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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비밀 核개발 전모

中핵실험 3년 후 핵무장 시작… CIA 간첩 軍장교 배신해 무산

  • 최창근 대만 전문 저술가, 한국외국어대 박사과정 caesare21@hanmail.net

대만 비밀 核개발 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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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단 3~6개월 내 핵무기 개발 수준 도달
    ●SRBM 독자 개발 천마계획(天馬計畫) 수립
    ●CIA 포섭 核개발 책임자 미국 도주·비밀 폭로
    ●‘대만의 배신자’ 장셴이 “나는 평화주의자”
대만육군.

대만육군.

1988년 1월 장징궈(蔣經國) 대만 총통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78세. 1978년 총통이 된 지 10년째 되던 해다. ‘중화민국헌법’에 따라 사법원장(司法院長) 린양강(林洋港) 앞에서 부총통 리덩후이(李登輝)가 총통 취임 선서를 했다. 

장징궈 사망 후 대만 정국은 요동쳤다. 장제스(蔣介石)-장징궈 2대 ‘장가천하(蔣家天下)’는 종지부를 찍었다. 후계 구도는 확립되지 않았다. ‘명목상’ 후계자 리덩후이의 권력 기반은 약했다. 리덩후이가 장징궈 유고(有故) 시 뒤를 이을 부총통이 된 것은 이변(異變), 의외의 사건이었다. 


장징궈 전 대만 총통.

장징궈 전 대만 총통.

권력은 행정원장 위궈화(俞國華), 입법원장 니원야(倪文亞), 사법원장 린양강, 국민당 비서장 리환(李煥) 등 중국 본토파 대로(大老)들 수중에 있었다. 당이 국가를 영도하는 당-국가 체제(黨國體制·Party-state system)하에서 국민당 내 리덩후이의 입지는 없다시피 했다.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도 리덩후이를 미덥지 않아 했다. 

실질 권력자는 참모총장(參謀總長·한국 합참의장과 유사) 하오보춘(郝柏村)이었다. 하오보춘은 1981년 12월 참모총장 취임 후 7년째 자리를 지키며 ‘영원한 참모총장’으로 불렸다. 하오보춘은 장씨 가문의 신임도 한 몸에 받았다. 그는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포병과 12기 졸업·임관 후 승승장구해 일급상장(一級上將·대장)으로 진급했다. 방위 최일선인 진먼(金門) 방위사령관, 총통부 시위장(侍衛長·경호실장), 육군 총사령 등 요직을 역임했다. 하오보춘은 국민당 본토 출신 원로·소장파 지지하에 권력을 장악했다. 대만지구(臺灣地區)에는 계엄령이 선포됐고, 군에는 비상대기령이 하달됐다. 계엄사령관은 하오보춘이었다. 

중국은 대만해협 피안(彼岸)의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하오보춘은 ‘반공대륙(反攻大陸·본토 무력 수복)’을 주장하는 군부 강경파 대표 주자였다. 그가 어떤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 긴장 속에 6개월이 흘렀다. 



1988년 7월 30일 대만 정부 대변인 겸 행정원 신문국장 사오위밍(邵玉銘)은 ‘중대 성명’을 발표했다.

“용서 못할 민족 반역 범죄”

“대만은 핵무기 보유국이다. 중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전략·전술핵 개발을 완료했다. 금일부로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한다.” 

핵 전문가·군사 전문가가 배석하고 증빙사진이 제출된 브리핑 내용은 세계 각국으로 긴급 타전됐다.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 이사회가 소집됐다. 5대 상임이사국은 이구동성으로 대만의 처사를 비난했다. 중국·소련이 특히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영국·프랑스도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덩샤오핑(鄧小平)도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대만의 행위는 염황자손(炎皇子孫) 공통의 번영·이익에 반하는 용서 못 할 민족 반역범죄다.” 

덩샤오핑의 목소리는 런민일보(人民日報) 사설을 통해 표출됐다. 중국 푸젠(福建)성 샤먼(廈門)에서 1.8㎞ 떨어진 진먼섬에도 긴장 수위가 높아졌다. 1958년 8·23 진먼 포격전 후 1979년 1월 1일 미·중 수교와 동시에 중지된 포격이 재개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샤먼의 인민해방군이 포문을 다시 열었다. 대만을 겨눈 둥펑(東風) 미사일에는 전술핵이 탑재됐다. 

미국은 대만 정부의 처사를 비난했지만, 대만을 방기(放棄)할 수는 없었다. ‘대만 안전보장 조항’이 명시된 ‘대만관계법(臺灣關係法·TRA)’ 조항을 근거로 해군 제7함대 순양함·구축함을 파견했다. 대만해협은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세계는 1962년 쿠바 위기 이후 다시금 핵전쟁 공포에 휩싸였다. 

여기까지는 1988년 장징궈 사후, 대만 군부 강경파가 권력 장악 후 ‘핵무장 선언’을 한 것을 가정한 가상 시나리오다. 사실은 더 드라마틱한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1988년 1월 9일 대만 남부 가오슝(高雄) 샤오강(小港) 국제공항. 싱가포르 여권을 소지한 한 남자가 비행기에 탑승했다. 그는 한 미국 회사 직원 신분이었다. 남자는 홍콩을 거쳐 유나이티드항공 편으로 미국 시애틀 타코마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1월 8일 ‘해외여행’을 명분으로 일본으로 간 그의 아내와 세 자녀도 1월 10일 시애틀에서 재회했다. 일가는 미국 국내선을 이용해 1월 12일 워싱턴에 도착했다.

사라진 핵무기 개발 책임자

대만군은 미국 ‘대만관계법’에 따라 미국산 무기로 무장한다. [REX]

대만군은 미국 ‘대만관계법’에 따라 미국산 무기로 무장한다. [REX]

그가 사라진 사실이 대만에 알려진 것은 1월 12일이다. 출국 전날 그가 남긴 다섯 항(項)으로 이뤄진 사직서가 사무실에서 발견됐다. 그의 도주로 대만 정부는 발칵 뒤집혔다. 즉각 추포(追捕)령이 발령됐다. 대만에 남은 일가족에게 국방부 군사정보국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그의 도주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건이었다. 그중 참모총장 겸 중산과학연구원(中山科學研究院·한국 국방과학연구소와 유사) 원장 하오보춘이 받은 충격은 컸다. 도주한 이는 장셴이(張憲義), 현역 육군 상교(上校·대령)로서 중산과학연구원 제1 연구소 부소장이었다. 1979년 2월, 린이푸(林毅夫·전 세계은행 부총재)가 진먼 섬에서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망명한 사건에 비할 바 아니었다. 린이푸는 육군 상위(上尉·대위)로 진먼섬 주둔 일개 중대장에 불과했다. 

도주 사건은 장징궈에게도 보고됐다. 장기 와병 중이던 그는 충격으로 병세가 악화됐다. 충격과 분노를 이기지 못한 그는 1월 13일 오후 3시 55분, 대량 토혈(吐血) 후 숨을 거뒀다. 

장셴이는 단순 고급장교가 아니었다. 그는 핵 개발 책임자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간 비밀리에 추진하던 대만 정부의 기밀이 담겨 있었다. 장셴이가 어떤 기밀 자료를 가지고 갔을지도 알 수 없었다. 하오보춘은 1988년 1월 17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원자력연구소 부소장 장셴이 일가가 미국으로 도주했다. CIA(미국 중앙정보국) 공작이 분명하다. 핵 개발 관련 기밀을 넘길 수작이다. 중산과학연구원 부원장 예창둥(葉昌桐)에게 국가가 입을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사후 처리를 지시했다.” 

CIA 요원들의 보호하에 워싱턴에 안착한 장셴이는 1월 13일 미국 의회 비밀 청문회에 출석했다. 그가 관여한 ‘대만 핵무기 개발 비사(祕史)’가 빠짐없이 녹취·기록됐다. 기밀 문건은 단 한 건도 소지하지 않았지만 장셴이 자신이 대만 핵 개발의 산증인이었다. 그는 미재대협회(美在臺協會·미국-대만 단교 후 설립된 비공식 외교기구·약칭 AIT) 타이베이 주재 대표 데이비드 딘도 만났다.

“한간(漢奸·민족반역자)-장셴이”

1월 16일 딘은 ‘장징궈 총통 조문’을 명분 삼아 타이베이로 갔다. 리덩후이 총통과 회견에서 그는 “핵무기 개발 중단”을 강력히 요구했다. 증거자료로 정찰위성이 촬영한 지우펑기지 핵실험장 사진도 제시했다. 딘은 딩마오스(丁懋時) 외교부장, 정웨이위안(鄭為元) 국방부장, 하오보춘과의 만남에서도 재차 보증을 요구했다. 대만 정부는 속수무책이었다. 미국의 요구를 수용해야 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도 피할 수 없었다. 이로써 비밀리에 추진해온 대만의 핵 개발 계획은 수포가 됐다. 사건은 대만 정계로도 파급됐다. 민진당 입법위원 우수전(吳淑珍·천수이볜 전 총통 부인)은 대(對)정부 질의에서 사건 책임을 물어 국방부장·참모총장 해임을 요구했다.
 
계획을 망친 ‘원흉’ 장셴이에게는 ‘한간(漢奸·민족반역자)’ 낙인이 찍혔다. 사건이 수습 국면에 접어든 1988년 8월 2일, 중정이공학원(中正理工學院·현 국방대학 이공학원) 졸업식 공개 연설에서 하오보춘은 비분강개하며 말했다. 

“장셴이는 반면교재(反面敎材)다. 그는 자신을 배신했다. 국가도 배신했다.” 

중정이공학원은 장셴이의 모교, 그는 물리학과 1회 졸업생이었다. 

‘대만의 배신자’ 장셴이는 1943년 하이난(海南)섬 하이커우(海口)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장야오능(張曜能)은 대만총독부 설비기사였다. 광복 후 일가는 대만 중부 타이중(臺中)에 정착했다. 아버지는 공군 기술장교로 전직했다. 장셴이는 명문 타이중 제2고등학교(第二高級中學)를 거쳐 국방의학원 약학과에 입학했다. 약학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재도전 끝에 1963년 중정이공학원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2년 과정 이수 후 신주(新竹)의 국립칭화대학(國立清華大學) 원자력공학과(核工係) 1기로 남은 대학 생활을 보냈다. 베이징에 시원을 둔 국립칭화대학은 1955년 신주에서 복교(復校) 후 재기의 기틀을 다져가고 있었다. 그중 원자력공학과는 촉망받는 학과였다. 

1953년 아이젠하워는 유엔총회에서 ‘평화를 위한 원자력(Atoms for Peace)’을 역설했다. 대만도 미래 에너지로 원자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연구·발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미국은 기술·자금 원조를 했다. 국립칭화대학 원자력공학과는 대만 원자력 연구의 메카였다.

민감(敏感)국가, 대만

장셴이는 대학 졸업 후 1968년 중산과학연구원 주비처(籌備處) 연구원으로 자리 잡았다. 1969년 중산과학연구원이 정식 개원했다. 옌전싱(閻振興)이 초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행정원 교육부장·국가과학위원회 부주임위원(차관)·원자능위원회 주임위원(장관) 등을 역임한 저명 학자·테크노크라트였다. 중산과학연구원은 대만 방위산업의 중추였다. 원장·부원장을 비롯한 연구원은 기본적으로 군인 신분이었다. 

1964년 10월 16일 중국은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에서 첫 핵실험에 성공했다.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에 이어 세계 5번째 핵보유국이 됐다. 장제스는 경악했다. 우려가 현실로 바뀌었다. ‘전력 비(非)대칭’이 기정사실화했다. 본토 수복은커녕 대만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몰렸다. 자강(自强) 대책이 필요했다. 

3년 후 초여름, 행정원 국가과학위원회 주임위원 우다유(吳大猷)는 총통부의 호출을 받았다. 국가 명운이 걸린 중대 계획과 관련되었다. 국방부·중산과학연구원이 입안한 프로젝트명은 ‘신주계획(新竹計畫)’, 최종 목표는 독자 핵 개발이었다. 계획 검토를 요구받은 우다유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대명제에는 동의했지만, 현실 문제가 따랐다. 그 시절 대만 과학기술 수준으로 단기간에 핵 개발을 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이었다. 기초과학·산업 육성이 우선이었다. 경제부장 리궈딩(李國鼎)을 위시한 테크노크라트의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총통 장제스, 국방부장 장징궈도 수긍했다. 실무진의 의견을 수용해 기초 체력을 키우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전자, 정밀기계, 반도체 산업을 전략산업으로 육성키로 했다. 원자력공학 관련 인재 양성도 관건이었다. 해외 우수 인재들에게 귀국을 장려했고 후진들을 미국·영국 등에 유학시켰다. 귀국한 인재는 장제스·장징궈 부자가 친히 격려했다. 신주과학산업단지(HSP)는 대만 과학기술의 요람이 됐다. 

장셴이에게도 기회가 왔다. 1969년 유학길에 올랐다. 테네시대 원자력공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해 원자력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4년 후 박사 학위도 취득했다. 귀국 후 중산과학연구원 제5 연구소로 복직했다. 첫 임직은 원자력반응팀장이었다. 중교(中校·중령) 계급장도 받았다. 1984년 상교로 진급했고 제1연구소(원자력연구소) 부소장이 됐다. 

미국 유학 시절 장셴이는 미국 정부의 주의를 끌었다. 국적, 직업, 전공 모두 문제였다. 미국은 인도·파키스칸·이란·사우디아라비아·대만 등을 ‘민감(敏感)국가’로 분류했다. 대만 국적의 현역 장교, 원자력공학 전공자 장셴이는 자연 ‘주요관찰 인물’ 목록에 올랐다. CIA·FBI(연방수사국) 등 정보·방첩기관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유학생 신분’이던 장셴이는 정보·방첩당국에 당장 필요한 인물은 아니었다. 미국 정보기관은 귀국 후 장셴이의 진로와 미래 가치에 주목했다.

CIA가 20년 넘게 공들인 간첩

대만 신주과학기술단지.

대만 신주과학기술단지.

장셴이와 CIA의 첫 접촉은 그가 중정이공학원에 입학한 1960년대에 이뤄졌다. 당시 미국대사관 무관(武官), 미국군사원조기술단(MAAG) 등 다수 미군 장교가 타이베이에 주재했다. 상당수의 원소속은 CIA였다. 그들 눈에 물리학 전공의 사관생도, 장셴이가 띄었다. 그들은 세미나·학술대회 등 공개 장소에서 장셴이에게 접근했다.
 
“우리 ‘회사’는 당신의 논문과 발표문에 흥미가 있다. 식사 한번 하고 차 한잔하면서 좀 더 얘기해보는 것이 어떠냐?” 

‘일개 대학생’ 신분이던 장셴이는 그들의 요구에 응했고, 브리지게임을 하면서 어울렸다. 만남 횟수가 더해가면서 장셴이는 ‘스파이’로서 각종 면접, 보안검사를 통과했다. 거짓말 탐지기 조사도 빠지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장셴이는 CIA 내부 동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장셴이에 대한 CIA의 공작이 본격 시작된 것은 1982년이다. 미국재대협회 타이베이 주재 대표로 제임스 릴리(훗날 주한 미국대사 재임)가 부임했다. 중국 칭다오(青島) 태생의 그는 유창한 중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한국·중국·대만·일본 등에서 CIA 공작원으로 활약했다. 

그 무렵 대만은 미국이 우려할 만큼 핵 개발 계획을 진척시켰다. ‘신주계획’에서 ‘타오위안(桃園)계획’으로 개명 후 본래 목표인 핵 개발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1979년 7월, 대만 제1기 원전 진산(金山)이 상업운용을 시작했다. 2년 후 제2기 원전 궈성(國聖)도 터빈을 돌리기 시작하는 등 대만 원자력 공업은 진일보했다. 원전 상업운용은 핵무기의 원료 확보가 기술적으로 가능함을 의미했다. 

비상한 시기, 대만에 부임한 릴리에게 장셴이는 긴요한 존재였다. 그는 촉망받는 원자력공학자이자 대만 국방부 산하 연구소 핵심 요직에 있었다. 정식 공작원이 되기 앞서 또 한 번 테스트를 통과한 장셴이는 정보 거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대만 핵 개발 계획의 주요 내용과 일정, 중산과학연구원과 정부 관계 기관 간에 오간 보고서, 관련 회의 내용 등이었다. 반응기, 감속기를 비롯한 원자력 관련 주요 부품 수급 내용도 빠지지 않았다. 그중 CIA가 주목한 것은 핵무기 소형화 기술이었다. 정보 거래를 위한 회동은 타이베이 북부 번화가 스린(士林) 야시장 부근에서 2~3개월 단위로 이뤄졌다.

플루토늄 추출 성공… 농축 우라늄 기술 확보

장셴이가 CIA 스파이로 암약할 무렵 타오위안계획은 속도를 냈다. 캐나다로부터 연구용 원자력 반응기를 반입했다. 대만 남단 핑둥(屛東)현 주펑(九鹏)기지 지하에 핵실험 설비를 완공했다. 중산과학연구원 산하 원자력연구소는 재처리 기술을 이용해 ‘플루토늄’이라 불리는 방사성동위원소(Isotopes of plutonium)-239 추출에 성공했다. 대만의 주요 우방이자 비밀 핵 개발을 추진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우라늄 100t을 수입했다. 1981년께는 농축 우라늄 기술도 확보했다. ‘핵 무기화’의 관건인 핵 소형화 기술에도 진척이 있었다. 전폭기에 장착 가능한 핵탄두용 소형 핵 개발도 속도를 냈다. 단거리미사일(SRBM)을 자체 개발하는 ‘천마계획(天馬計畫)’도 수립했다. 부가적으로 F-16 전투기를 모델로 대만이 자체 개발 중이던 IDF(국산 방위전투기) 징궈호(經國號·AIDC F-CK-1)에 탑재 가능한 수준의 전술핵무기 개발도 추진했다. 

미국은 대만의 핵 개발 계획을 주시하면서도 방관하는 자세를 유지했다. 표면상 대만의 핵 관련 산업 발전은 ‘핵의 평화적 이용’ 원칙에 어긋나지 않았다. 대만의 수출 경쟁력과 직결되는 에너지 수급 문제도 있었다. 장징궈 총통의 태도도 진중했다. 그는 핵 개발에 대해 대외적으로 NCND(시인도 부인도 안 함)를 시종일관 유지했다. 다만 한 가지만은 분명히 했다. “핵무기 제조 능력은 가지되, 제조하지는 않는다(有能力制條但不制條).” 이는 타오위안계획의 대원칙이기도 했다. 

장징궈가 천명한 원칙은 미국의 레드라인(Red-line·한계선)을 넘지 않는 것이었다. 1968년 발효한 NPT 체제하에서 미국·영국·프랑스·소련·중국을 제외한 어느 나라도 공식적으로 핵무기를 보유할 수는 없었다. 1974년 인도가 핵실험에 성공했지만 국제사회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핵보유국으로 의심받았으나 이스라엘 정부는 NCND를 유지했고 미국은 이를 모른 척했다. 

미국은 ‘민감국가’들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며 그들에게 레드라인을 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었다. 장징궈는 레드라인을 정확히 인지하고 준수했다. 또한 민주화 계획도 수립하고 이행했다. 당금(黨禁·정당 설립 금지) 조치하에서 당외(黨外·국민당 밖 재야) 인사들이 1986년 첫 야당 민진당을 만들었지만, 묵인했다. 1987년 대만지구 계엄령도 공식 해제했다. 본토화(대만화)도 추진해 본성인(本省人·대만 출신) 리덩후이를 부총통으로 지명했다. 미국은 장징궈를 신뢰했다.

CIA, 하오보춘 ‘제거’도 고려

하오보춘 전 대만 참모총장.

하오보춘 전 대만 참모총장.

CIA가 주시한 인물은 따로 있었다. 하오보춘이었다. ‘반공대륙’을 신봉하던 그는 군부 강경파의 대표 인물로 1981년부터 참모총장으로서 실질적인 군 통수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중산과학연구원도 그의 통제하에 있었다. 이런 와중에 장징궈의 건강은 악화일로로 치닫고, 핵무기 개발은 가시화되고 있었다. 1987년 대만 국방부의 판단으로 최장 1~2년, 최단 3~6개월 내 전술 핵무기 개발이 가능한 수준에 도달했다. 주펑기지에서 행한 고폭 실험은 모두 성공했다. 징궈호 전투기도 1988~1989년 시험비행을 앞두고 있었다. 장징궈가 사망할 경우 실전에서 사용 가능한 전술핵무기가 군부강경파 수중에 들어갈 상황에 처한 것이다. 

‘대만의 핵무기 개발 성공-장징궈 사망-하오보춘 등 군부 강경파 부상’으로 이어지는 시나리오는 미국에 최악이었다. 1986년 모르데차이 바누누의 폭로로 베일에 싸여 있던 이스라엘 비밀 핵 개발이 수면으로 떠올랐다. 중동에서 긴장 수위가 높아졌다. 무엇보다 중국은 대만이 핵무기 보유 시 ‘무력공격’을 천명한 터였다. 대만의 핵무기 보유 선언은 전쟁의 서막이었다. 미국은 장징궈가 하오보춘을 통제해주길 바랐다. 불가피할 경우 ‘제거’도 고려했다. 

1987년 여름, 대만의 핵무기 개발이 초읽기에 들어갔을 무렵 CIA는 중대 결정을 내렸다. 장셴이를 미국으로 망명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대만의 핵 개발을 좌절시킬 수 있는 치명타였다. 시행은 이듬해 1월로 잠정했다. 장셴이도 받아들였다. 한 가지 조건은 달았다. “전 가족이 함께 가게 해달라.” ‘회사’는 동의했고, 도주 계획을 수립했다. ‘회사’ 명의 여권을 만들었고, 망명을 도울 요원도 엄선해 사전 접촉하게 했다. 1988년 1월 9일 계획은 성사됐고, 결과적으로 대만의 핵 개발 계획은 백일몽이 됐다. 

장징궈 사후 리덩후이는 국민당 수석부비서장 쑹추위(宋楚瑜·현 친민당 주석) 등 소장파의 지지를 바탕으로 권력을 순조롭게 승계했다. 1988년 7월 국민당 주석으로 취임해 대권에 이어 당권도 장악했다. 그는 미국이 내건 핵 개발 계획 폐기를 순순히 이행해 미국의 신임도 얻었다. 권력을 장악한 리덩후이는 보수·강경파의 수장 하오보춘에도 손을 썼다. 미국도 원하는 바였다. 1989년 12월 단행된 개각에서 하오보춘은 행정원 국방부장이 됐다. 명목상 ‘영전’이었으나 실권을 잃었다. 이듬해 6월 하오보춘은 행정원장(국무총리 해당)을 맡으면서 군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 상실했다. 훗날 국민당에서도 사실상 축출됐다.

“나는 조국을 배반한 적 없다”

장셴이 회고록 ‘원자탄! 스파이? cia’.

장셴이 회고록 ‘원자탄! 스파이? cia’.

장셴이는 워싱턴 근교의 안가(安家)를 거쳐 아이다호주 미국국가실험실(Idaho National Laboratory)에 적을 두었다. 그곳에서 그는 ‘제4세대 원자력발전소’ 연구에 매진했다. 대만 군 검찰은 1988년 장셴이에게 ‘군무무단이탈(軍中逃亡)죄’를 적용해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2000년 7월, 12년 6개월의 공소시효가 만료돼 장셴이는 법적 책임에서 자유로워졌다. 

2016년 12월 출간된 구술 회고록 ‘원자탄! 스파이? CIA(核彈! 間謨? CIA : 張憲義訪問記錄)’에서 장셴이는 자신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 

“나는 조국을 배반한 적이 없다. 장징궈 총통도 배신하지 않았다. 내가 유일하게 배반한 상대는 하오보춘 단 한 사람이다.” 

덧붙여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핵무기 개발은 국가의 존망(存亡)을 좌우하는 중대지사다. 대만은 핵무기를 개발할 능력은 충분했으나, 개발해서는 안 됐다. 야심만만한 군부 강경파 손에 핵무기가 들어간다면 필시 양안(兩岸) 전쟁의 촉매가 됐을 것이다. 백년대계 관점에서 보았을 때 대만의 생존은 미국과의 관계에 달렸다. 핵무기 개발은 대미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갔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의 망명, 그로 인한 핵무기 개발 좌절은 대만·미국 상호이익을 가져왔다. 무엇보다 나는 평화주의자, 코스모폴리탄이다. 핵은 평화적으로 이용돼야지 전쟁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최창근
● 1983년 경남 고성 출생
● 한국외국어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대만 국립정치대 석사(커뮤니케이션학)
● 한반도선진화재단 연구원, ‘월간중앙’ 타이베이 통신원
● 現 한국외국어대 행정학 박사과정, 동아시아학통섭포럼 총무이사
● 저서 : ‘ 대만 : 거대한 역사를 품은 작은 행복의 나라’ ‘가희 덩리쥔 : 아시아의 밤을 노래하다’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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