주요 등장인물은 대부분 실존인물이지만 허구의 인물이 하나 있다. 연세대 87학번 신입생 연희(김태리)다. 만화 동아리에서 틀어주는 영화를 보러 갔다가 1980년 광주의 진실을 담은 비디오를 보고 충격을 받아 오열하지만 세상은 바뀌지 않는데 식구들에게 괜한 걱정만 끼치기 싫다며 시위 참여를 거부하는 평범한 학생이다. 연희는 1987년 당시 대부분의 소시민을 대변하는 존재다. 부당한 정치권력에 대한 거부감은 강하지만 그렇다고 반정부 투쟁에 나서는 것은 ‘달걀로 바위치기’로 치부한 방관자다. 하지만 정권을 연장하려는 권력의 폭압이 그녀의 일상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순간 더는 뒷짐만 지고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연희는 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 만섭(송강호)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관객을 뒷좌석에 태우고 1987년에 벌어진 사건들의 한복판을 달리다가 감정의 변곡점에 도달한 순간 일생일대의 유턴을 단행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영화가 개봉한 2017년은 87항쟁 30주년인 동시에 종교개혁 500주년이었다. 종교개혁의 핵심 또한 지상의 권력이 행하는 부정과 불의에 더 이상 눈감지 않고 저항하는 ‘양심적 인간’의 탄생에 있었다. 영화 ‘1987’은 1987년 6월 한국 사회에서 그런 양심적 인간이 대거 출현함으로써 시민혁명이 이뤄졌음을 감동적으로 묘파해낸 것이다.
‘1987’의 흡인력은 이런 빛을 부각하는 어둠에 대한 입체적 묘사에서 길어 올려졌다. 영화에 등장하는 무수한 양심적 인간 군상이 영화 ‘어벤저스’에 등장하는 슈퍼히어로들이라면 그들 모두를 압도하는 막강한 빌런(악당)도 필요하다. 그 역할을 수행한 것이 경찰청 대공수사처장 박처원 역의 김윤석이다.
김윤석, 일당백의 악역 연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 조작과 정권 연장을 위해 야당 정치인과 학생운동권을 하나로 엮는 대형 간첩단 사건을 기획한 그는 돈과 권력에 취한 단순한 냉혈한이 아니다. 가족처럼 여겼던 ‘빨갱이’에게 일가족이 몰살당한 뒤 월남해 빨갱이 사냥꾼이 돼 거침없는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확신범이다. 그래서 동료의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들어간 부하에게 “너래, 애국자야. 고개 빳빳이 들고 살라우”라고 외칠 정도로 죄의식이 없다. 또 시신 부검을 위해 영장을 내미는 검사(하정우)에게 “사냥개끼리 싸우다 사냥감을 놓치면 주인이 가만 있간?”이라고 으르렁댈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그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대공수사요원들의 그물망이 좁혀오는 긴장감은 웬만한 스릴러 뺨칠 정도다.어떤 면에서 박처원은 영화 속 다른 이들처럼 사명감에 투철한 인간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사명감에 권력의 독이 침투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양심과 인생은 공깃돌처럼 갖고 놀아도 된다는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지고 만 것이다. 김윤석은 자신의 배역에 대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신문 헤드라인을 직접 보며 혀를 끌끌 찬 내 입으로 30년 뒤 그 대사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것 같지만 스스로 ‘권력의 도구’임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 모순을 합리화하기 위해 ‘애국심’을 끌고 온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장준환 감독은 “2015년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주인공이 박처원이었고 그래서 쪼는 맛이 대단했다”며 “하지만 박처원을 주인공으로 삼을 순 없었기에 그에 맞서 민주화의 씨앗을 뿌린 수많은 분을 주인공으로 그리는 각색 작업을 거쳤다”고 설명했다. 장 감독은 자신이 만든 영화임에도 감정이 북받쳐 시사회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여러 차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내 영화를 보고 운다는 게 너무 창피하지만 1987년 당시 학생운동에 열심이던 친구들에 대한 부채의식 같은 게 있었다. 그래서 이 작품을 꼭 영화화하겠다고 결심했지만 막상 영화화가 가능할까 생각했는데 이렇게 기적처럼 영화화된 것을 보니 자꾸 눈물이 나온다.”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영화팬들에게선 ‘천재감독’으로 불렸지만 작품수가 적은 장준환 감독은 자신의 세 번째 장편영화 ‘1987’에서 주류영화로서도 걸작의 반열에 오를 작품을 만들어냈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이 코너에서 영화 ‘택시운전사’를 2017년 최고의 수작으로 꼽았었다. 하지만 ‘1987’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택시운전사’의 주인공 송강호가 최고의 연기를 펼친 것은 맞지만 작품상과 감독상은 ‘1987’의 몫이 돼야 할 듯하다. 그만큼 영화의 짜임새나 미학적 성취에서도 ‘1987’이 앞서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미학적 완성도는 한 명 한 명의 작은 용기와 사연이 모여 민주화 쟁취라는 대하를 이루게 된다는 전체적 구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다양한 거울 이미지를 통해 이 영화가 객석에 앉은 관객 자신의 이야기임을 환기한다. 특히 영화가 시작되고 한참 동안 말없는 시신으로만 등장하던 박종철(여진구)이 영화 중간 돌연 물고문을 당하는 생생한 인간으로 형상화되는 순간에서 빛을 발한다. 카메라는 물속에 강제로 처박힌 채 고통스러워하는 박종철의 얼굴을 롱 테이크로 클로즈업해 보여주면서 박종철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을 관객 자신들에게 그대로 투사시킨다. 그때 수면 저 너머로 고문 경찰의 이미지가 흐릿하게 어른거리고 그들의 웃음소리가 웅얼거리며 들려온다.
민주화운동의 대부 김정남(설경구)이 경찰의 체포를 피하려 향린교회 난간에 매달려 버둥거리는 그림자가 스테인드글라스에 어른거리는 장면이나 박처원이 텅 빈 회의실 거울을 통해 당황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장면도 비슷한 효과를 발생시킨다. 이 영화에 자주 흐르는 노래가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으로 시작하는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이다. 그렇게 이지러진 거울 이미지 뒤쪽에 숨어 있는 실체는 무엇일까. 당신의 숨통을 조이고, 발버둥 치게 만들고, 결국 용도 폐기된 느낌을 안겨주는 그 섬뜩함의 실체는 영화를 통해서 확인하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특종보도를 둘러싼 동아일보와 중앙일보의 엇갈린 주장도 명쾌하게 정리해 보여준다. 박종철 군 사망사건은 중앙일보의 사회면 2단 기사로 최초로 알려졌지만 그것이 물고문의 결과였고 경찰의 조직적 은폐 축소가 있었다는 것은 동아일보 전·현직 기자들의 활약으로 만천하에 드러났다. 실제 영화에서 중앙일보 기자나 편집국은 두어 차례만 등장한다. 반면 동아일보 기자들의 활약상을 응집한 윤상삼 기자(1999년 작고, 이희준)는 주요 등장인물로 맹활약을 펼친다. 또 동아일보 편집국은 박종철 관련 보도를 금한 정부의 보도지침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진실 보도를 위해 똘똘 뭉치는 모습으로 여러 차례 등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1987’은 현재의 동아일보 기자들에게도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게 해주는 거울 역할을 수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