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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이 ‘DJ의 영원한 비서실장’인 박지원 의원은 목포에서 37.3%를 득표해 48.8%를 얻은 김원이(52) 민주당 후보에게 완패했다. 그는 같은 지역구에서 18~20대 총선에 출마해 2위 후보와 작게는 15.5%에서 크게는 54.9% 격차로 이겼을 만큼 맹주였다
이번 총선에서는 ‘망치 잃은 토르’가 됐다. 박 의원은 인정하지 않겠으나 20대 총선 당시 그의 당선에 ‘안철수 효과’가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호남 유권자들은 차기 대권주자가 있는 정당에 마음을 써왔다.
그는 21대 총선 당일 페이스북에 “문재인을 가장 많이 도운 사람은 박지원”이라며 ‘대통령 마케팅’까지 폈지만 민주당 후보의 벽을 뚫지 못했다.
‘정치인 박지원’은 최근 10년여 동안 다채널 시대의 총아였다. 이 시기 지상파와 종합편성채널, 라디오, 팟캐스트 등에서 정치 콘텐츠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촌철살인의 입담을 자랑하는 그는 적확한 비유와 날카로운 훈수를 기초자산 삼아 셀럽(celebrity) 방송인으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벌써 방송가에서 ‘자연인 박지원’이 블루칩이라는 말이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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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7월 전격적으로 정계 복귀를 선언한 DJ는 ‘새 피 수혈’을 명분 삼아 같은 해 8월 천 의원을 비롯해 법조인 20여 명을 전격 영입했다. 이 사실을 언론에 알린 사람이 박지원 당시 국민회의 대변인이었다.
천 의원은 1996년 제15대 총선 경기 안산을에서 당선된 뒤 4선을 했다. 2015년 4·29 보궐선거 때는 광주 서을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5선). 당선 소감으로 “‘뉴 DJ’들을 모아 새정치민주연합(현 민주당)과 호남에서 경쟁하겠다”고 밝혀 화제를 모았다. 이듬해 총선에서는 국민의당 후보로 54.5% 득표율을 기록해 6선 고지에 올랐으나 칠순을 앞두고 ‘문재인 키드’로 불리는 양향자 후보에게 막혀 7선 등극은 접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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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전 의원이 2014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회고록에 따르면 애초 DJ는 “정동영 씨가 앵커로 얼굴이 알려졌으니 서울에서 나가보도록 하면 어떻겠느냐”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 앵커가 전주로 가겠다고 완강히 고집”해 고향 출마가 결정됐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24년 후 고향에서 고교 및 대학 후배에 져 퇴장하게 됐으니 정치인의 운명이란 참으로 얄궂다.