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 국민연금, 신한·우리금융 회장 연임안 반대표
비온 뒤 땅 다지는 신한, 양적·질적 성장 과제로 남아
상황 복잡 손태승, 금감원과 관계 회복부터 숙제
대규모 원금 손실을 낸 해외금리 연계형 파생결합펀드(DLF) 사태와 관련해 금융감독원 제재심의위원회가 열린 1월 16일,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DLF피해자대책위원회 및 금융정의연대 관계자들이 우리은행과 하나은행의 중징계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신한금융과 우리금융은 조용병, 손태승 회장을 중심으로 탄탄한 지배 구조를 갖춘 것으로 평가됐다. 그럼에도 지난 3월 말 열린 주주총회에 대한 금융권 안팎의 관심은 상당히 높았다. 두 CEO의 연임에 ‘태클’을 거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한금융의 1대 주주(9.38%)이자 우리금융의 2대 주주(7.71%)인 국민연금은 두 사람의 연임을 반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게다가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인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까지 두 수장 연임에 반대 의사를 표했다. ISS는 많은 연기금과 헤지펀드, 기관투자자들이 투자 기업에 의결권을 행사할 때 의견을 참고하는 기관으로 꼽힌다.
이에 두 회장의 연임이 어려울 수 있다는 예측도 있었지만 사실 금융권에서는 이변이 없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전망이 더 많았다. 금융사의 경우 일반 제조기업과 다르게 CEO의 심각한 결격 사유가 없다면 변화보다 안정을 택해왔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의 반대 표는 ‘대세’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두 수장의 연임안은 무난히 통과됐다.
‘주주’ 국민연금의 입김
국민연금은 왜 두 회장의 연임을 반대했을까. 표면적 이유는 두 회장에게 각각 법률 리스크와 제재 리스크가 있다는 것이었다. 조 회장의 경우 앞서 지난 2015~2016년 신한은행장으로 재임하던 때 고위 임원과 지인의 자녀를 부정 채용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바 있다. 그는 지난 1월에 열린 1심 재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국민연금은 이를 문제 삼았지만 신한금융 측은 대법원까지 가겠다는 계획이다. 또 조 회장이 법정구속을 면한 만큼 연임에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2심과 3심 일정을 예단키는 어렵지만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조 회장의 3년 임기에는 문제가 없을 전망이다.국민연금은 손 회장에 대해 금융당국으로부터 중징계를 받았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그는 지난해 우리은행장을 겸임했을 시기 해외금리연계 파생결합증권(DLF)을 판매하는 과정에서 관련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금융 당국으로부터 문책 경고를 받았다. 이 징계를 받으면 3년간 금융회사 임원을 할 수 없게 된다. 연임이 불가능해진 셈이다.
그러나 손 회장과 우리금융 측은 제재 통보 직후 서울행정법원에 집행정지 가처분 및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중징계의 효력이 정지됐고, 손 회장 연임의 길이 열리게 됐다.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던진 이유는 또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 강조하고 있는 국민연금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의 일환이었다는 점이다. 주주권 행사는 그간 국내에서는 다소 생소한 개념이었다. 국민연금은 각 기업의 지분을 다수 보유하고 있지만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하기보다는 거수기 역할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지난 2016년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가 도입되면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튜어드십 코드란 국민연금과 같은 기관투자자가 주주권 행사 등을 통해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행동 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주로 환경 혹은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거나 지배 구조가 부실한 경우, 또는 주주의 권익이 침해된다고 판단할 때 주주권을 행사하게 된다. 한마디로 국민연금과 같은 공적인 기관투자자는 ‘나쁜’ 기업에는 거수기 역할만 하지 말고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통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제도다.
“목소리 냈지만 아직 ‘형식적’ 수준”
특히 올해부터는 ‘주주’ 국민연금의 입김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예상됐다. 그간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제한하던 ‘5% 룰’ 규제가 완화됐기 때문이다. 5% 룰은 주식을 5% 이상 보유하거나 이후 1% 이상 지분 변동이 있는 경우 금융감독원과 한국거래소에 보고해야 하는 의무다. 특히 5% 이상의 주식을 가진 투자자가 임원 해임 등 ‘경영권에 영향을 주는 사안’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할 경우 5일 이내에 상세히 보고해야 한다. 이 경우 지분 변동 현황이 그대로 드러나는 데다가 투자 전략이 외부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국민연금으로서는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이에 정부는 활발한 주주권 행사를 위해 보고 의무를 개선하면서 ‘경영권에 영향을 주는 사안’의 기준을 완화했다. 특정 인물을 임원으로 뽑거나 다른 기업과의 인수합병(M&A)으로 이를 한정했고,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정관을 변경하거나 배당을 요구하는 것 등은 제외했다. 시장에서 부담을 덜게 된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하리라 예상했다.
신한금융과 우리금융에 대해 반대표를 행사한 것은 이런 흐름의 일환으로 보인다.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하는 책임감이 생긴 만큼 눈에 보이는 ‘흠’이 있는데 거수기 역할만 할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의욕과 달리 실질적 영향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반대표라는 메시지를 던지기는 했지만 주주총회에서 반전을 연출할 정도의 우호 지분을 확보하지 못한 탓이다. 신한금융에서는 조 회장의 연임안이 재일동포(약 15%)와 BNP파리바(3.55%), 우리사주(4.68%) 등 우호 지분을 바탕으로 무난히 통과했다. 우리금융 손 회장의 연임안 역시 최대주주인 예금보험공사(17.25%)와 24.58%의 지분을 보유한 6대 과점주주(IMM프라이빗에쿼티·푸본생명·키움증권·한국투자증권·한화생명·동양생명), 우리사주(6.42%) 등의 찬성으로 가결됐다.
시장 안팎에서는 국민연금이 실효성 있는 주주권 행사를 위해 우호 지분을 확보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투자 지분을 비교적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지만 해당 지분만으로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번 신한·우리금융 건 역시 이런 면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 금융지주 관계자는 “현 정부의 기조에 따라 국민연금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긴 했지만 아직 ‘형식적인’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라면서 “스튜어드십 코드의 본래 취지에 비춰보면 이번 주주권 행사는 ‘절반의 성공’ 정도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조용병은 ‘성과’ 손태승은 ‘관계회복’
국내 두 대형 금융사의 수장은 우여곡절 끝에 ‘2기 체제’를 맞이했다. 조 회장과 손 회장의 어깨는 1기 체제보다 더 무거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주요 주주들과 이사회가 두 CEO의 연임을 밀어붙인 것은 다소 흠이 있더라도 경영 능력을 믿어보겠다는 메시지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대형 금융그룹 수장으로서 실력을 보여줘야 할 때다. 실제 조 회장은 연임 소감을 밝히면서 “저와 신한에 거는 큰 기대에 반드시 부응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라고 밝히기도 했다.신한금융은 국내에서 이른바 ‘리딩 금융그룹’으로 평가받는다. 신한금융은 지난 2018년 오렌지라이프를 인수하면서 KB금융을 앞질렀다. 다만 KB금융이 4월 10일 푸르덴셜생명을 인수하는 등 다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어 두 금융그룹의 1위 쟁탈전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조 회장은 이런 상황 속에서 그룹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성장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지난 ‘1기 체제’에서 오렌지라이프를 인수하며 신한금융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던 만큼 이제 이를 바탕으로 성과를 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우리금융은 신한금융보다 더 복잡한 숙제를 안고 있다. 특히 금융 당국과의 관계 회복 여부가 관심거리다. 금융감독원이 문책 경고라는 중징계를 결정한 것은 사실상 손 회장의 연임에 반대한다는 메시지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행정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해서 금감원 징계의 효력을 정지시킨 뒤 연임을 밀어붙인 만큼 금감원과의 관계는 껄끄러워질 수밖에 없다.
최근 시장에는 금감원이 우리은행 영업점 직원이 고객의 휴면계좌 2만 3000여 개의 인터넷·모바일뱅킹 비밀번호를 무단 변경한 사안에 대해 제재 방안을 논의할 것이라는 소식이 알려졌다. 금융사의 무단 행위에 대한 금감원의 제재는 당연한 일이지만,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손 회장을 압박하기 위한 움직임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이 사건은 지난 2018년 7월에 벌어진 일로, 우리은행이 자체 감사를 통해 곧장 금감원에 통보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소식이 손 회장의 연임이 결정되는 주주총회 직전에 흘러나왔다. 이에 ‘금감원이 1년 넘게 묵혀둔 사건을 이때 꺼내 든 이유가 따로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물론 금감원 측에서는 최근 DLF 사태 등에 신경 쓰느라 우리은행 관련 제재 방안에 대한 일정이 밀렸다가 이번에 처리하게 됐을 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금감원의 속내야 어쨌든 이런 기류는 앞으로 지속할 가능성이 있다는 게 금융권 관계자들의 평가다. 검사와 제재 권한을 갖고 있는 금감원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실력 행사’를 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게다가 금감원은 법원이 손 회장의 중징계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자 서울고등법원에 즉시 항고장을 냈다. 이외에도 손 회장이 “징계 효력을 취소해 달라”라며 제기한 본안 소송도 예정돼 있다. 양측의 법적 공방은 아직 진행형인 셈이다.
“시스템 부실…신뢰 회복 급선무”
두 회장이 함께 맞닥뜨린 숙제도 있다. 우선 두 금융사 모두 점차 논란이 확대되고 있는 라임 펀드 사태와 관련한 불완전 판매 논란을 잘 풀어내야 한다. DLF 사태에 이어 라임 펀드 사태까지 엮이면서 국내 은행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는 분위기다.이와 관련해 조 회장은 주총에서 “지난해부터 지속된 금융권의 투자 상품 사태로 소중한 자산을 맡겨준 고객에게 큰 실망을 안겨드렸다”라며 “고객 손실을 최소화하고 사태를 빠르게 해결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당장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대한 발 빠른 대응도 숙제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어려워진 실물경제를 지원하면서도 사상 첫 0%대 금리 시대에 따른 은행권 순이익 감소를 최소한으로 막아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어서다. 증권가에서는 올해 4대 은행의 순이익이 1조 원 이상 감소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신한과 우리 같은 대형 금융사의 경우 CEO 개개인보다는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중요한 면이 있다”면서 “DLF 사태나 라임 펀드 사태 등은 금융사의 전반적인 시스템 부실이 드러난 사건으로 볼 수 있는 만큼 이에 대한 신뢰 회복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