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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 殺풍경 “산책 중 만난 이웃에 ‘떨어져!’ 고함”

  • 글·사진 황장석 ‘실리콘밸리 스토리’ 작가·전 동아일보 기자 surono@naver.com

실리콘밸리 殺풍경 “산책 중 만난 이웃에 ‘떨어져!’ 고함”

  • 미국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피해가 급증하면서 곳곳에서 통행제한 조치가 실시되고 있다. 현행 의료 시스템이 환자 폭증을 감당하지 못하자 사람들을 집 안에 최대한 묶어두는 단순하고도 강력한 대응책을 내놓은 것이다. 필자가 사는 캘리포니아주는 시애틀이 있는 워싱턴주와 더불어 미국 내에서 거의 가장 먼저, 가장 강력한 통행제한 명령을 내린 지역이다. 코로나19 통행제한 후 이 도시엔 어떤 변화가 생겨났을까.
코로나19로 인한 통행제한 명령이 내려진 뒤
새너제이 한 공원 농구골대가 나무판으로 막혀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통행제한 명령이 내려진 뒤 새너제이 한 공원 농구골대가 나무판으로 막혀 있다.

“큰일 났다. 내일부터 3주 동안 집 밖에 못 나간대. 물이랑 비상식량이랑 얼른 사 둬! 우리도 지금 가는 중이야.” 

가까운 형에게 문자메시지를 받은 건 3월 16일 점심 무렵이었다. 실리콘밸리를 포함한 샌프란시스코베이 지역 6개 카운티(County) 정부가 동시에 통행제한 명령을 내린다는 소식에 부리나케 차를 몰고 근처 마트로 갔다. 마트엔 이미 같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사람이 가득했다. 실리콘밸리의 코로나19 통행 제한은 이렇게 시작됐다. 참고로 이 6개 카운티에는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 거의 모든 도시가 포함된다.


자택대피 명령이 내려지다

통행제한 명령의 공식 명칭은 자택대피(shelter-in-place)다. 식료품과 기타 생필품, 의약품을 사러 가거나 병원에 가는 등 생존에 필수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출하지 말라는 게 골자다. 이를 어길 경우 1000달러 이하의 벌금이나 지역에 따라선 최장 1년 이하 징역형이 가능하다. 최악의 경우 벌금형과 징역형을 모두 받을 수도 있다. 

당초 4월 7일까지였던 통행 제한은 3월 말 기한이 5월 3일까지로 연장되고 내용도 한층 강화됐다.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이런저런 규제가 추가됐다. 동네 사람 누구에게나 열려 있던 농구장, 테니스장, 수영장, 골프장 같은 시설 이용이 금지됐다. 추가 규제 발표 며칠 뒤 농구장과 테니스장이 있는 동네 공원에 가봤다. 테니스장 철제문이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고 농구장 골대는 나무판으로 막아놓은 게 보였다. 화장실 문에도 잠금장치가 돼 있었다. 원반 던지기, 농구, 야구, 축구 같은 운동도 가족끼리만 해야 한다는 명령이 내려졌다. 사람이 모일 만한 곳은 모조리 폐쇄하고, 다수가 접촉할 만한 운동은 모조리 제한한 것이다. 

4월 4일 토요일 오후 새너제이의 한 식료품점. 코스트코, 트레이더조(Trader Joe’s) 같은 곳보다 가격이 좀 비싸지만 집에서 자동차로 3, 4분 거리라 이따금 가던 곳이다. 맥주를 사려고 들른 식료품점 안엔 주말이라 이것저것 장을 보러 온 손님이 제법 있었다. 얼핏 30~40명 돼 보이는 손님들이 둘에 한 명꼴로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인종별 차이도 없었다. 흑인, 백인, 아시아계, 라틴계 할 것 없이 둘 중 하나는 마스크로 코와 입을 가리고 있었다.




마스크, 뉴 노멀이 되다

새너제이에 있는 트레이더조(Trader Joe’s)
매장 앞에 “다른 고객을 위해 품목당 한 개
씩만 바구니에 담으라”는 내용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새너제이에 있는 트레이더조(Trader Joe’s) 매장 앞에 “다른 고객을 위해 품목당 한 개 씩만 바구니에 담으라”는 내용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계산대 직원도 대부분 마스크를 착용한 상태였다. 미리 가져간 쇼핑백에 맥주를 담아 계산대 위에 올리니 직원이 언짢은 표정으로 쳐다본다. “이제 손님이 가져온 쇼핑백은 사용할 수 없으니 다음부터는 물건을 들고 나가 매장 밖에서 담으라”고 한다. 바이러스 감염 차단을 위해 시행된 조치라고 한다. 알았다고 대답하고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데 마스크를 쓴 손님이 계속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스카프로 얼굴을 두른 백인 중년 여성도 보였다. 

이날은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그동안의 방침을 뒤집고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무엇으로든 코와 입을 가리는 걸 권장한다고 발표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그동안 미국 연방정부는 의료진 또는 환자가 아니면 마스크를 쓸 필요 없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손바닥 뒤집듯 의견을 바꿨다. “얼굴을 가리는 도구는 집에서 만든 마스크든 스카프든 다 괜찮다”고 했다. 사람 간에 ‘사회적 거리’ 6피트(약 1.8m)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면서도 마스크가 감염 예방의 보조수단이 될 수 있다고 인정했다. 물론 공급이 턱없이 부족한 ‘N95 방역 마스크’ 같은 제품은 의료진에게 가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말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동네에서는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 이상한 인간 취급을 당했다. 아시아계 주민이 마스크를 하고 다니면 흑인, 백인 주민이 기분 나쁘게 힐끔거리곤 했다. 하지만 미국 내 코로나19 사망자가 급속히 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연방정부가 마스크 필요성을 인정하자 순식간에 너도나도 얼굴 가리기에 합류했다.


화장지 전쟁이 발발하다

실리콘밸리 殺풍경 “산책 중 만난 이웃에 ‘떨어져!’ 고함”
4월 1일 수요일 오전 9시 20분,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코스트코 매장 앞에 도착했다. 일찌감치 문을 연 매장에 들어가려고 사람들이 150m에 이를 정도로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다 보니 사람 수는 80명 정도였다. 필자도 줄을 서기 위해 가는데 벌써 장을 보고 나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백인 할아버지 한 명이 30개들이 화장지 한 묶음과 12개들이 키친타월 한 묶음을 카트에 싣고 나오고 있었다. 얼굴이 환했다. ‘득템했다’는 표정이었다. 

통행제한 명령이 내려진 3월 중순 이후 지역 마트에선 특정 품목 품귀 현상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미국인의 비상식량 1순위인 파스타 면과 소스 선반은 텅텅 비기 일쑤다. 한국마트에서 라면이 불티나게 팔린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한동안 페트병에 담긴 생수 부족 사태도 있었다. 실내운동장만 한 크기의 코스트코 매장 복도 한쪽을 가득 채웠던 생수가 채워지기 무섭게 팔려나갔다. 그리고 가장 사람들을 애타게 만든 건 화장지와 키친타월, 그중에서도 단연 화장지였다. 

먹는 것도 아닌 이 물건이 연일 품절되자 주민들은 아침 일찍 화장지를 사려고 몰려나왔다. 코로나19 피해 때문에 화장지 공급이 줄었다거나 마스크 원료와 화장지 원료가 같아 생산이 줄었다는 루머도 성행했다. 그 때문에 사재기가 일어났다는 얘기도 돌았다. 화장지는 부피가 크고, 가격이 비싸지 않으며, 한 번 사면 몇 달씩 쓰는 제품이라 마트에서 무한정 재고를 쌓아두지 못하는 게 확실했다. 필자도 3월 중순 통행제한 명령이 내려진 직후부터 몇 차례 화장지를 사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다 이날 겨우 화장지와 키친타월 한 묶음씩을 살 수 있었다. 공급 상황이 좀 나아졌나 싶었다.


공교육 맨살이 드러나다

지역 학교는 일제히 문을 닫았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모든 학생이 학교에 가지 않는다. 3월 중순까지만 해도 4월 초까지 휴교한 뒤 다시 문을 열 계획이었다. 하지만 통행제한이 연장되고 규제가 강화되면서 여름까지 학교 문을 닫기로 했다. 현재 9학년(한국의 중학교 3학년)인 딸도 빨라야 8월 중순 이후에나 학교에 다니게 될 전망이다. 

갑작스럽게 학교 문이 닫히고 나니 허술한 미국 공교육의 문제점이 여기저기서 드러나고 있다. 캘리포니아주는 미국 50개 주 가운데 공교육 수준이 꾸준히(?) 하위권에 속해 왔다. 딸이 다니는 공립학교의 경우 휴교하고 거의 2주가 지나서야 각 가정에 컴퓨터가 있는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옆 동네 공립학교의 경우는 학교가 아무 조치를 하지 않자 부모들이 나서 “제발 아이들 교육 좀 해달라”는 청원을 하기도 했다. 결국 휴교 후 3주가 지났을 무렵에야 일명 온라인 수업이란 게 시작됐다. 하지만 준비 부족으로 수업은 대부분 숙제를 내주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반면 학비가 비싼 사립학교는 달랐다. 중학생 딸을 사립학교에 보내는 친구 얘기를 들어보니 3월 중순 휴교를 하자마자 바로 온라인 강의를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생각보다 교육 프로그램이 마음에 들고 딸 반응도 괜찮다고 전했다. 

통행제한 명령이 내려지면서 3월 중순 이후 어지간한 직장인은 모두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식료품점을 비롯해 생필품을 공급하는 매장이나 전기, 통신, 수도, 의료 등 이른바 필수사업장 근무자가 아니면 모두 재택근무를 하는 게 원칙이다. 그러다 보니 얼굴을 맞대는 회의가 사라졌다. 대신 화상회의가 급증해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실리콘밸리 회사 줌(ZOOM) 주가가 치솟았다. 재택근무 중인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친구에게 물어보니 “화상회의가 얼굴 보고 하는 회의보다는 불편하긴 하지만 그런대로 적응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어 오히려 근무시간은 훨씬 늘어난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부상하는 실리콘밸리 기업 ‘줌’

코로나19 통행제한 명령 발효 후 문을 닫은 새너제이의 한 맥줏집.

코로나19 통행제한 명령 발효 후 문을 닫은 새너제이의 한 맥줏집.

그런가 하면 음식점과 커피숍은 매장 내부 의자와 탁자를 모두 한쪽으로 치워버렸다. 문을 열어도 테이크아웃과 배달만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지난 주 점심 무렵 근처 베트남음식점에 쌀국수를 주문하고 찾으러 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탁자 위에 올려놓은 의자들이었다. 늘 웃는 얼굴로 손님을 대하는 주인의 얼굴빛이 어두웠다. 매장 내부 영업이 금지되면서 문 닫는 음식점, 커피숍도 늘고 있는데, 이 집은 괜찮을까 싶었다. 

회사도 식당도 갈 수 없는 사람들이 그나마 집 밖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산책뿐인 것 같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동네를 산책하는 사람이 전보다 많이 보인다. 며칠 전 오후 5시, 아내와 함께 동네 뒷산 중턱의 산책로를 걸었다. 아시아계로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앞 쪽에서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낯이 익은 걸 보니 산책 도중 종종 마주쳐 인사를 나누던 분 같았다. 점점 거리가 가까워져 인사할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 할머니가 다급하게 말했다. 

“사회적 거리 6피트 유지해 줄래요!” 

미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했지만 바로 “네, 그럴게요” 하고 길옆으로 붙었다. 코로나19 이후 산책 풍경도 바뀌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신동아 2020년 5월호

글·사진 황장석 ‘실리콘밸리 스토리’ 작가·전 동아일보 기자 suron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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